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6화 (126/222)

126화

“예?”

프란츠의 왕자와 공주.

하프 드래곤 유르와 투린.

둘을 만나게 해달란 내 말에 남자는 고갤 갸웃했다.

“혹시 아이소테르에서 따로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예전부터 한 번씩 뵙고 싶었거든요. 대륙에 두 분밖에 안 계신 용의 자제분들을 말이죠.”

“으음… 그런 거라면…….”

다소 불쾌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유르와 투린은 프란츠의 왕족이다.

그런 둘을 동물원 짐승 대하듯 한 번 구경하고 싶다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재상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화합의 섬에서 탈리스를 도왔던 일 덕에 내겐 호의적인 듯했다.

“마침 잘 됐군요. 두 분께서도 따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했던지라. 그럼 시간은 언제쯤으로 생각 중이신가요? 간단한 식사라도 마치신 후에…….”

“아뇨. 가능한 빨리 만나 뵙고 싶군요.”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해 보면 가능한 뱃속을 비우는 게 좋을 거다.

“혹시 빙옥(氷獄)에서 두 분을 뵈어도 될까요?”

“…빙옥 말씀이십니까? 왜 그런 곳에서…….”

“실은 용의 자제분들만이 쓸 수 있다는 마법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알현실에서 그런 걸 보여 주셨다간 여러모로 위험 할 듯싶어서.”

“호오. 마법에도 조예가 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남자는 날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대전제 우승자이면서 마법에 관심까지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가능할까요?”

“으음… 그런 거라면야. 대신…….”

“물론 두 분의 귀하신 몸은 털 끝 하나 다칠 일 없을 겁니다.”

“…네. 그럼 말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고갤 한 번 꾸벅 숙이곤 내 말을 전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 그리고 지금 마차에 저와 같이 온 녀석이 쉬고 있을 겁니다. 먼저 방으로 가 쉬도록 해 주십쇼.”

“예입.”

자잘한 부탁에도 남자는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

그건 그렇고.

왕자와 공주를 이렇게 함부로 만나게 해 준다는 게 신기했다.

어떻게 부탁해야 할지 나름 머릴 굴려 봤는데, 딱히 자잘한 검문 없이 둘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다니.

“쯧.”

나로썬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유르와 투린, 두 하프 드래곤이 안쓰럽기도 했다.

이는 프란츠 사람들의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 탓이 컸다.

유르와 투린은 인간이 아니다.

프레이야의 피가 섞인 하프 드래곤.

사실상 북방인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때문에 북방인들은 이들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반인반신.

이들을 섬기는 한편, 같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도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호위 기사도 없고, 인간적인 감정 교류도 없다.

그저 북방인들의 마스코트마냥 떠받들기만 할 뿐.

이들의 의식 저편엔 근본적으로 유르와 투린을 꺼리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찮은 필멸자인 그들에게 있어서 하프 드래곤은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하프 드래곤.

의지할 곳이라곤 탈리스와 유르와 투린 서로 둘뿐.

그러다 카잔 라크레시아에 의해 일이 터지고 만다.

북부 대륙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대재앙이.

‘그건 막아야지.’

말이 북부 대륙이지.

깔끔하게 자로 잰 듯 북부 대륙만 날려 먹진 않는다.

프란츠와 국경선을 맞댄 아이소테르도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어찌됐건 나도 나름 아이소테르의 여왕 약혼자기에 일어나서 좋을 건 없는 대재앙이다.

그렇게 한동안 복도를 서성이자 프란츠의 시종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임페라 백작님?”

“맞습니다만.”

“왕자님과 공주님께서 시간을 내어주신답니다. 지금 바로 빙옥으로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음. 좋죠.”

시종의 안내를 따라 빙옥으로 향했다.

빙옥(氷獄).

이름은 무슨 무시무시한 얼음 감옥 같았지만, 감옥보단 연무장에 가깝다.

탈리스와 프레이야를 위해 지어진 특별 연무장.

이는 프란츠의 내성 땅속 깊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하아.”

시종을 따라 빙옥이 가까워질수록 하얀 입김이 선명해져 갔다.

슬슬 뒷목이 서늘해질 때 즈음.

시종은 두터운 털모피 외투를 건넸다.

“으음. 마침 추웠는데. 고맙군요.”

“별말씀을.”

자기 것도 하나 챙겼는지 한 벌을 따로 입자 북슬북슬한 털뭉치 두 덩어리가 된 느낌이었다.

털뭉치 둘은 그렇게 내성의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일행분은 먼저 내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아, 그랬군요.”

이슬린을 따로 챙겨 달라 했던 것도 까먹지 않고 잘 해 줬나 보다.

그럼 난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추운 주변 온도 탓에 목구멍이 시립기만 했다.

“여깁니다.”

지하 계단을 타고 쭉 내려가자 반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대문이 나타났다.

커다란 성벽에 달려 있어도 될 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탈리스와 프레이야만 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건지 웬만한 힘으론 꿈쩍도 안 할 것 같았다.

“오우…….”

그 크기에 압도된 사이, 시종은 대문에 난 자그마한 쪽문을 열었다.

철컥.

“아.”

프란츠 시종은 이런 대문도 막 여나? 생각했던 터라 괜히 민망했다.

“두 분께선 안에 계십니다.”

“…저 혼자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예.”

시종은 고갤 한 번 꾸벅이곤 얼른 내려왔던 계단을 타고 되돌아갔다.

그래도 명색에 자기들이 섬기는 왕족인데도 시종은 두려운 듯 얼른 도망치기 바빴다.

‘뭐 이해는 된다만.’

“들어오세요.”

낯익은 목소리가 쪽문 너머로 들려왔다.

아까 탈리스의 회복실에서 들은 누나 하프 드래곤.

유르의 목소리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그극……!

워낙 추운 날씨 탓에 반쯤 얼은 쪽문이 기괴한 소릴 내며 열렸다.

쿠드득!

“윽.”

어찌나 추운지 쪽문을 부여잡은 왼손 살갗이 얼어붙어 떨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검지 손가락 쪽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방울진 핏방울은 그대로 빙옥의 바닥에 떨어졌다.

…탱!

핏방울은 떨어지기도 전에 차갑게 얼어 붉은 유리구슬마냥 얼음 바닥을 통통 튀었다.

“어머!”

이를 본 유르는 얼른 내게 달려와 다친 손을 부여잡았다.

이내 유르의 손이 밝게 빛났다.

파아앗!

그러자 뜯겨져 나갔던 살갗에 금세 새 살이 돋아났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치료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요.”

소설에서 본 것과 같이 심성이 고운 유르였다.

이런 녀석의 손에 북부 대륙이 지도에서 삭제된다니.

“…….”

그런 유르의 뒤로 한 살 어린 남동생.

투린이 빙옥 한가운데서 눈사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건 아니었다.

갉갉갉…….

투린이 손톱으로 빙옥의 얼음 바닥을 긁어 내 눈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러 소드로 베어 내야 겨우 생채기 낼 정도로 꽁꽁 언 얼음.

투린은 그걸 맨손으로 긁어 내고 있었다.

“후후. 오랜만에 빙옥에 왔더니 옛날 생각이 나나 봐요.”

“…그렇군요.”

난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빙옥을 둘러봤다.

감옥은 아니지만 솔직히 외관만 보면 이보다 혹독한 모습의 감옥은 없을 것 같다.

천장엔 날카로운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추운 날씨 탓에 촛불은 켜지긴커녕 양초 통째로 꽁꽁 얼어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마핵등을 켜 놓지 않았으면 어두컴컴했을 거다.

프레이야의 북방 설원 레어를 연상시키는 흉악한 풍경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여기 온 건.”

“음….”

프레이야가 죽고 탈리스가 노쇠해진 이후론 자연스레 발길이 뜸해진 장소다.

이따금 유르와 투린이 놀이터로 쓰이긴 했지만 그 둘마저도 머리가 큰 이후론 잘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데.

프란츠의 왕족들 말곤 여기 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시종이란 녀석도 손님 안내만 덜렁 하고 도망치듯 올라가 버렸으니까.

아마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한참은 지나야 알아차릴 거다.

호위 기사도 없고, 시종도 없고.

빙옥에 있는거라곤 나랑 유르와 투린.

이렇게 셋뿐.

‘그럼… 해도 되겠지.’

“화합의 섬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들었어요. 임페라 백작.”

“…많은 일들이 있었죠.”

“덕분에 아버지께서 몸 성히 돌아오실 수 있었단 것도요.”

“전하께서 스스로 이겨 내신 것뿐입니다.”

“후후, 겸손하시군요.”

유르는 싱긋 웃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임페라 백작.”

“허허.”

뒤늦게 눈사람을 만지작거리던 투린도 내게 와 말했다.

아직 열댓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둘.

하지만 사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둘 모두 대전쟁 이전에 태어난 이들이니까.

하프 드래곤인 탓에 나이를 조금 느리게 먹는 탓이었다.

“그건 그렇고. 따로 저희 둘한테 궁금한 게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걸 보고 싶은 건가요?”

스읍!

투린은 대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곤 방금까지 눈사람을 만들고 놀던 자릴 향해 입김을 내뿜었다.

…쩌어억!

그러자 푸른 냉기가 뿜어져 나와 눈사람을 덮쳤다.

반질반질했던 얼음 바닥엔 어느새 거대한 얼음덩이가 솟구쳐 올라왔다.

“오.”

아이스 브레스.

블루 드래곤만이 쓸 수 있다는 고유의 마법.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별다른 마나 소모도 없이 저만한 위력을 내는 건 아이스 브레스가 유일했다.

“보여 줬으니까 됐죠?”

투린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어깰 으쓱했다.

“야! 너 지금 손님한테 그게 무슨……!”

이를 본 유르가 나무랐지만 괜찮다.

투린이 싸가지 없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요. 귀중한 시간까지 내주셔서 그런 아름다운 마법까지 보여 주셨는데.”

“…네?”

“흠흠.”

적당히 구색 꾸민 말로 칭찬하자 투린이 약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아마 바지에 가려진 꼬릴 보면 신나서 파닥거리고 있을 거다.

싸가지 없는 놈이긴 하지만 그만큼 단순한 녀석이다.

적당히 추켜세워 주기만 하면 좋아라 하는 놈이니까.

“역시 마법에 관해선 블루 드래곤님의 자제분들답게 뛰어나시군요.”

“으음… 그렇긴 하죠.”

유르도 칭찬이 싫진 않은 듯 눈썹을 으쓱했다.

뭐든 혈통빨이 사기긴 사기다.

다른 놈들은 랭크 올려 보겠다고 마탑이니 마법 학교니 별걸 다 가는데, 이 둘은 별다른 교육 없이 스스로 랭크를 이만큼이나 올렸다.

“실례지만 혹시 랭크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랭크요?”

“네.”

소설 속 인간형 생명체는 모두 랭크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드래곤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땐 몰라도, 인간으로 폴리모프 하거나, 유르와 투린처럼 하프 드래곤인 경우에도 왼손에 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랭크를 물어보자 기세등등했던 투린이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녀석의 반응이 왜 그런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전 마법에 관심이 많아서요. 마법 랭크는 6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이토록 젊으신 분이 마법 랭크 6이라니. 과연 용의 자제분들이십니다.”

“…….”

“투린 왕자님께서는……?”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요?”

투린은 날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게 녀석의 콤플렉스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마법 랭크보단 다른데 관심이 많으셨나 보군요. 탈리스 님처럼 무투 랭크, 아니면 검술 랭크……?”

“…….”

“그것도 아니면 사역 랭크……?”

“임페라 백작.”

“네. 유르 공주님.”

계속된 질문에 유르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껏 살갑게 대해 온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빛이 매서웠다.

“전 어머니를 닮아 인간들과 달리 오감이 뛰어나답니다.”

“그렇군요.”

“거기엔 청력도 포함되죠.”

“오호.”

“그럼 임페라 백작. 이 청력이 뛰어나면 뭐가 안 좋은 줄 아시나요?”

“흠. 잘 모르겠네요.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유르는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떴다.

다시금 뜬 그녀의 눈동자는 사람의 동공이 아니었다.

드래곤만이 가진 흉측하게 세로로 찢어진 동공.

그걸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 왔다.

“인간은 말을 할 때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항상 감정이 묻어납니다. 때문에 그들의 말을 잘 듣고 있으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건지 금세 파악되죠. 제가 그걸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군요.”

“지금 당신의 목소린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조롱.”

“…….”

“…이제 그만 놀리시고. 이 추운 빙옥까지 온 이유를 말씀하세요.”

유르는 매서운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괜히 깝쳤나?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대재앙을 막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이 둘을 머리끝까지 화나게 만들어야 하니까.

“진짜 궁금해서 온 겁니다. 프레이야와 탈리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 랭크 1의 반푼이라는 게 사실인지 말이죠.”

자신의 동생을 모욕하는 발언.

이를 들은 유르의 하얀 피부 위로 푸른 용의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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