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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1화 (121/222)

121화

챙그랑!

제아무리 고대인의 유물이라 해도 오러 소드를 버틸 순 없었다.

광전사의 함이 날카로운 소릴 내뱉으며 박살 났다.

파아앗!

옅게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이 사라졌다.

자연스레 시선은 무투왕 탈리스에게 향했다.

“끄으윽…….”

탈리스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다행히 몸이 녹아내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의 분노를 일단은 진정시킨 셈.

“끄, 끝난 겁니까?”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과 검을 나누던 프리아나.

녀석이 최악의 주문을 내뱉긴 했지만 다행히 탈리스의 상태는 그대로였다.

“이익……!”

지금껏 실실 웃던 나단 공작도 침음을 흘렸다.

“모두 물러나라!”

“옛!”

놈들의 계략이 실패 한 이상 승산은 없었다.

나단 공작의 외침에 기사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보내 줄 성싶으냐!”

위셀란의 기사단장이 순순히 놈들을 보내 줄 수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카앙!

하지만 세이렘의 개입에 의해 곧바로 저지됐다.

“미안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이익……! 이 배신자!”

그는 세이렘을 죽일 듯 노려봤지만 그게 다였다.

아직 햇병아리 기사단장에 불과한 그가 노련한 배신자 세이렘을 상대 할 순 없었다.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가 다른 기사단장들에게 외쳐 봤지만 다들 가만히 서서 녀석들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빈트하겐이 부들대는 그에게 말했다.

“때론 놓아줄 때를 알아야 한다네. 젊은 기사단장이여.”

“그런…….”

“저길 보게나.”

빈트하겐은 프로스트 랜드 기사들의 선 자릴 가리켰다.

벌써 도망 갈 준비를 해 놨는지, 놈들이 선 자리엔 거대한 룬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대공간 이동 마법진.

더 이상 놈들에게 다가갔다간 재수 없게 공간 이동 마법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십중팔구 놈들의 아지트일 텐데, 이는 너무 위험했다.

화합의 섬이 왕국 수장들로 가득한 곳이긴 했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계획이 수틀리기라도 했다간 몰살이 뻔할 테니 저들도 도망갈 구멍은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크윽……!”

위셀란의 기사단장은 분한 듯 놈들을 노려봤다.

세이렘은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친 채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쉽게 됐군, 빈트하겐. 네 녀석이랑은 한 번 제대로 붙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부하들과 함께 달려든 놈 치곤 말이 우습군.”

“후후. 그런가?”

세이렘은 그 말을 끝으로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이놈! 오늘 이날부터 네놈들은 연합의 적국이다! 어리석은 짓을 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흐흐! 과연 그럴까?”

나단 공작은 신성 왕국의 수장을 향해 비웃었다.

그리곤 동행한 마법사 녀석한테 눈짓하자 룬 문양이 밝게 빛났다.

파아앗!

요란한 굉음과 함께 대공간 이동 마법이 발동됐다.

그러자 나단 공작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환한 빛을 한 번 내뿜곤 불 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내 아수라장이었던 회담 장소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끝났군.”

빈트하겐이 작게 중얼거렸다.

끝이라.

많은 게 끝난 날이다.

탈리스의 분노도 연합도.

쿵쿵쿵!

“어찌 된 일입니까!”

회담이 열렸던 등대 밖으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다급한 목소리에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이변을 눈치채고 온 연합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기사 던전화가 시작될 뻔했는데.

다만 그들 중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는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허억!”

문 뒤로 보이는 참혹한 회담장.

수많은 기사들이 죽고 남은 시체들로 즐비했다.

“으윽……!”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한 연합의 기사들.

이내 자초지종을 전해 듣곤 이들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쩐지 그 배신자 놈들이 안 보이더니만……!”

“끄응…….”

“자자, 지금 한가롭게 감상평이나 늘어놓을 때가 아니라고. 수습부터 해야지?”

“…예! 뭣들 하는 게냐! 빨리 움직여!”

다행히 프란츠의 모든 기사들이 배신을 한 건 아닌 터라,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은 부랴부랴 탈리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으윽…….”

“전하! 움직이시면 아니되옵니다!”

“…….”

탈리스는 초죽음 상태가 된 채로 기사들의 부축을 받았다.

이는 무투왕이라 불리는 남자가 아닌, 평범한 힘없는 노인의 모습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무투왕이라 불린 남자이기에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던전화를 온몸으로 받아 놓고선 제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거니까.

던전화는 대상의 몸뚱이를 분해하고 재구축하는 끔찍한 과정을 동반한다.

그런 지옥 같은 과정을 겪고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쯧.”

들것에 실려 나가는 탈리스를 보며 혀를 찼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거다.

“이안.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네. 여왕님. 여왕님은 괜찮으십니까?”

“저야 뭐… 뒤에서 구경만 했으니까요.”

이글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여왕님이 칼로스한테 명령을 내려 주신 덕분에 모두가 산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이글렌은 내가 위로라도 해 주려는 줄 아는지 피식하고 웃었다.

“어서 부상자들을 옮겨라!”

“이봐! 정신 차리게!”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이 부상자들을 살폈다.

한바탕 휩쓸고 간 소란에 다들 정신이 없었지만, 이내 알게 될 거다.

프로스트 랜드의 배신.

오늘이 앞으로 있을 대륙의 나날들 중 가장 평화로운 날이란 걸.

혼란으로 가득한 화합의 섬 한가운데서 이글렌은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

난 그건 그녀 옆에서 작게 물었다.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아무도 모르죠.”

카잔 라크레시아의 등장.

소설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었지만 난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2차 대륙 전쟁.

눈앞에 보이는 기사들 태반이 전사하게 될 참혹한 전쟁이 벌어질 거란 걸.

* * *

“…푸하!”

젊은 기사 하나가 홀로 객잔에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제 막 스물이 됐을법한 앳된 얼굴.

그런 그의 한쪽 손에 끼워진 건틀렛이 인상적이었다.

건틀렛의 기사 디아 제니스.

제니스 기사생도 시절부터 이명이 붙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이가 한 기수의 수석까지 따 놨다면, 수많은 귀족 가문에서 영입 제안이 불티나게 오는 건 당연할 터.

하지만 디아는 달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사 학교를 졸업한지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무직 백수 기사인 채였다.

“X미럴…….”

덕분에 이렇게 홀로 객잔에서 술이나 홀짝이는 신세다.

대체 이유가 뭘까.

디아는 술 취한 머리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도르네이 후작가 녀석의 견제?

“에이. 그건 아니겠지.”

거긴 지금 새로 생긴 던전 때문에 정신도 없다.

디아 같은 전쟁고아 출신에 애송이 하날 견제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그럼 프로스트 랜드의 연합 탈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보름 전 프로스트 랜드가 연합을 탈퇴했단 소문이 돌았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에서 공식적으로 프로스트 랜드를 연합에서 제명시킨다는 선언도 있었고.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귀족 가문들은 인재 영입을 위해 눈에 불을 켜기 마련이다.

디아를 영입하려면 영입하려 했지 지금처럼 아무도 영입 제안을 안 할 리는 없었다.

남은 이유는 단 하나.

“…에휴.”

디아는 자신의 건틀렛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확히는 건틀렛 너머에 위치한 왼쪽 손.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왼손의 룬 문양.

디아에겐 그게 없었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머리가 커질 무렵, 자신이 남들과 다르단 사실을 알았으니까.

이유가 뭔지 알려 줄 부모조차 그에겐 없었으니까.

귀족 가문에 영입된다는 건 가문의 일원이 된다는 것.

그 전에 자신의 랭크를 밝히는 게 통과의례다.

하지만 디아는 그럴 수 없었다.

랭크는커녕 왼손에 룬 문양조차 새겨지지 않았으니까.

기사 학교야 학교장의 배려로 큰 소란 없이 다닐 순 있었다.

랭크 공개를 극도로 거부하는 디아를 받아 줄 형편 좋은 귀족 가문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왼손에 룬 문양조차 없는 블랭크란 사실이 알려진다면, 귀족들은 그를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이려 들 테니까.

그 결과가 이거다.

다른 동기들 모두 크고 작은 귀족 가문에 영입된 마당에, 홀로 객잔에 앉아 술이나 퍼먹는 꼬라지.

슬슬 돈도 다 떨어져 간다.

‘이러다 용병일이나 하게 생겼는데…….’

차라리 그게 날까?

랭크를 밝힐 필요도 없고.

나름 실력만 좋다면 벌이도 쏠쏠하다던데.

“저기…….”

디아는 혹시 괜찮은 의뢰는 없나 물어볼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 주점에선 자잘한 용병일도 겸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결심을 굳히던 그때.

“읏챠.”

“…응?”

웬 남자 하나가 그의 옆에 앉았다.

술에 취한 그였지만, 옆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몰라보진 않았다.

그야 요즘 아이소테르에선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남자였으니까.

* * *

“여기. 옆에 이 친구랑 같은 걸로 주쇼.”

“예입.”

술집 주인은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이곤 닦던 유리잔을 마저 닦았다.

아마 내 얼굴은 모르는 듯했다.

알아봤으면 부리나케 술을 내어 왔을 테니까.

하지만 옆에 앉은 녀석은 용케 날 알아봤다.

예전에 한 번 봐서 그런가?

탁.

주인장 먼저 시원한 에일 한잔을 내어 왔다.

벌컥벌컥.

“캬. 맛 좋네.”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녀석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잠깐만 있어 봐. 술은 오랜만에 마시는 거라.”

“허읍…….”

놀란 건 놀란 거고.

난 태연히 주인장이 내어 온 에일을 마저 비웠다.

씁쓸하고 탄산이 톡톡 터지는 게 꽤나 먹을 만했다.

가끔은 이런 싼 술도 마셔 줘야지.

“후, 맛있구만.”

“후후! 그렇습니까요?”

주인장은 술맛 칭찬에 기분 좋게 웃었다.

여전히 옆에 앉은 녀석은 영문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오랜만이군, 디아 제니스.”

“제, 제 이름을 아십니까?”

녀석은 어째서 자길 아냐는 듯 놀란 반응이다.

“그야 그렇지. 제니스 기사 학교 수석 졸업자를 어떻게 모르겠나.”

“그, 그치만… 기사 학교 졸업자쯤이야 매년 나오고…….”

디아는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나저나 백작님께서 이런데는 무슨 일로……?”

“왜일 거 같나? 이 술 마시러 온 거겠어?”

“그, 그야…….”

눈칠 살피던 디아 제니스.

그런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거렸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 어렵다던 제니스 기사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한 달째다.

아직까지 영입 제안 하나 없이 빌빌거렸으니, 내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겠지.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었다.

“디아 제니스. 임페라 가문의 호위 기사로 영입을 제안하러 왔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후후. 그래.”

“감사합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백작님!”

디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소설의 줄거릴 크게 벗어나는 짓이었지만, 뭐 어떤가.

당장 내 코가 석 잔데.

이미 소설의 줄거리가 개판이 된 마당에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주인공을 가까이 두자.

내 편으로 잘만 활용한다면, 주인공 버프에 듬뿍 절여진 녀석이니 나도 거기 꼽사리 끼면 그만이다.

‘어차피 타르옌이랑 만남은 성사됐고.’

메인 히로인과 강렬한 첫 만남은 성공했다.

나머진 다 내 밑에서 만나기만 하면 그만이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녀석의 동료들까지 모두 내 편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앞으로 있을 재난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게 있다.”

“…뭔가요?”

디아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주군과 가신 사이엔 절대적인 신뢰가 필수다. 당연히 비밀도 없어야겠지. 특히나 랭크 같은 경우엔 더더욱.”

“으으…….”

혹여나 영입한 가신이 흑마법 랭크 보유자였다간 주인까지 덤터길 쓸 수도 있었다.

때문에 귀족 가문에 들어갈 경우엔 반드시 랭크 확인이 필수였다.

“하, 하지만…….”

디아는 곤란한 듯 식은땀 흘리기 바빴다.

주인공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괜히 골려 주고 싶어졌다.

난 씨익 웃으며 우리 둘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쫄고 그러나? 블랭크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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