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아아악!”
까마득한 낭떨어지로 추락하기 시작한 디아.
그간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개중엔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던 남자, 이안 임페라 백작과의 대화도 떠올맀다.
‘날 섬기면 네놈이 가진 비밀을 알려 주겠다.’
디아가 블랭크란 사실에도 배척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인간.
사실 놀라지 않고 그 이상의 뭔갈 아는 것처럼 구는 건 그가 유일했다.
때문에 믿었다.
디아가 평생을 궁금해 오며 살아온 진실을 그 남자가 진짜로 알려 줄 것만 같았다.
그 대가가 이거다.
천길 낭떠러지로 처박는 추락사.
지금껏 숱한 부상에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히 치유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웃기지 말라고!”
이따위 개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그대로 디아의 몸뚱이가 슬라임 마냥 짜부라지기 직전.
찰나의 순간 디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부상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목숨만은……!
그는 처박히고 있는 지면을 살폈다.
검은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숲.
개중에 높다랗게 자란 나무 하나가 보였다.
디아는 곧장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르륵!
“으윽!”
나뭇가지에 손이 찢겨져 나갔다.
덕분에 손아귀가 아작이 났지만 속도를 줄일 순 있었다.
이대로 처박으면 아프긴 하겠지만 죽진 않을…….
‘…않겠지?’
왼쪽 어깨가 탈골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그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처박히려던 그 순간.
바아앙!
“으악!”
디아의 주위로 바람이 강하게 일었다.
…콰앙!
그를 공중에 뜨게 만들 정도로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대가린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주륵!
그 덕에 코피가 줄줄 흐르긴 했지만 죽진 않았다.
“어윽…….”
“괜찮아?”
“…응?”
느닷없이 나타난 누군가의 마법에 의해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디아는 줄줄 터져 나오는 코를 부여잡은 채 고갤 들었다.
“누구……?”
깜깜이 숲의 어둠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긴 은발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디아한테도 익숙한 얼굴이었고.
“타, 타르옌?”
“…이 짜식이. 타르옌 ‘님’이라 부르라 했지?”
“아니… 님이고 자시고… 여긴 어떻게…….”
“그, 그야 지나가다가 본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해? 나 덕분에 죽을 뻔한 걸 살았는데?”
“으음… 그건 고맙네.”
타르옌은 디아의 말에 의기양양한 듯 고갤 쳐들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지금껏 동년배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디아의 주먹 한 방에 그녀의 커리어는 한 방에 박살 났다.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가문이라 불리던 베로니아 가문.
그런 그녀가 전쟁고아 출신한테 박살이 났다.
가문의 힘을 이용한다면 이런 뒷배도 없는 놈 묻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타르옌의 자존심은 치유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떻게든 디아를 이겨 보려고 지금처럼 뒤꽁무닐 쫓아다니고 있었다.
“어때. 이만하면 정식 결투 한 번 받아 줄 법 하지 않아?”
“…그땐 너무 급해서 그런 거라니까…….”
“급하고 자시고 뭐가 중요해! 빨리 한판 붙어 보자니까?”
“으으… 그냥 내가 진 걸로 하면 안 되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런데 얘 좀 봐? 너 왜 아까부터 반말이야?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아니 한 살 차이 가지고 뭘 그리 따지나…….”
“뭐?”
“…요.”
부욱부욱.
타르옌의 날 선 눈빛은 별안간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에 사그라들었다.
“그, 근데 여긴 어디지…요?”
“여기? 그야 크라니그 산맥에 있는…….”
타르옌은 말하다가 아차 싶었다.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가문엔 비밀이긴 했지만, 자신의 집사한테는 언질했었다.
괜히 타르옌이 사라진 걸 들켰다간 집사만 된통 혼날 테니까.
때문에 집사에겐 적당히 둘러대라 하고 디아의 뒤꽁무닐 쫓고 있던 것이다.
그때 집사한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타르옌 님. 무슨 일이 있어도 크라니그 산맥의 깜깜이 숲엔 들어가선 안 됩니다.’
‘왜? 내가 그런 시골짝 숲에서 죽기라도 할까 봐?’
마법엔 재능이 있던지라 웬만한 마물쯤은 타르옌에겐 상대도 안 됐다.
하지만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물과 일대일로 싸운다면 타르옌 님을 이길 녀석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게 마물의 소굴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놈들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든 가리지 않습니다. 사냥감이 제 풀에 지쳐 죽기 직전까지 기다리는 놈들도 허다하죠.’
‘흥. 그래 봤자 마물이지.’
당시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막상 깜깜이 숲에 던져지니 겁이 덜컥 났다.
아무리 그래 봐야 타르옌은 곱디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에 불과했으니까.
“…하압!”
타르옌은 불안감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주위로 거대한 화염 마법.
파이어 월을 펼쳤다.
화르륵!
순식간에 거대한 화마가 주변 숲을 불태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은 사그라들고.
주변은 다시금 어둠이 자리 잡았다.
“어떡하지…요?”
“이, 이 누님만 믿으라구!”
타르옌의 당찬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건 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 둘을 주위로 어두운 숲속 누런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 * *
“타르옌이 왜 여기 있냐.”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 맞을 거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벌써부터 주인공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가?
“네? 누가 있나요?”
“흠… 그럼 계획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내 말에 이스바르트와 콜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괜찮아. 겸사겸사 저 녀석도 키우면 그만이니까.”
“으음…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콜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갤 끄덕였다.
“대신 난이도를 좀 올려야겠어. 저 녀석도 꽤나 강한 축에 속하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 시점쯤이면 타르옌도 마법 랭크 5의 꽤나 강한 축에 속할 거다.
고작해야 스무 살 언저리인 녀석이 벌써부터 랭크 5라는 건 크나큰 메리트다.
잘 키우기만 하면 쓸 만한 인재가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나중 가선 디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니, 주인공 녀석만 잘 꼬드기면 알아서 넘어올 거다.
거기에 겸사겸사 베로니아 가문까지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후후.”
“그럼, 말씀하셨던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저 남자애는 괜찮지만 여자애는 죽으면 안 되니 조심하라구.”
말 그대로 디아는 죽어도 괜찮을 거다.
아마 죽이는 게 더 힘들 테니까.
하지만 타르옌이 죽기라도 했다간 골치 아파진다.
그런 이유에서 한 발언이었지만 둘은 비유라 생각한 건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예입.”
“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뿐만 아니라 히로인까지 성장시킬 무대의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둘이 죽지만 않고 잘 살아 나오길 바라는 것뿐.
“저쪽은 이제 됐고.”
이제 다른 걸 준비할 때다.
“이스바르트, 받아라.”
“어엇……!”
이스바르트한테 통신용 마법구 하날 던졌다.
마법구는 녀석의 손에서 통통 튀다 가까스로 바닥에 떨어지진 않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구.”
“네! 백작님!”
난 그렇게 둘을 맡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 참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구만.”
* * *
곧장 항한 곳은 북부의 왕국.
프란츠.
북방의 왕국답게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온몸을 덮쳤다.
거기에 한창 겨울일 시간이다 보니 추위는 더욱 강했다.
“흠.”
하얀 눈이 내려앉은 높다란 성벽.
평소였다면 포근하게 내려앉은 흰 눈에 마음만큼은 녹아내릴 것 같았을 테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리 포근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끼이익…….
성문 앞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이 마차를 세웠다.
그런 그들의 눈빛에선 경계심이 가득했다.
아이소테르와 이어진 남서쪽에 위치한 대문.
왕국 연합과 이어진 터라 지금껏 간단한 검문만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통행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래.”
이글렌에게서 받아 온 통행증을 건네자 경비병들은 이를 유심히 훑어봤다.
“이안 임페라 백작님. 맞으십니까?”
“그래. 프란츠의 국왕 전하의 용태를 살피러 왔다.”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통행증을 다시 건내곤 대문 앞에 선 이들에게 손짓했다.
“통과!”
쿠구구구……!
그제야 육중한 대문이 요란한 소릴 내며 움직였다.
지금껏 야간을 제외하곤 활짝 열려 있던 대문.
이는 프란츠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려는 듯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난리도 아니군.”
“그러게요.”
이슬린은 내 투정을 짧게 받아 줬다.
남문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거다.
프로스트 랜드와 이어진 동문은 굳게 닫힌 걸 모자라 증축까지 한다고 나섰으니.
쿠르르……!
“어서 움직여!”
“네, 네엣!”
아니나 다를까 프란츠 성문 너머에선 성벽 재료를 나르기 바빴다.
사실상 한 국가나 다름없었기에 성벽도 부실했던 것이다.
이제 명실상부한 적국으로 돌아섰으니 예전 같은 평온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아, 그래.”
마차 창밖으로 프란츠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외관에 별 신경 쓰지 않은 듯 외성 안에 위치한 내성.
높다란 성벽도 거추장스런 건물 양식도 없었다.
그저 눈에 띄는거라곤 성 중앙에 위치한 블루 드래곤의 조각뿐.
푸르스름한 게, 얼음을 깎아 만든 듯했다.
워낙에 추운 곳이다 보니 웬만한 돌보다 얼음이 단단했다.
소설에선 왕국을 세운 기념으로 탈리스가 직접 빙하를 깨부숴 만들었다던데.
프레이야도 없고 프로스트 랜드마저 배신한 지금.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의 조각상은 쓸쓸하게만 보였다.
나와 이슬린을 태운 마차는 프란츠의 내성까지 별다른 제지 없이 들어설 수 있었다.
이따금 마차를 흘긋거리는 경비병들이 있긴 했지만, 따로 귀찮은 검문은 없었다.
아마 탈리스의 던전화를 막아 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끼익.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서자, 두툼한 차림새에 턱수염이 북슬북슬한 남자가 마차 앞에 섰다.
프란츠에서 마중 나온 이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소테르의 귀인이시여.”
“반가워요.”
허례허식을 추함으로 여기는 북방인들답게 거창한 환영식 같은 건 없었다.
오늘 난 이 자리에 탈리스를 보러 온 거다.
나로썬 귀찮을 일 없으니 오히려 좋았다.
“차에서 쉬고 있으라구.”
“네. 백작님.”
이슬린은 고갤 꾸벅 숙이곤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나름 내장 히터도 있으니 차가 더 편할 거다.
이슬린은 그렇게 쉬라 하곤 난 마중 나온 녀석과 함께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남자는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날 백작님 덕에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좀처럼 예전 같은 온전한 기운을 되찾진 못하십니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하시니…….”
“흠.”
던전화 도중에 다행히 막긴 했지만, 던전화는 온몸이 분열되고 던전으로 재구성되는 끔찍한 과정을 동반한다.
아마 무투왕 탈리스가 아니었다면 던전화를 막았다 하더라도 살아남긴 어려웠을 거다.
‘무투 랭크 8이나 되는 남자니 살아남은 거지.’
“괜찮을 겁니다. 강하신 분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부디 같이 계신 공주님과 왕자님이 힘이 되어 주길 바라야겠지요.”
“그러게요.”
그렇게 남자를 따라 걷길 수 분.
난 마침내 탈리스의 치료가 한창인 회복실에 도착했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탈리스.
그의 주위론 프란츠의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회복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상처를 치료하진 못했다.
“전하!”
“흑흑…….”
그런 탈리스의 옆에선 그와 프레이야 사이에서 나온 두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둘의 머리엔 새끼 손가락만한 뿔 두개가 쫑긋 솟아 있었다.
“…….”
두 아이들의 눈물에도 탈리스는 힘겨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소테르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아…….”
남자의 소개가 있자 그제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두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고작해야 열댓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둘.
“죄송합니다……. 손님께 그만 못 볼 꼴을 보여 드렸군요…….”
“아닙니다. 심란하실 텐데 찾아온 제 쪽이 사과 드려야겠지요.”
“…감사합니다.”
둘 중 한 살 터울인 누나 쪽이 내게 사과했다.
아직 채 슬픔이 가시지도 않은 둘을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프란츠뿐만 아니라 프로스트 랜드를 통째로 지도 상에서 지울 최악의 재앙.
하프 드래곤 유르와 투린.
둘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떠올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