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디아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하…….”
힘겹게 입을 열곤 태연한 척해 보려 했지만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아무리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해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은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듯 연신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뭐. 여기서 얘기할 만한 내용은 아니군.”
드르륵!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수,”
팅!
그리곤 주인장을 향해 금화 한 닢을 던져 줬다.
누런 금화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장은 이내 그 어느때보다도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살펴 가십쇼!”
“아. 이 옆에 꼬맹이 것도 계산한 거다.”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럼.”
내가 주점을 빠져나갈 때까지 디아는 멍하니 서서 내 뒷모습만 바라봤다.
난 그런 녀석에게 한마디 했다.
“뭐해? 술값 받았으면 일해야지?”
“아앗… 네에…….”
그제야 힘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아, 그래.”
주점 밖에서 이슬린이 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철컥.
이슬린이 문을 열자 마차의 상석에 먼저 들어섰다.
“…….”
디아는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뭐해? 타지 않고.”
“그, 그게…….”
여기까지 왔는데도 고민 중인가 보다.
하기야 딱 봐도 수상해 보이긴 하니까.
이럴 땐 뭐다? 세게 나가야 한다.
“싫음 관둬. 술값은 꽁돈 주운 셈치라구. 이슬린, 가자.”
“네, 백작님.”
그러자 이슬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차의 문을 닫았다.
그리곤 마차에 시동을 걸려는 찰나.
“…잠시 만요!”
‘걸려들었군.’
여기서 내 제안을 거절하면 백수 기사다.
말이 좋아서 백수 기사지 사실상 용병이나 다름없는 인생.
제니스 기사 학교를 수석 졸업 하고도 용병일이나 하는 건 녀석도 싫을 거다.
“…뭐지?”
“그게…….”
“미안하지만 난 바쁜 몸이다. 타려면 타고, 싫으면 그냥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라.”
“…타겠습니다!”
결국 디아는 하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늦은 저녁.
그렇게 주인공 녀석을 태운 마차는 임페라 백작령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마차로 꼬박 반나절은 달려야 도착할 거리.
그 동안 마차엔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따금 디아가 이슬린의 머릿결을 흘긋거리긴 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베로니아 가문 특유의 은발이 신경 쓰이는 거겠지.
‘타르옌이랑은 잘 되고 있나 모르겠네.’
잘 되고 있을 거다.
타르옌은 여러모로 미친 여자니까.
어쩌면 방금 주점에서 몰래 디아를 훔쳐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십중팔구 그랬을 거다.
‘날 때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면서 주인공한테 호감 같은 나사 빠진 여자니까.
지금 타르옌 본인은 호감인지 증오인지 구분도 못하는 상태지만.
‘타르옌이라.’
디아만 영입하는 데 성공하면 타르옌까지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거다.
마법 랭크에 특화된 베로니아 가문을 등에 업는다는 건 굉장한 이득.
그 외에도 자잘한 조연들을 얻기 위해선 주인공의 영입이 필수였다.
단순한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동료.
이를 위해선 조금은 과격한 방법도 필요했다.
끼익……!
그렇게 침묵만이 맴돌던 마차가 멈춰 섰다.
어느덧 시간은 이른 새벽이 다 된 뒤였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음. 고생했다. 시간도 늦고 했으니 얼른 들어가서 쉬라구.”
“네.”
이슬린은 그렇게 나와 디아를 내려 주곤 마차를 끌고 자릴 옮겼다.
“으음…….”
방금 술 한잔해 졸릴 법도 한데 디아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눈칠 살피기 바빴다.
카앙! 카앙!
새벽부터 저택에선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프리아나가 수련 중인 듯했다.
“벌써 수련 중인가.”
“이 소린……?”
“마침 잘 됐군. 얼굴이나 한 번 비추러 가자고.”
“예? 아앗…….”
난 녀석을 이끌고 저택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무장에선 프리아나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혼자 하는 건 아니었다.
“칼로스?”
아이소테르의 전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
그와 함께였다.
“백작님!”
프리아나는 날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구만그래. 그나저나.”
난 빈트하겐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러자 빈트하겐도 잠시 검을 멈춘 채 내게 턱 끝을 까딱였다.
“언제 왔지?”
“…이 녀석이 하도 조르길래 잠시 와 봤다.”
“이야. 둘이 벌써 친구 먹은 거야?”
“치, 친구라뇨! 전 단장님께서 검을 섞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뿐입니다.”
“흥.”
빈트하겐은 쌀쌀맞게 콧방귀를 꼈다.
나이가 벌써 오십이 다 된 녀석치곤 하는 짓은 애 같달까.
“허억…….”
디아는 빈트하겐을 보곤 헛바람을 삼켰다.
고작해야 스무 살 언저리인 햇병아리 기사가 보기엔 너무나도 거물이었다.
“이 꼬맹이는 누구지.”
빈트하겐은 디아를 보곤 무심히 무심한 듯 물었다.
“아, 요번에 새로 데려올까 생각 중인 녀석이야. 이번 제니스 기사 학교 수석 졸업자지.”
“오! 같은 기사 학교 출신이었군요!”
프리아나는 디아를 처음 보는 터라 신기한 듯 그를 살펴봤다.
건틀렛을 낀 채 거물들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기 바쁜 디아.
그런 그에게 프리아나가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프리아나 아르나. 백작님을 섬기는 기사입니다.”
“프, 프리아나 님이라구요?”
디아는 프리아나의 이름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설에서야 후반부에 가서 만나 아는 사이긴 하지만, 지금도 아는 사이였나?
“응? 절 아나요?”
“그럼요! 제니스 기사 학교 수석 졸업자 분들은 모두 꿰차고 있다구요! 게다가 대전제 우승자 출신에… 속검의 기사란 이명에…….”
디아는 열혈팬이라도 된 것마냥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제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네요. 하핫.”
솔직히 나도 몰랐다.
얘가 그렇게 유명했나?
“아, 죄, 죄송합니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분을 뵙게 된 터라…….”
“괜찮습니다. 다 칭찬뿐이었는 걸요.”
다행히 앞으로 같이 지내는 데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수고하라구.”
“네, 백작님.”
프리아나는 짧게 고갤 숙이곤 다시 빈트하겐과 검을 잡았다.
주인공 녀석과 서재로 향하는 동안, 디아는 계속해서 신기한 듯 빈트하겐과 프리아나의 검무를 흘긋거렸다.
화려한 가구들로 가득한 방 안.
예전 베네르 백작이 쓰던 장소라 가구들은 하나 같이 고급스런 가구들로 가득했다.
벽을 가득 메웠던 잡다한 아티팩트들은 다 치웠다.
대신 단츌하게 내 초상화 하나를 그려 놨다.
옆엔 에이먼의 초상화도 있었다.
그 옆으론 역대 임페라 가문의 가주들 초상화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에이먼을 보니 괜히 입이 썼다.
“…….”
“백작님!”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날 반겼다.
새벽부터 일어나 저택 관리에 한창인 일레느였다.
“아, 일레느. 벌써 일어났나.”
“네! 언제 오셨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뭐 피곤하긴 한데. 할 건 해야지. 마실 것 좀 주겠나?”
“네!”
일레느는 밝게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에이먼이 죽고 한동안 침울해 있던 그녀였지만 요샌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레느는 향긋한 꽃차와 다과를 내어 왔다.
고소한 향이 몇 조각 먹고 자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래.”
탁.
일레느는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갔다.
바앙.
그리곤 서재 주위로 옅은 진동음 같은 게 들렸다.
외부와의 소음을 차단하는 결계였다.
결계까지 작동되자 간간히 들려오던 연무장 칼부림 소리가 말끔히 지워졌다.
“…….”
디아는 긴장한 듯 쿠키엔 손 댈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나 먹어라.”
“네, 네엣!”
그 모습이 짠해 쿠키를 하나 건네주자 억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그러자 꽤나 입에 맞았는지 금세 쿠키 하날 먹어 치웠다.
달콤한 쿠키 덕분에 딱딱했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자구.”
“윽…….”
디아는 왼손에 건틀렛을 낀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전에.”
“…네?”
“블랭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어찌 보면 뜬금없는 질문에 디아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랭크 시스템의 가호로부터 버림 받았단 이유로 배척받는 이들.
조금은 다르지만 같은 블랭크 입장에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왜지? 놈들은 대재앙의 근원이다. 블랭크들이 만든 던전이 몇 개고, 그 던전에 희생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진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콰악!
난 녀석의 건틀렛을 낀 손을 붙잡았다.
“이, 이거 놓으십시오!”
“흐흐! 아까부터 정말 수상하더군! 왜 그렇게까지 랭크를 비밀로 하려는거 지? 게다가 블랭크를 비호하는 말투까지!”
“그건…….”
“혹시 정말로 블랭크였나?”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 왼손도 멀쩡히 붙어 있고…….”
“그래? 그럼 보여 주지그래!”
콰드득!
“으윽!”
난 그대로 녀석의 팔을 얼려 버렸다.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녀석의 건틀렛을 벗기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이게 무슨……!”
스르륵!
녀석이 당황한 틈에 얼른 건틀렛을 벗겨 버렸다.
그러자 건틀렛 속에 감춰져 있던 녀석의 왼쪽 손이 드러났다.
룬 문양 하나 없이 말끔한 손.
랭크 시스템의 가호를 못 받은 손이었다.
파캉!
녀석의 팔을 붙잡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놈은 물세례라도 맞은 고양이마냥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녀석의 눈빛엔 살기가 가득했다.
지금껏 블랭크란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얼마나 가혹한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마 검이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뽑았을 거다.
“대,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살기가 가득한 녀석의 눈빛을 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도르네이 후작령을 넘어선 땅.
카잔 제국의 옛 영토에서 본 그 녀석.
“왜긴. 너가 진짜 만들어진 블랭크인지 확인해 보려고 한 거지.”
“…만들어진 블랭크?”
“후후.”
싱긋 미소 짓자 녀석은 고갤 갸웃했다.
여전히 눈빛에선 경계심이 가득했다.
“궁금하지 않았나? 지금껏 왜 네 왼손엔 랭크가 없는지. 그런 주제에 오러는 어떻게 쓸 수 있는 건지.”
“…….”
디아가 평생을 궁금해하며 살아왔던 자신이 가진 비밀.
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만이 이토록 특별한지 알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이는 소설의 중후반부까지나 가서야 밝혀지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편만 빼고 본 나는 안다.
녀석이 특별한 이유를.
“…정말 그 이유를 아시는 겁니까?”
“그래.”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백작쯤 되면 아는 게 많아지거든.”
“…….”
“날 섬겨라. 그리하면 네 녀석의 비밀을 알려 주도록 하지.”
녀석 입장에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가 없다.
그가 평생을 갈구해 오던 진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날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하기야 태어나서 처음 보는 놈이 출생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는데, 믿으면 이상한 거다.
‘그래서 더 믿어 볼 만한 거지만.’
난생처음 보는 놈이 자신이 감춰 오던 비밀까지 알고 있고.
출생의 비밀까지 알려 준다?
머리론 믿으면 안 된다 생각하겠지만, 왠지 모를 녀석의 감이 외치고 있을 거다.
이 남자를 섬겨라.
그리고 평생 궁금해 오던 비밀을 알아내라.
“…….”
디아는 아무 말 없이 날 노려봤다.
“흐흐.”
녀석의 눈빛을 보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의 눈빛만큼은 그 자식과 빼어 박은 듯했다.
얀 공작.
카잔 라크레시아.
소설의 주인공이 어째서 소설의 최종 빌런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걸까?
‘그야 간단하지.’
그가 만들어진 블랭크니까.
카잔 라크레시아를 복제한 인조 생명체.
모든 인류를 초월한 미친 대마법사의 유산.
완벽한 돌멩이나 완벽한 종이 쪼가리가 아닌.
완벽한 인간.
그게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