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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3화 (123/222)

123화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디아의 대답.

“…하겠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바였다.

평생을 궁금해 오던 진실인데 알고 싶겠지.

하지만 단박에 알려 줄 순 없다.

녀석을 이용해 먹겠다는 건 아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미친 대마법사의 장난질로 태어났단 걸 알면 충격이 클 테니까.

소설에서도 극후반부에서나 알게 된 진실이다.

‘덕분에 심적으로 꽤나 고생했지.’

그때야 뭐 ‘지금껏 살아온 인생까지 가짜는 아니야!’ 하면서 소년 만화스런 전개로 극복했다지만, 아직 디아는 경험도 부족하고 너무 어리다.

그렇다면?

‘일단 경험부터 쌓아 줘야겠지.’

“좋아. 그럼 해야 할 게 있겠지?”

“…예, 임페라 백작님.”

디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갤 숙였다.

가신이 새로운 주군을 섬길 때마다 치루는 의식.

녀석도 나름 제니스 기사 학교를 졸업한지라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 이름은 디아 제니스. 오늘부터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후후.”

녀석 입장에선 그리 유쾌한 만남은 아닐 거다.

평생을 숨기며 살아온 본인의 비밀을 들키고 만 거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좋다.

첫 만남이 나쁠수록 조금만 잘해도 호감 가는게 사람 마음이니까.

‘원래 좋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 하면서.

“자. 네 물건이니 돌려주마.”

난 녀석에게 빼앗았던 건틀렛을 건넸다.

“…….”

탁!

꽁한 얼굴로 건틀렛을 바라보던 녀석은 낚아채듯 건틀렛을 받아 들었다.

지금 녀석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꼬장이었다.

난 그런 녀석을 향해 피식 웃곤 서재의 문고리를 돌렸다.

바앙.

그러자 옅은 진동음과 함께 서재에 걸려 있던 결계가 해제됐다.

슬쩍 디아를 살펴보니 어느새 건틀렛을 왼손에 낀 채였다.

“일레느!”

“네! 백작님!”

결계를 푼 채 일레느를 부르자 녀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녀석과 디아가 눈이 마주쳤다.

일레느가 살짝 고갤 까딱이자 디아는 멋쩍은 듯 눈을 돌렸다.

평생을 여자랑은 연 없이 살아서 그런가?

하긴 철들기도 전에 기사 학교에 입양되다시피 들어갔으니.

“오늘부터 이 저택에서 지낼 녀석이다.”

“아! 그렇군요! 잘 부탁 드려요!”

“…네.”

“우선은… 씻을 물과 새 옷을 내어주도록. 밤새 잠도 못 잤을 테니 푹 쉴 곳도 마련해 주고.”

“네! 백작님!”

“…감사합니다.”

일레느는 왔을 때처럼 다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디아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뭐해? 따라가지 않고.”

“아앗… 네!”

“이것저것 물어보면 잘 알려 줄 거다. 오후엔 바쁠 테니 적당히 물어보고 쉬라구.”

디아는 일레느의 뒤를 따라가다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리곤 냅다 고갤 숙였다.

하고 싶진 않지만 해야만 하는 녀석의 심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크흐흐… 그래, 감사해야지.”

그간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했으니 많이 피곤할 거다.

그런 녀석한테 손님 대접까지 해 줬으니 고맙긴 하겠지.

“자, 그럼.”

디아가 쉬는 동안 잠시 짬이 생겼다.

그리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니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경험치 제로에 검술밖에 모르는 주인공 녀석을 만렙 사기캐로 만들 준비를.

*

“여긴…….”

짧은 휴식이 끝나고 난 디아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옛날 생각이 풀풀 나는 곳이다.

“크라니그 산맥이다. 내 영지 한가운데에 떡하니 처박힌 녀석이지.”

옛 임페라 백작령과 베네르 백작령을 구분 짓던 산맥.

지금에서야 하나로 통합돼 내 이름 아래 관리되고 있긴 했지만 이 산맥 덕분에 여러모로 귀찮은 일도 많았다.

때문에 이스바르트가 자이언트 웜으로 터널을 뚫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1년은 더 걸릴 일이다.

‘그건 그렇고.’

크라니그 산맥의 중턱.

거기엔 임페라 백작령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이 위치해 있었다.

“이만하면 딱이군.”

“…….”

디아는 조용히 내 눈치를 살폈다.

적당히 쉬라곤 했지만 아마 한숨도 못 잤을 거다.

녀석이 봤을 때 지금 난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니란 걸 알게 될 거다.

“여긴 무슨 이유로 데리고 오신 겁니까?”

“그야 간단하지.”

스릉!

난 허리춤의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뽑아라.”

이를 본 녀석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뭐? 내가 왜?”

“…예?”

뜬금없는 말에 되묻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뭣하러 날 섬기겠단 녀석을 죽이겠나?”

“그야… 아시다시피 전… ‘그거’잖습니까.”

그거라. 그게 뭔지 본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푸흐흐.”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했다.

지금껏 어떤 대접을 받아오며 살았길래 이토록 경계심이 많은 건지.

친절히 설명 해 주는 건 그닥 내 스타일이 아니다만, 필요할 땐 해 줘야겠지.

“오늘 새벽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네. 백작님을 섬기면 제가 가진 비밀을 알려 주시겠다고…….”

“그래. 그랬지.”

사실 넌 오베론이 만든 인조인간이란다.

게다가 원본은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카잔 제국의 황태자 녀석이지. 라고 말하면 아마 멘탈이 바스러질 거다.

심한 경우엔 삶의 의지가 꺾일 수도 있는 진실.

이는 만들어진 블랭크에겐 치명적이다.

때문에 녀석에게 이 사실을 한 방에 알려 줄 순 없었다.

녀석이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아주 조금씩 녀석에게 알려 줄 생각이다.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임무만 완수한다면. 네놈이 가진 첫 번째 비밀을 알려 주도록 하지.”

“…….”

그 말에 디아의 눈빛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후후.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스릉!

디아는 의지를 내보이려는 듯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지급하는 평범한 철검.

난 녀석의 철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주인공이 사기긴 해.’

제니스 기사 학교에 전문적인 대장장이는 없다.

주로 외주로 주문을 맡기고 대량의 평범한 철검을 받아 오는 방식이다.

수많은 철검이 기사 생도 육성 과정에서 낡고 부러진다.

하지만 디아의 검만은 그가 처음 지급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는다.

주인공 본인은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지.’

최종 빌런과의 혈투에서까지 사용되는 개사기 아티팩트.

이 소설 설정 상 상위 랭크를 상대할 수도 있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조건.

내가 가진 마검과는 비교조차 민망한 주인공 버프 듬뿍 머금은 아티팩트.

에고 소드. ‘황혼(黃昏)’.

어쩌다 황혼이 제니스 기사 학교로 흘러 들어간 건지는 나중에 나오긴 한다.

아주 극악의 확률로 기사 학교에 스며든 검은 그대로 주인공 손에 들어간다.

겉모습은 다른 평범한 철검처럼 의태한 채로.

난 계속해서 디아가 아닌 녀석의 검 황혼을 노려봤다.

우웅…….

에고 소드는 스스로 자아를 가진 녀석이다.

계속 노려보니 녀석은 괜히 찔리는 듯 옅은 진동음을 냈다.

“…응?”

순간 디아가 뭔가 기시감을 느끼긴 했지만 황혼은 가만히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그건 그렇고.’

난 주인공 녀석을 향해 자셀 잡았다.

솔직히 한 번 붙어 보고 싶긴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과연 어떤 검무를 펼칠지 궁금했다.

“내 가신으로 들어왔으니 몸이나 한 번 풀어 보자구.”

“진심이십니까?”

“크흐흐! 지금 대전제 우승자를 상대로 걱정이라도 해 주는 건가?”

“…그럴 리가요. 워낙 귀하신 몸이시다 보니.”

녀석은 꽤나 자신만만한 듯 내 걱정까지 해 주고 나섰다.

공식적으로 내 검술 랭크는 5.

같은 검술 랭크 5인 나이디스를 이기다 보니 나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먼저 들어와라.”

“…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의 몸뚱이가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하단을 깊게 파고드는 일격.

소설에서 숱하게 봐 온 터라 이 공격이 의미하는 게 뭔지 잘 알았다.

카앙!

가볍게 첫 합을 막아 내자마자 녀석의 손목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꾸드득!

하단에 이어 들어오는 삼연격.

손목과 온몸의 회전을 이용한 매서운 공격이었다.

몰랐다면 당황했겠지만, 소설에서 숱하게 나온 패턴이었다.

카카캉!

“…으윽?”

녀석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 내자 디아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회전이 큰만큼 공격 이후엔 헛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격이었으니까.

순간 녀석의 몸통이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난 공격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다시 자셀 잡은 디아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이게 단가?”

“아뇨!”

카앙!

다시 한번 강하게 내려찍는 검.

미안하지만 이번엔 내 차례다.

녀석의 검을 맞받아친 채로 강하게 위로 올려쳤다.

“크윽……!”

이대론 밀리겠다 싶었는지 녀석은 그대로 도약해 힘을 상쇄시켰다.

이대로 무사히 착지만 하면 다시 기회가 오겠지만, 전투는 그렇게 여유로운 게 못 됐다.

콰드득!

별안간 지면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공중에 뜬 이상 녀석은 맞추기 좋은 과녁일 뿐이었다.

이는 그대로 녀석의 하복부를 강타했다.

퍼어억!

“커헉……!”

게다가 여긴 크라니그 산맥의 절벽.

복부를 제대로 얻어맞은 놈은 그대로 한참을 나뒹굴었다.

촤르륵!

그러다 그만 녀석의 몸뚱이가 절벽 너머로 사라졌다.

콰악!

녀석이 천길 낭떠러지로 처박기 전, 가까스로 디아의 왼손을 붙잡았다.

“후후.”

절벽 끝에서 녀석은 내 손에 의지한 채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허억……! 허억……!”

아직 하복부의 통증이 가시질 않았는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디아.

녀석의 발밑엔 어두운 숲만이 저 멀리 자리 잡고 있었다.

“으윽……!”

“뭐야.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까분 건가?”

“…….”

디아는 분한 듯 아무 말도 못했다.

게다가 낭떠러지가 무서운지 맞잡은 손이 옅게 떨리기까지 했다.

“전투란 건 말이다. 기사 학교에서 서로 예의 갖추면서 하는 거랑은 다르다. 지금처럼 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명심하겠습니다.”

디아는 지금껏 대련이라곤 기사 학교에서 치러 본 게 전부다.

실전이 아닌 모의 전투.

지금 이건 녀석에게 경험이 필요하단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한 충격 요법 같은 거였다.

그리고 하나 더.

“보통은 검술 랭크만 올리지만, 나처럼 마법 랭크까지 보유한 경우도 아예 없진 않다구. 그러니…….”

스르륵!

붙잡고 있던 디아의 건틀렛이 점점 미끄러졌다.

“저, 저기… 백작님?”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노오오력을 해야 한다 이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그 전에 일단 올려 주시면…….”

“그럼 이 노력이란 게 뭐냐.”

“…….”

“생사의 고비를 넘는 역경! 응? 그런 거 아니겠어?”

“으으....”

“그러니 너한테 첫 번째 임무를 내려주겠다.”

“첫번째 임무라심은……?”

“살아남아라. 크라니그 산맥의 깜깜이 숲에서.”

“…네?”

탁!

내 말이 끝나자마자 붙잡고 있던 디아의 건틀렛이 벗겨졌다.

주인 잃은 건틀렛은 내 손에 남아 있었고.

건틀렛의 주인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으아아아아아…….”

“나중에 보자구. 친구.”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지 않나.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녀석을 키우려면 이게 제일이다.

만들어진 블랭크니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는다.

깜깜이 숲.

원작에 의하면 녀석이 뿌리 거인을 처치하곤 어마어마한 금화를 얻게 되는 이벤트가 열리는 곳.

물론 지금은 뿌리 거인 같은 건 없다. 길 잃은 상인들이 남긴 금화도 없고.

대신 적당히 구색은 맞춰 놨다.

“이스바르트.”

“네, 백작님!”

풀숲에 숨어 있던 이스바르트가 고갤 빼꼼히 내밀었다.

“준비는 다 됐겠지?”

“네! 소개 해주셨던 사역술사 분이 이것저것 많이 알려 줘서 금방 끝났어요!”

“허허.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이스바르트의 옆에서 한 남자가 고갤 쳐들었다.

아도르네이 후작령의 던전을 막는 데 꽤나 큰 도움을 준 사역술사 콜린.

녀석의 지도 아래 이스바르트의 사역 랭크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둘이 만든 깜깜이 숲의 무대라면, 원작 속 이벤트를 재현하는 데는 충분할 거다.

‘남은 건 저 녀석이 잘 살아 돌아오는 건데.’

아마 잘 살아남을 거다.

별일만 없다면야.

반짝.

주인공 키우기의 성공을 기원하던 그때.

저 멀리 아래에 위치한 깜깜이 숲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보석 같지는 않았다.

은빛으로 찰랑이는 사람의 머릿결 같아 보였다.

그것도 베로니아 가문 특유의 은발 말이다.

“…타르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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