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뭐…라고?]
젊은 시절 탈리스를 닮아 윤기나는 검고 긴 생머리를 가졌던 유르.
그런 그녀의 머릿결이 점차 푸르게 물들고, 새하얬던 피부엔 자글자글한 용의 비늘이 뒤덮여 갔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외형.
아직 완전한 드래곤의 형태를 갖추진 않았지만 위압감 하나만큼은 상당했다.
이게 바로 대륙 최강의 종족, 드래곤.
작정하고 도발을 한 거긴 했지만 그녀의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허리춤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흐흐… 화 나셨나요?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시나. 투린 왕자님이 변변찮은 랭크를 가진 건 사실인데.”
[…이 자식이!]
유르는 분노로 가득 차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어느새 그녀의 이빨은 드래곤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변해 있었다.
“누, 누나!”
[넌 가만히 있어!]
다급히 투린이 이를 말리려 했지만 유르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동생이 이런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이토록 분노하다니.
가족애가 대단한 여자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지금처럼 반쪽이 용이 아닌, 제대로된 용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건 백신 같은 거다.
그녀가 분노를 스스로 주체할 줄 모르는 채 계속 시간이 지나 버린다면, 언젠간 소설에서 일어난 것처럼 대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푸른 재앙 유르와 투린.
대전쟁 이후 프란츠의 왕족은 유르와 투린, 그리고 탈리스가 전부다.
하프 드래곤 둘을 북방인들이 떠받들곤 있지만 인간적인 감정 교류조차 전무한 프란츠.
결국 이들이 의지 할 곳은 서로밖에 없다.
때문에 소설에서도 탈리스가 연합을 탈퇴하고 라크레시아의 편에 섰을 때 유르와 투린은 잠자코 아버지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둘에게 있어 의지할 곳이라곤 아버지 말곤 없었으니까.
게다가 프레이야를 다시 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에 둘은 잠자코 탈리스를 따라 라크레시아의 편에 선다.
그에 보답하듯 프레이야는 되살아난다.
라크레시아는 예정했다는 듯 프레이야를 그의 권속으로 삼는다.
그때까지도 이 순진한 반쪽이 용 둘은 좋아라 했다.
비록 라크레시아에게 지배 받는 상태이긴 해도 죽은 어머니와 다시 재회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크레시아는 애틋한 부모 자식간에 상봉을 원한 게 아니다.
온 대륙의 파멸을 원할 뿐.
그 결과.
탈리스는 되살아난 프레이야의 손에 죽는다.
‘그때가 첫 변이였지.’
이 반쪽이 용 둘은 그 시점까지 단 한 번도 완전한 용의 형태로 변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둘에게 프레이야의 손에 죽는 탈리스의 모습은. 어마어마한 분노와 원한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최초로 온전한 드래곤의 형태를 갖춘 유르와 투린.
이미 둘에게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드래곤의 힘은 앳된 둘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힘이었다. 정신도 온전치 못했고.
둘은 북부 대륙을 지도상에서 삭제시키곤 연합과 주인공 일행의 손에 죽고 만다.
이를 막기 위해선 두가지 방법이 있다.
둘이 온전한 드래곤으로 변이하기 전에 죽여 화근을 없애든가.
아니면 미리 드래곤 폼을 제어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든가.
소설의 줄거리가 크게 틀어진 이상 언제 어떻게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다만 라크레시아 그놈이라면, 분명 유르와 투린을 자극시키려 들 터.
이 둘이 녀석의 자극을 버텨 낼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당장 그 말 취소해!]
“취소? 취소 한다고 사실이 변하진 않습니다만.”
[…언제까지 나불대나 한 번 보자고!]
우우웅!
유르의 입에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미 드래곤의 브레스가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건 확인했다.
방금 랭크 1에 불과한 투린이 보여 준 것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유르는 거기다 더해 마법 랭크까지 준수한 실력자였다.
이건 막는 걸론 안 된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아이스 스피어.”
자그맣게 주문을 외며 스킬을 시전했다.
목표는 유르가 아닌 내 발바닥이었다.
파캉!
날카롭게 솟아난 얼음 창 여러 개가 신발 밑창을 뚫고 튀어나왔다.
덕분에 차디찬 빙옥에서도 멀쩡히 걷게 된 난, 재빨리 옆을 향해 크게 뛰었다.
콰아아앗!
유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아이스 브레스는 내가 서 있던 자릴 그대로 집어삼켰다.
곧이어 스킬 하날 더 시전했다.
“익스플로전.”
마법 랭크 5부터 사용 가능한 강력한 폭발 마법.
이것도 역시 유르를 노린 공격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반은 용이니까 이런 걸론 안 다치겠지.’
손에서 튀어나온 검붉은 구체는 그대로 투린에게 향했다.
유르의 분노에 발을 동동 구르느라 정신없던 투린.
갑자기 자기한테 공격이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그대로 구체가 녀석에게 적중했다.
…퍼엉!
“으악!”
동시에 검은 연기가 투린의 몸을 감쌌다.
일부러 폭발의 위력보단 연기가 많이 나도록 조절해 쏜 마법이었다.
왜냐?
그래야 유르가 더 눈깔이 뒤집힐 테니까.
[…투린!]
검은 연기에 뒤덮혀 어두컴컴해진 빙옥.
마핵등이 빛을 발하고 있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투린! 어디 있어!]
“읍…….”
투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 내가 투린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화들짝 놀란 투린이 발버둥 쳤지만 간신히 힘으로 누를 수 있었다.
랭크가 1인데도 힘만 놓고 보면 프리아나한테 뒤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확실히 혈통빨이 사기라니까.
랭크도 씹어 먹는다니.
엄밀히 따지면 투린의 랭크가 1인 건 아니니까 좀 다르게 봐야 하나?
아무튼 일단은 유르의 분노를 이끌어 내는 게 먼저다.
난 투린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검지 손가락을 내 입에 가져다 댔다.
그제야 투린도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발버둥을 멈췄다.
‘대체 무슨……?’
유르가 엿들을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투린에게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왕자님.”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까. 지금은 제 장단에 맞춰 주십쇼.”
“대체 왜…….”
“유르 공주님을 위해섭니다.”
“…….”
투린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고갤 끄덕였다.
남들한테 싸가지 없게 굴긴 해도 다 사정이 있는 놈이다.
애초에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전쟁으로 죽고, 아버진 대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낙인 찍혔는데, 애가 제대로 정상적으로 크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거다.
그래도 자신의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따뜻한 녀석이었다.
‘우선…….’
난 품 안에 챙겨 온 유리 병 하날 꺼내 들었다.
그걸로 대충 준비를 끝마치곤 검은 연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투린!]
어느새 연기가 가라앉고 동생을 애타게 찾는 유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미 전신이 용의 비늘로 덮여 있고, 두 눈까지 영롱한 빛을 띤 드래곤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막타만 치면 될 뿐.
…푸욱!
투린을 내 무릎에 눕힌 채로 검을 찔러 넣었다.
“…커, 커허어억……?”
조금은 기괴한 비명 소릴 내는 투린.
왼쪽 가슴팍을 꿰뚫린 투린은 그대로 부들부들 떨다 추욱 늘어졌다.
…왈칵!
검에 찔린 투린의 가슴팍에서 붉은 피가 울컥였다.
조금은 달큰한 냄새가 나는 피였다.
[투, 투린……?]
느닷없이 나타난 이안 임페라라는 외지인.
그가 빙옥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그녀의 아버질 살려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외지인을 덜컥 믿어 버린 대가.
하나뿐인 동생, 투린의 죽음.
유르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투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
‘먹혔나?’
분노가 한계를 넘어서면 초연해진다고 하지 않나.
지금 유르의 상태가 그거였다.
이내 차갑게 식었던 유르의 낯빛이 사납게 구겨지고,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투…린……!]
“오오…….”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 난 살짝 흥분됐다.
인간의 형태를 띤 그녀의 머린 사나운 드래곤의 형태로 자라났다.
거대해지는 몸집과 날카롭게 돋아나는 손톱과 발톱.
아마 내 오러 소드랑 부딪혀도 유르의 손톱이 더 강할 거다.
그런 녀석 둘이 한순간에 나타난다면?
이성조차 잃어 모든 걸 파괴시키는 대재앙.
어찌 보면 던전화보다 무서운 놈들이다.
나 같은 건 한 무더길 가져다 놔도 간식거리조차 안 될 개사기 종족.
드래곤이란 그런 존재니까.
하프 드래곤의 드래곤 폼.
프레이야만큼 거대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나 같은 건 한 손에 으깨 버릴 만큼 거대했다.
프레이야는 성체 드래곤이니까 컸던 거고.
유르는 스무 살 언저리로 드래곤으로 치면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나이다.
인간, 그것도 무투왕 탈리스의 피를 이어 받은 덕에 어린 나이에도 이런 빠른 성장이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
[…살아 있단 걸 후회하게 해 주마……!]
“아차.”
그녀의 드래곤 폼에 감탄하느라 깜빡했다.
유르가 생애 첫 드래곤 폼을 할 정도로 화가 난 건 다름 아닌 나 때문이란 걸.
“자, 잠시만……!”
[닥쳐라!]
유르의 거대한 발톱이 내게 달려들었다.
토옥!
투린의 몸뚱이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흘러내리던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달큰한 향을 풍기는 이 핏방울은 그대로 쩍 벌린 유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다.
[…윽?]
동생의 피가 입 안에 들어갔다.
그것만으로 상당히 슬픈 일이겠지만, 투린의 피를 맛 본 유르는 발톱을 멈춰 세웠다.
[이게… 무슨……?]
핥짝.
난 투린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를 살짝 찍어 핥았다.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게 혀가 오그라들 것 같은 맛이다.
찐득찐득한 게 물에 타 먹으면 맛있을 듯했다.
“레드핀 시럽입니다.”
[레드… 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없는 유르가 고갤 갸웃했다.
“자자. 이제 일어나세요. 왕자님.”
“…휴! 이제 된 건가요?”
가슴팍이 꿰뚫린 채 피를 뿜어 대던 투린이 움직였다.
[투린!]
“미안해 누나. 이분이 꼭 해야 하는 게 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난 유르에게 정중히 고갤 숙여 사과했다.
비록 연극이었다곤 하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죽는 꼴을 보여 줬으니까.
“우와… 누나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투린은 완전한 드래곤의 모습을 띈 유르를 보고 신기한 듯 우러러봤다.
방금까지 살기로 가득 찼던 유르의 눈동자가 동생의 모습에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으음…….]
그리곤 자기도 신기한 듯 제 몸 구석구석을 훑어봤다.
[이, 이거… 어떻게 풀지?]
유르는 블루 드래곤의 모습을 한 채로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그녀의 발치엔 아까까지 입고 있던 두툼한 천옷이 보였다.
“…지금 풀면 여러모로 껄끄러워질 테니 일단 참아 주십쇼.”
[으음… 그래요.]
그제야 벌거벗은 드래곤의 몸뚱이가 신경 쓰이는지 흉악한 발톱을 공손하게 모아 가렸다.
그래봤자 커다란 도마뱀이 꿈틀거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이지만.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설명부터 해 주시죠.]
유르는 분노가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내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 공주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터라 유르에게 이런 연극을 벌인 이유를 설명했다.
블루 드래곤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부터.
만약 둘이 탈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라크레시아의 계략에 빠져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때문에 그 전에 유르가 드래곤 폼을 다스리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는 이유까지.
이유를 잠자코 다 들은 유르는 내게 향해 있던 흉악한 살기를 거뒀다.
‘빙옥에서 이 난리를 쳐서 다행이구만.’
아마 알현실이나 넓은 공터였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유르와 투린을 도발하는 말부터 드래곤 폼으로 여기저기 작살이 났을 테니까.
[그런 건 미리 말…….]
“미리 말 했으면 이렇게 화 내지 않으셨겠죠.”
[…….]
유르는 멋쩍은 듯 고갤 홱! 하고 돌렸다.
후웅!
“으윽.”
여전히 거대한 드래곤 형태라 고갤 돌린 것만으로 빙옥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근데…….”
이를 지켜보던 투린이 작게 투덜거렸다.
“왜 난 누나처럼 못 하는 걸까요.”
투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랭크 6인 유르에 비해 투린은 모든 랭크 1이라는 괴랄한 랭크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다른데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여기저기 찍어 먹어 본 결과였다.
하지만 난 안다.
투린은 단 한 가지 길에 한해선 유르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걸.
[투린….]
유르가 착잡한 눈빛으로 투린을 내려다봤다.
그런 그녀의 거대한 몸집은 마음이 진정됐는지 점차 작아졌다.
[임페라 백작. 혹시…….]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유르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거대한 발톱이었다면 손이 아작 났을 테지만, 이미 변신은 다 풀린 상태였다.
“제 동생. 투린도 도와주실수 있나요?”
“어… 음… 그게…….”
유르는 간절한 표정을 지은…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백작님? 왜 자꾸 눈을 피하시는…….”
“…….”
하지만 난 그녀의 눈을 비하려 고갤 돌리기 바빴다.
방금 변신을 막 끝난 유르는 약혼자가 있는 입장에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상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