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8화 (128/222)

128화

“…….”

투린이 입고 있던 겉옷을 걸쳐 입은 유르.

“흠흠.”

어색한 공기를 쫓아내려 헛기침을 해 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새하얬던 유르의 두 뺨은 여전히 불그스름한 채였다.

“투, 투린도 용이 될 수 있나요?”

유르는 괜한 질문을 던졌다.

아직 방금 전 대참사의 잔상이 머리에 그대로 남아 있긴 했지만 애써 무시하곤 대답했다.

“네. 투린 왕자님도 공주님처럼 똑 같은 하프 드래곤이니까요.”

“저, 정말요?”

“오오…….”

유르와 투린은 신난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유르가 걸쳐 입은 겉옷 너머로 꼬리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유르 공주님은 마법 랭크 6인 덕에 금방 이성을 되찾긴 하셨지만… 투린 왕자님은 그게 아니죠.”

“으음…….”

부산스레 움직이던 유르의 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가능한 걸까요?”

투린은 겉으론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누나인 유르를 향한 열등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심성 자체가 나쁜 놈은 아닌 터라 겉으론 내색하진 않지만,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자신은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나 무투왕 탈리스에 털끝만큼도 못 미치는 실패작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투린 왕자님은 왕자님만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걸 발굴해 내야죠.”

“하지만… 전 랭크 1의 반푼이인 걸요.”

“투린…….”

유르가 잔뜩 풀 죽은 투린의 등을 토닥였다.

아까 도발하려고 반푼이라 하긴 했는데. 그걸 못내 신경 쓰고 있는 듯 했다.

난 그런 둘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두 분께선 프레이야 님 말고 다른 드래곤을 보신 적 있습니까?‘

“으음… 아뇨.”

“저도 없어요.”

“그렇군요.”

예상했듯이 둘은 프레이야 말곤 드래곤과의 접점이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들은 무리 지어 살지도 않고, 블루 드래곤인 프레이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륙 남쪽에 산다.

사실상 저 둘이 갓난아기에 불과했을 때 프레이야가 죽었으니.

제대로 된 드래곤을 본 경험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전승이 제대로 안 됐지.’

랭크 시스템.

그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너무 복잡하니 잠시 넘어가고.

비유하자면 랭크 시스템은 흙이다.

이 흙에 검술, 마법, 대장장이 랭크 같은 씨앗을 심어 발현시키는 거다.

어떤 흙엔 검술이 잘 자라나고, 또 어떤 흙엔 마법이 잘 자라난다.

그게 바로 개개인이 가진 재능.

지금 투린의 문제는 그거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와 무투왕 탈리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

흙의 질은 두말할 것 없이 양질의 흙일 거다.

덕분에 유르가 고작 스무 살 남짓한 나이로 마법 랭크 6을 가진 거고.

그렇다면 투린은?

‘씨앗을 잘못 심은 거지.’

질 좋은 흙이지만 평범한 흙이 자라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땅.

그게 투린의 몸이다.

“혹시 용혈(溶血)에 대해 들어보였습니까?”

“용…혈? 드래곤의 피 말씀이신가요?”

“뭐 단어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만. 살짝 다르죠.”

유르와 투린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먹겠다는 듯 고갤 갸웃했다.

솔직히 나도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다.

용혈(溶血) 랭크.

하찮은 필멸자들은 사용조차 할 수 없는 드래곤들만의 고유 랭크.

투린은 아마 오러를 사용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거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오러 따윈 쓸 필요도 없는 개사기 랭크가 있으니까.

문제는 그걸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프레이야도 알이 돼 버렸고, 다른 드래곤들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수가 워낙 귀한게 드래곤이다.

드래곤에게 용혈이란 랭크가 있는 줄 인간들이 알 턱이 없었다.

투린에게 용혈 랭크의 재능이 있으면 뭐하나.

알려줄 사람도 없고 그게 뭔지조차 모르는데.

‘나도 그게 뭔지는 안다만…….’

용혈 랭크는 소설에서도 짤막하게 소개되긴 한다.

짤막하게 소개된 이 용혈 랭크는 드래곤만이 느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 했다.

‘그게 문제지.’

난 드래곤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망나니 떨거지였던 인간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냥 인간이었고.

텍스트로 몇 줄 읽은 게 전부다 보니 투린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난 눈살을 찌푸린 채 소설 속 설정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디 아프신가요?”

“아, 괜찮습니다.”

유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까 날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뛰던 거대한 드래곤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부분이긴 했지만 첫편부터 최신편까지 정주행만 수없이 했던 나다.

간신히 떠올리려 애쓴 결과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용혈 랭크란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힘이다. 다른 랭크들과는 비교 자체가 민망할 수준. 드래곤의 기원을 생각해 보면 왜 용혈 랭크만이 이토록 강한지 이해가 갔다.

…는 용혈의 힘을 일깨우려 애썼다. 배 속 깊은 곳부터 끓어넘치는 힘. 그녀는 마침내 용혈을 깨우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별 거 없네.’

몇 줄 안 나오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확실한 단서 하나는 얻었다.

배 속 깊은 곳부터 끓어 넘치는 힘.

이는 내가 고대인의 영약을 통해 얻은 단전의 힘과 비슷했다.

‘그럼…….’

단전 여는 것처럼 하면 되려나?

“투린 왕자님, 그리고 유르 공주님.”

“네.”

둘은 한 몸인양 대답했다.

“어쩌면 투린 왕자님은 용혈 랭크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흐음…….”

난생처음 듣는 랭크에 둘은 뭔 말인지 가늠도 안 가는 듯했다.

“그게 뭐죠?”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랭크죠.”

“그런 게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요.”

“그렇겠죠. 지금껏 드래곤과 만나 보신 적이 없으셨을 테니.”

“아.”

뭔갈 깨달은 듯하던 투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쩌면 그도 랭크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유르는 살짝 걱정되는 듯 물었다.

“죄송하지만… 임페라 백작은 그걸 어떻게 알죠?”

“책에서 봤습니다. 아주 오래된 책.”

“으음…….”

대충 얼버무린 대답이었지만 유르는 고대인의 책이라도 읽은 거라 생각했는지 말을 아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용혈 랭크를 배우나요?”

투린은 벌써부터 용혈을 배울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지금부터 그걸 말씀 드릴 생각입니다만…….”

난 투린과 유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왕자님, 그리고 공주님.”

“네. 말씀하세요.”

“지금부터 절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네?”

남의 단전을 강제로 여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랭크 시스템으로 단단히 틀어막힌 걸 넘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몸.

어쩌면 고생만 잔뜩하고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용혈 랭크를 얻을 수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네! 믿을게요!”

투린은 일말의 지체도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간 랭크도 못 쓰는 반푼이로 살아왔던 세월.

거기다 유르의 드래곤 폼마저 보여 준 덕에 한 번 믿어 볼 만하다 생각하는 듯했다.

“…네.”

유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수술 전 보호자 동의는 끝났고.

이제 수술 들어갈 시간이다.

“왕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난 투린의 뱃가죽 위에 손을 얹었다.

탄탄하고 군살 한 점 없는 단련된 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따로 단련은 하지 않았을 거다. 드래곤의 피가 섞인 탓에 숨만 쉬어도 웬만한 기사보다 강인한 육체를 자랑할 테니까.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윽……?”

난생처음 겪어 보는 희한한 감촉에 투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를 본 유르가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내 잠자코 기다렸다.

우우웅…….

체내의 마나가 모여 단단한 오러로 재구성됐다.

날카로운 오러의 기운은 내 손바닥을 따라 투린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음…….”

확실히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 오러를 타고 느껴졌다.

단전이랄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몸.

그와 비슷하면서도 사뭇 나른 감촉이다.

단전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 옛적에 메말라 버린 느낌이랄까?

난 오러를 최대한 얇고, 날카롭게 뽑아내 메말라 버린 단전을 긁어 내기 시작했다.

“…….”

투린의 뱃가죽을 타고 옅은 떨림이 전해졌다.

슬쩍 녀석의 상태를 살펴보니 눈을 꼭 감은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붉은 피.

자신을 지켜보는 유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껏 내가 봐 온 왕자와 공주 간에 사이랑은 완전 딴판인 녀석들이다.

‘그렇다면.’

이 눈물겨운 가족애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줘야겠지.

쿠구구……!

투린의 뱃가죽 너머로 파고 든 오러.

이는 계속해서 메마른 단전의 중심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투린의 떨림은 점차 강해졌다.

“투린…….”

유르는 그런 투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조금만 더……!’

방금까진 나도 긴가민가했다.

인간의 단전을 뚫는 것처럼 한다고 용혈을 각성할 거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메마른 땅 너머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어마어마한 힘을 머금은 둑이 자리 잡고 있다 는걸.

“으윽……!”

투린도 한계가 왔는지 더 이상 못 참고 침음을 흘렸다.

앙다문 입술이 찢어져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으으윽……!”

마지막 한 줌의 힘을 쥐어 짜내 오러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왈칵!

“커헉!”

투린의 목구멍을 타고 진득한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붉은 핏덩이는 그대로 차가운 빙옥의 바닥을 적셨다.

“투린!”

“으윽…….”

한 바탕 핏물을 게워 낸 투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임페라 백작!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유르는 눈물을 글썽인 채로 날 쏘아붙였다.

하지만 난 그녀와는 반대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네?”

유르의 걱정과는 달리.

쓰러진 투린이 힘겹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말 그대로 용솟음치는 힘.

투린의 몸 주위론 푸른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게워낸 핏덩이가 증발해 만들어진 짙푸른 연기가 투린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이게 뭐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진정한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힘.

용혈.

“투린!”

“누, 누나…….”

유르는 정신을 차린 유르를 꼭 안아 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안이 벙벙한 투린.

난 그런 그에게 용린검을 건넸다.

“한 번 휘둘러 보시죠. 최대한 힘껏.”

“어엇…….”

투린은 어색하게 용린검을 붙잡았다.

그러자 용린검에 새겨진 비늘 문양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그극!

용린검 주위로 휘몰아치는 짙푸른 연기.

투린은 이내 어떻게 힘을 사용해야 할지 아는 듯 검을 똑바로 붙잡았다.

그리곤 차디찬 빙옥의 한 구석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앗!

그러자 아이스 브레스마냥 거대한 힘의 파동이 용린검을 타고 터져 나왔다.

투린의 검의 힘이 닿은 땅은 그대로 갈라졌다 얼어붙으며 흉측한 상처가 새겨졌다.

“오오……!”

“와! 투린! 너가 한 거야?”

“그, 그런가 봐?!”

뛸듯이 기뻐하는 유르와 투린.

그런 둘을 보며 나도 속으로 안심했다.

‘이게 되네.’

사실 될 거란 보장은 없었기에 살짝 쫄리긴 했다.

“감사합니다! 임페라 백작님!”

“허허. 감사하다뇨. 전 그저 왕자님의 잠자고 있던 힘을 깨워 드린 것뿐입니다.”

“흐흐! 아니에요! 백작님이 없었으면 평생 못 했을걸요!”

“후후.”

프란츠의 왕자란 사람이 꼬박꼬박 고맙다며 고갤 꾸벅이다니.

외교적으로 문제될 만한 일이지만 뭐 어떤가.

빙옥이라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래서. 용혈 랭크는 몇입니까?”

“아! 그걸 확인 안 해 봤네요.”

투린은 허겁지겁 자신의 왼손을 펼쳐 룬 문양을 확인했다.

“…잉?”

“왜 그럽니까?”

“…용혈 랭크가… 6이라는데요?”

“…응?”

시작부터 랭크 6?

소설에서 본 터라 용혈 랭크에 재능이 있는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와! 대단해 투린! 역시 내 동생이야!”

“헤헤! 그런가?”

“…….”

시작하자마자 랭크 6인 사기캐를 보며 지난날 피똥 싼 나날들이 씁쓸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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