129화
“백작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으음… 그래.”
프란츠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옆 방에서 자고 있던 이슬린은 일어날 시간이 되자마자 날 깨웠다.
어젯밤 늦게까지 두 하프 드래곤 녀석들이랑 놀아 줘서 그런지 몸이 무겁기만 했다.
“한잔하시죠.”
“응.”
이슬린은 한창 수마와 싸우고 있는 내게 마실 걸 건넸다.
“…크흐! 이거지.”
아침 댓바람부터 마시는 레드 핀 에이드.
새콤 달콤하면서 탄산까지 자글자글한게 잠 깨는 데는 딱이었다.
‘아침부터 이런 거 마시면 빨리 죽는다던데.’
뭐 어떤가.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없이 오래 살아서 행복하진 않을 거다.
“탈리스 국왕에게서 전언이 왔습니다. 오늘 조찬을 함께하고 싶다더군요.”
“음?”
프란츠의 국왕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라.
뭐가 나올진 몰라도 맛있는 게 나올 건 분명했다.
“그래, 얼른 준비하지.”
“네, 백작님.”
이슬린은 프란츠의 시종들에게서 씻을 물과 깔끔히 정리해 놓은 옷을 가져다줬다.
어제 입던 옷은 레드 핀 시럽으로 끈적해져서 다시 입기는 좀 그랬다.
대충 준비를 끝마치자 누군가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슈.”
“밤새 편히 쉬셨습니까, 백작 각하.”
어제 본 프란츠의 시종이 내게 인사했다.
“아, 예. 뭐 덕분예요.”
“같이 오신 분은 어떠셨는지요.”
“저도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다행이군요. 혹시 국왕 전하의 전언은 들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예. 마침 나가려던 참입니다.”
“아하. 그럼…….”
그렇게 시종은 조찬이 있을 장소로 날 안내했다.
외관은 그리 화려하진 않았지만, 내부만큼은 왕성이란 이름에 걸맞게 있을 건 다 있었다.
알현실은 물론, 시종들의 숙소까지.
곁눈질로 흘긋거리며 시종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조찬이 열릴 소규모 연회장 같은 곳에 도착했다.
“아! 임페라 백작! 왔군!”
조찬 준비는 벌써 끝나 있었다.
탈리스, 거기에 유르와 투린까지 저마다 자릴 잡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하! 죄송하긴! 백작 자네 덕분에 간만에 푹 잤더니 아침부터 눈이 번쩍 떠지더군. 오히려 내 쪽에서 감사해야 할 일이지.”
“허허.”
탈리스의 푸근한 미소와 덕담 세례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유르와 투린도 어제 일 덕분인지 내게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자 조찬이 시작됐다.
시작은 가벼운 스프와 치즈 비스무리한 거였다.
“실례지만… 이건 뭐죠?”
“아! 우리 북방인들이 즐겨 먹는 산양의 젖을 발효시킨 거라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치즈 맞네.’
치즈면 맛있을 거다. 뭐에든 잘 어울리는 놈이니까.
“…음!”
엄지 손가락만한 치즈를 먹자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스프도 맛이 괜찮았다.
사골 베이스로 만들었는지 깊은 풍미가 식욕을 자극했다.
“맛있네요.”
“허허! 그것 참 다행이군! 먹을 건 많으니 부담 없이 즐기게!”
이어서 나온 다른 음식들도 하나 빠짐없이 입에 맞았다.
애초에 희멀건한 곡물죽만 아니면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니까.
“남쪽에서 온 사람이다 보니 북방인 음식은 입에 잘 안 맞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러면 자주 놀러 와도 괜찮겠군?”
“…네? 뭐… 그렇죠.”
뭔가 미심쩍은 탈리스의 말이었지만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는 터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필요하시면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전하.”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게.”
“예.”
대충 음식을 다 내어 오자 조찬을 준비해 주던 시종들이 일제히 빠져나갔다.
연회장에 남은 건 우리 넷뿐이었다.
뭔가 중요한 얘길 하려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어제 우리 유르와 투린에게 재밌는 걸 가르쳐 줬다더군?”
“아.”
빵을 한 조각 집으려던 손을 멈추곤 유르와 투린을 흘긋 쳐다봤다.
“…옛날 책에서 본 게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두 분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살짝 나서 봤는데. 도움이 됐을진 모르겠군요.”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다뇨! 백작님은 제 은인이세요!”
“…크흠.”
적당히 돌려 말하려 했던 건데, 투린이 대뜸 목소릴 높였다.
덕분에 스프를 퍼먹다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자! 아버지! 보세요!”
파르륵!
투린이 식사용 나이프를 손에 쥐자 그 주위로 어제 봤던 푸른 안개가 일렁였다.
벌써 어느 정도 다룰 법을 깨우친 듯했다.
‘이래서 혈통빨이 사기라니까.’
“오오! 대단하구나! 아들아!”
“그리고 어제 누나는 드래곤으로 변했다구요!”
“으음… 그건 들었다만…….”
탈리스는 매번 사근사근한 유르가 블루 드래곤이 되었단 게 잘 믿기지 않는 듯했다.
“흠흠.”
이를 눈치챈 유르가 작게 헛기침을 하곤 왼손을 걷어붙였다.
…콰드득!
유르의 가냘픈 왼팔이 거대한 드래곤의 앞발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글자글한 용의 비늘, 거기에 매섭게 솟은 발톱이 돋아날 때쯤 유르가 팔을 훌훌 털었다.
그러자 자라나던 유르의 팔이 다시금 사그라들며 평범한 왼손으로 변했다.
‘벌써 부분 변이까지 한다고?’
유르의 경지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부분 변이는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오오! 유르! 하하핫! 역시 대단해! 내 딸답구나!”
“흐흠. 그런가요?”
유르는 기분 좋은 듯 어깰 으쓱했다. 의자가 들썩이는 걸 보니 꼬리도 요리조리 움직이는 듯했다.
“이게 다 임페라 백작님 덕분이에요.”
“그러니까요!”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후후!”
탈리스는 우리 셋을 보며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임페라 백작.”
“네. 전하.”
“어젠 정신이 없어 못 했던 대답.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렇군요.”
앞으로 프란츠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에 대한 물음.
일단은 이글렌 여왕이 내민 질문이었다곤 했지만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소설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걷게 된 탈리스였으니까.
“…그 전에.”
“네?”
이 노인네가 김빠지게 뜸을 들였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부탁이요?”
이 대목에서 부탁이라.
보통 이럴 땐 들어주기 어려운 질문이던데.
“…말씀하시죠.”
과연 무슨 부탁을 할까.
긴장되는 순간이라 그런지 목이 탔다.
일단 물 한 모금부터…….
“내 딸. 유르는 어떤가?”
“…콜록!”
탈리스의 뜬금없는 발언에 기침을 토했다.
“왜 그런가. 설마 내 딸이 별로 맘에 안 드나?”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입가에 흘린 물을 훔쳐 내곤 유르를 흘긋 쳐다봤다.
“아, 아버지! 그게 무슨…….”
유르도 처음 듣는 말이었는지 얼굴이 발그레진 채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어제 있던 일이 떠올랐다.
드래곤의 모습에서 자기도 모르게 변이가 풀렸었던 그때.
겨우 잊어 낸 기억이었지만 탈리스 덕에 다시 선명해졌다.
“…하지만 전 이미 이글렌 여왕님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건 아실 텐데요.”
“허허. 내 아무리 늙었어도 그걸 모르진 않지. 하지만 백작쯤 되는 이라면 꼭 한 사람만을 바라보란 법은 없지 않나?”
“아니, 그건…….”
탈리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왕국 연합법상 귀족부터는 서로 마음만 맞으면 여러 번 혼인이 가능했으니까.
피스트 왕국에선 귀족 부인 홀로 남자 여럿을 끌고 다니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엔 남편 여럿에 부인도 여럿인 대환장 파티도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거야 어느 정도 급이 맞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얘기고.
아이소테르의 여왕과 프란츠의 공주를 부인으로 둔 백작이라니.
기둥서방도 이런 기둥서방이 없다.
“…하하하! 농담일세. 내 워낙 탐이 나다 보니 말이야.”
“…그런 농담은 자제해 주십쇼.”
“흐흐. 그래.”
탈리스는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였다.
“아무튼.”
탈리스는 웃음을 멈추곤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의 질문에 답해 줄 차례군.”
“…….”
이 노인네가 또 장난을 칠 수 있기에 조용히 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과연 그가 어떤 선택을 할까.
연합의 유지?
아니면 연합을 탈퇴하곤 독자노선을 걸으려나?
그것도 아니면 다시 마음을 바꿔 프로스트 랜드를 따라 라크레시아의 밑에 들어갈까?
“…나 프란츠의 국왕은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네.”
“…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소테르와 함께하겠다고.”
“…네?”
조금은 애매한 답변이었다.
연합과 함께한다는 게 아니라 아이소테르와 함께한다?
“물론 정확히는 아이소테르의 임페라 백작과 함께 하겠다는 걸세.”
“…아.”
그제야 탈리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연합을 탈퇴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들을 믿진 않을 거다.
뭐가 됐건 저들의 이익만을 따지는 놈들이니까.
그러니 연합에 속한 아이소테르, 그중에서도 이안 임페라 라는 이름의 백작.
날 믿겠다는 소리였다.
내가 만약 라크레시아를 치겠다하면 날 돕고, 연합을 탈퇴하겠다 해도 날 돕겠다.
그게 탈리스의 의지였다.
“…감사합니다.”
“후후. 감사하면 내 부탁도 잘 생각해 보게나.”
“그건…….”
“자, 장난 그만하세요! 백작님이 곤란해하지잖아요!”
“허허! 그래. 알겠다. 알겠어.”
탈리스는 유르의 핀잔에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곤 더 이상 장난치지 않았다.
‘화목하구만.’
이게 가족이지.
간만에 보는 화기애애한 가족 분위기 속에 조찬은 마무리됐다.
* * *
[…그렇군요.]
“예. 여왕님.”
프란츠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됐다.
탈리스도 정신을 차렸고, 당분간은 그가 연합을 탈퇴할 일은 없을 거다.
난 탈리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이글렌에게 전했다.
‘탈리스는 이안 임페라 백작과 함께하겠다.’
여왕인 이글렌 입장에선 조금 언짢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에런골드가 행했던 그간의 만행을 알았기에, 이만하면 충분한 듯했다.
[다행이네요. 잘 끝나서.]
“그러게 말입니다.”
통신용 마법구 너머로 이글렌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바로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로 향하려 했지만 이글렌은 지금 소테라에 없었다.
여왕은 바쁜 몸이다.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국외 순방이 한창이었다.
‘이건 얼굴도 보이네.’
이글렌이 준 통신용 마법구.
소테라의 마탑에서 제작한 마법구라 상당히 비쌌다.
비싼만큼 성능은 또 하는지 끊김 하나 없이 얼굴까지 마법구에 투영되고 있었다.
‘이런 건 하나에 얼마쯤 하려나.’
[그리고 또 별일은 없었어요?]
별일이라.
많은 일들이 있긴 했다.
투린의 용혈 랭크도 뚫어 주고 유르는 드래곤 폼을 다룰 줄 알게 되고.
또…….
“…별 일 없었습니다.”
[진짜요? 얼굴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어떻게 안건지 이글렌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날 노려봤다.
이게 여자의 감이라는 건가.
[…그래요. 그럼. 없었다면 없는 거겠죠.]
“흠흠.”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일정이 빠듯해서 그런지 더 대화할 시간은 없는 듯했다.
“네, 여왕님. 무탈하시길.”
[흠… 고마워요, 이안.]
뭔가 미심쩍어 하는 이글렌의 말을 끝으로 마법구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휴.”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도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백작님?”
서재에 홀로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임페라 백작 저택을 도맡아 관리하는 일레느였다.
“그래. 일레느. 무슨 일이지?”
“저번에 백작님을 섬기기로 했다던 기사님 있잖아요? 그분이 다시 찾아오시긴 했는데…….”
‘양반은 못 될 놈이군.’
일레느가 말하고 있는 건 아마 디아일 거다.
그리고 지금처럼 뜸을 들이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있나?”
“으음…. 며칠 못 씻은 건지 엄~청 지저분해진데다가… 웬 여성분을 데리고 오셨던데요?”
“호오.”
“아시는 분인가요? 이슬린 언니처럼 머리가 새하얗던데. 그리고 엄청 이쁘더라구요.”
일레느는 디아와 함께 온 여잘 보고 충격이라도 먹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후후. 다친 데는 없고?”
“네. 두 분 다요.”
“다행이군. 지금 어디 있지?”
“그게…….”
일레느는 문 뒤를 흘긋 쳐다봤다. 둘 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곧장 쫓아온 듯했다.
“들어와라.”
“…임페라 백작!”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 뒤로 자그맣게 한 남자의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듯 새어 나왔다.
“임페라 백작! …님.”
요 며칠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지 거지꼴을 한 채 등장한 두 남녀.
둘의 등장에 퀴퀴한 냄새가 서재에 진동했다.
디아 제니스와 타르옌 오베이라.
이 소설의 주인공과 메인 히로인이 처참한 몰골로 내 앞에 나타났다.
물론 둘 다 날 향해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난 그런 둘을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