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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5화 (125/222)

125화

“으윽…….”

눈보라로 가득한 설산.

그 한가운데서 탈리스는 홀로 눈을 떴다.

“여긴…….”

탈리스는 금세 이게 현실이 아니란걸 눈치챘다.

굳은살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할 그의 손.

하지만 지금 그의 손은 탱글탱글한 젊은이의 것이었다.

늙긴 했어도 총명함은 그대로였기에 그는 조심스레 기억을 되집었다.

그의 분노로 시작된 대전쟁.

이를 막기 위해 참아 왔던 지난날.

그 결과는 길러 왔던 가신들의 배신이었다.

‘그래. 난 분명…….’

뭔가에 당한 건지 몰라도 가슴속 깊이 끓어오르는 원한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덕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여기다.

그렇다는 건…….

‘꿈인가.’

꿈 속의 그는 설산을 홀로 걷고 있었다.

그의 손엔 무투왕이란 칭호에 걸맞은 아티팩트.

에고 웨폰 어스 브레이커가 끼워져 있었다.

[드디어 가는 거야? 블루 드래곤을 잡으러?]

“후후! 그렇소!.”

꿈이 으레 그렇듯, 탈리스는 절로 대사가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프레이야와의 첫 만남 같았다.

그렇게 눈발을 헤쳐 나가자 새하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그녀의 얼음처럼 투명한 비늘 너머론 푸른 빛이 반짝였다.

영롱한 빛에 잠깐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였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당신과 겨뤄 보고 싶소!”

이미 무투왕의 칭호를 얻은 무투 랭크 8의 강자 탈리스.

그런 그도 넘지 못하는 벽이 하나 있었으니.

랭크 9.

당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통곡의 벽은 탈리스에게도 무리였다.

그렇다면 지금껏 그래 왔듯이 또 다른 강자와 싸워 깨달음을 얻으면 그만이다.

때문에 온 대륙의 드래곤들은 랭크 8의 괴물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

“…응?”

젊은 탈리스의 외침에도 프레이야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추욱 늘어진 채로 가쁜 숨만 내쉴 뿐이었다.

“…설마?”

탈리스는 어스 브레이커는 잠시 내려 놓고, 프레이야에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뒤늦게 프레이야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선약자가 다녀간 듯, 그녀의 뱃가죽 부분에 깊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네놈도… 날 처치하러 온 건가……?]

기까스로 정신을 차린 프레이야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깊은 상처였지만 그녀의 매섭게 째진 동공에선 살의가 가득했다.

‘다치긴 했어도 살아 있는 걸 보니…….’

아마 프레이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은 이미 황천길로 떠난 듯했다.

“다쳤군.”

[흥. 그래 봤자 네놈들 같은 필멸자쯤은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탈리스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고 있으시오.”

[뭣……?]

프레이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탈리스는 자릴 떠났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뭔갈 짊어지고 왔다.

북방 설원에서 블루 드래곤 다음 가는 강력한 몬스터.

얼음 트롤의 사체였다.

“일단 허기라도 채우면서 회복에 전념하시오!”

[…….]

“미안하지만 주먹밖에 모르는지라 회복 마법 같은 건 모르오. 대신 배라도 차면 힘이 좀 나지 않겠소?”

[…푸흐흐!]

프레이야는 탈리스의 배려에 실소를 터뜨렸다.

“왜 웃는 거요? 혹시 날 짐승은 못 먹는 거요?”

“[그건 아니다만… 익혀 먹으면 더 좋겠지.]

“으음! 그렇군! 그럼!”

탈리스는 어스 브레이커를 낀 채로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거대한 화마가 솟아나 얼음 트롤의 고기를 단숨에 바싹 익혔다.

[아얏! 그거 하지 말라 그랬지!]

“하하! 미안하오. 블루 드래곤께서 익혀 드시고 싶다시는데. 어쩔 수 없지 않소?”

[흥.]

“자! 드시오. 프레이야. 얼른 원기를 회복해야 나와 겨뤄 보지 않겠소?”

[…….]

프레이야는 잠시 말 없이 탈리스를 쳐다봤다.

그리곤 한번 피식 웃곤 얼음 트롤의 고기를 한입에 삼켰다.

[재밌는 놈이 찾아왔군.]

지금껏 프레이야와 정정당당히 겨뤄 본 이는 별로 없었다.

다들 죽음이 두려운지 무수히 많은 수하들을 이끌곤 그녀를 몰아 세우기 바빴다.

며칠 전 찾아온 그 기사 녀석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그러했다.

다들 프레이야를 쓰려뜨렸다는 칭호와 그녀의 사체를 노린 이들이었다.

때문에 치명상을 입은 오늘, 탈리스를 만났을땐 죽음을 예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탈리스는 달랐다.

순수한 결투광.

프레이야는 그런 그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 그랬었지…….’

늙은 탈리스는 옛 생각에 그리움의 눈물이 고였다.

[…왜 울지?]

“으음? 어째서 눈물이……? 나도 모르겠소.”

젊은 탈리스는 갑자기 고인 눈물에 고갤 갸웃했다.

'내가 그때 눈물을 흘렸었나?‘

늙은 탈리스는 옛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이 났던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파아앗……!

긴가민가한 기억의 잔상을 좇던 탈리스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 * *

“…아.”

“저, 정신이 드십니까?”

“전하!”

“아버지!”

던전화의 후유증을 한 몸으로 받았던 탈리스.

그 뒤로 며칠 동안 정신도 못 차렸던 그가 드디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셨군요.”

“…그래.”

탈리스의 곁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의 사랑스런 두 자녀.

오랜 세월 그를 보필해 온 재상.

탈리스를 살리겠다며 모여든 수많은 북방의 마법사들.

거기에 금발을 찰랑이는 한 남자도 있었다.

“자네는…….”

“이안 임페라 백작입니다.”

“…후후.”

탈리스는 모든걸 초연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의 눈가엔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쁜 꿈을 꾸기라도 한겁니까.”

“…아닐세. 오히려 좋은 꿈이었지.”

탈리스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이를 본 재상이 그를 말렸다.

“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괜찮네. 간만에 좋은 꿈을 꾸었더니 기분이 상쾌해져서 말이야. 게다가 보아하니 자네들이 몇 날 며칠간 기력을 불어 넣어준 듯한데. 이젠 일어나야 체면이 좀 살지 않겠나.”

“전하…….”

재상은 탈리스의 말에 감격이라도 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북방인이라고 다 배신자는 아니다.

강한 이를 섬긴다는 북방인의 습성.

이는 지금의 탈리스를 향해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무투 랭크 8.

무투왕 탈리스.

이보다 강한 이가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보다 임페라 백작. 자네가 여기 있다는건…….”

“네. 긴히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섭니다.”

“…그렇군.”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그였지만, 할 건 해야 했다.

나단 공작을 필두로 한 북방인들이 배신을 때린 건 물론이고, 카잔 라크레시아도 나타났다.

무투왕이란 칭호의 주인으로서 한가롭게 누워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모두 나가 주게. 아이소테르에서 온 이 손님만은 빼고.”

“…예. 전하.”

탈리스의 말에 재상을 비롯한 이들 모두가 자릴 비웠다.

“혹여나 무슨 이상함이라도 느껴지신다면…….”

“후후. 알겠네. 알겠어.”

“그럼…….”

그들을 뒤따라 프레이야와 탈리스 사이에서 나온 아이 둘.

하프 드래곤 둘도 날 흘끗 한 번 쳐다보곤 자릴 비웠다.

딱히 눈빛에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달까.

저들의 하나 남은 부모가 던전이 될 뻔한 걸 막아 줬으니.

“자. 이제 말해 보게. 아이소테르의 대변인이여.”

탈리스는 모두가 자릴 비우자 힘겹게 내게 물었다.

하지만 오히려 묻고 싶은 건 나였다.

“이글렌 여왕님께선 프란츠가 가진 생각에 대해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으음…….”

탈리스는 침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게 연합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난리를 피운 게 그다.

‘프레이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놈들!’

급박한 상황에 할 수 없이 튀어나온 말이긴 했지만, 상당히 결례가 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날 그도 깨달았을거다.

이제 더 이상 참기만 한다고 해결될 건 없다는 걸.

프로스크 랜드가 지금처럼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낸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다음 문제다.

프로스트 랜드를 언제, 어떻게 칠지. 그리고 그 자리에 연합은 함께 할 건지.

다시금 기력을 되찾은 프란츠는 프레이야를 되살리기 위해 어디까지 칼날을 돌릴지.

앞으로 탈리스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오늘 난 그걸 확인하러 온 거고.

“난…….”

“…….”

탈리스의 대답을 듣기 위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확답을 주기 어렵겠군.”

“…그러시겠죠.”

“먼 길까지 수고해 줬는데 이런 대답을 들려줘서 미안하군. 오늘은 좀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길 해 보는 게 어떤가?”

내일이라.

뭐 탈리스가 깨어나 있을지도 몰랐던지라 하루 만에 끝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 내일이 되도 그의 확답은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글렌 여왕님께서 한 가지 전할 말씀이 있다셨습니다.”

“으음… 여왕께서 말이지.”

솔직히 탈리스는 아이소테르에 그닥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껏 왕은 이글렌이 아닌 에런골드 2세였으니까.

사실 프레이야를 되살리려던 탈리스의 노력에 가장 큰 훼방을 놓은 것도 에런골드다.

언젠간 대륙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을 가졌던 남자니까.

연합의 수장들은 에런골드의 시커먼 속은 꿈에도 모른 채, 무투왕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며 좋아라 했고.

“한 번 말해 보게. 에런골드의 따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날 선 그의 말에 난 어깰 으쓱했다.

“죄송하다 전해 달라시더군요.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하고 싶다고.”

“…….”

탈리스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한 번 피식하고 웃었다.

“푸흐흐! 그게 사실인가?”

“그럼요.”

그간 에런골드에게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쉽사리 믿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기억은 하고 있을 거다.

프로스트 랜드의 배신에 가장 먼저 나선건 다름 아닌 아이소테르의 전 기사단장.

이글렌의 명령을 받은 빈트하겐 칼로스였단 걸.

“…내 아이소테르의 여왕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그럼요. 좋으신 분입니다. 전왕이나 그 전전왕보다는.”

“…그렇군.”

탈리스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갤 끄덕였다.

“여왕님껜 전해 주게. 사과는 잘 받겠다고.”

“예입.”

“그럼. 오늘은 일단 쉬어야겠군. 재상에게 말하면 프란츠에서 제일 좋은 침대를 내어줄 것이야.”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다행히 탈리스의 분노는 어느정도 사그라든 듯했다.

난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갤 숙이곤 회복실을 빠져나왔다.

“뭐라십니까? 전하께서?”

밖으로 나오자 재상이 허겁지겁 달려와 내게 물었다.

“나한테 잠자릴 마련해 주면 된다더군.”

“으음… 그렇군요. 귀인께서 피곤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군.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예. 말씀하시지요.”

술이나 고기라도 한 상 바라는 줄 아는지 재상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그것도 좋긴 해도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거다.

먹을 게 아닌 사람.

정확히는 반만 사람인 친구 둘.

"왕자님과 공주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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