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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20화 (120/222)

120화

“크아악!”

콰앙!

탈리스는 움켜쥐고 있던 세이렘을 집어 던졌다.

“커허억……!”

세이렘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용케 목숨은 붙어 있었다.

“이, 이 망할 놈들……!”

까드득!

분노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탈리스.

그런 그를 향해 나단 공작은 계속해서 도발했다.

“네가 죽는 그날까지 프레이야를 볼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곤 후회 속에 죽어 가겠지! 차라리 그때 연합을 배신하고 프레이야를 만났으면 하면서 말이야!”

누가 봐도 지금 탈리스의 상태는 이상했다.

계속해서 커져 가는 분노에 스스로를 주체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지금껏 참아 왔던 분노가 한 번에 폭발했다.

이건 좋지 않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

이는 던전을 만드는데 있어 훌륭한 재료다.

게다가 그는 무투 랭크 8.

‘이건 좀… 심각한데.’

그저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탈리스의 두 눈은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거였나.

탈리스는 계속 참고 또 참았다.

과거 프레이야가 알이 돼 버렸을 때,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신성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누구라도 분노했을 상황이었다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분노로 인해 온 대륙을 무대로 한 전쟁이 시작됐다.

그의 분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사라졌을까.

랭크 8의 분노가 어떠한 건지 뼈저리게 느꼈다.

때문에 그는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던전이 되어 버린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목숨이 위험했다.

어쩌면 모두 죽어 버릴지도 모르고.

라크레시아 입장에선 쾌재를 부를 일.

이제야 라크레시아의 생각이 뭔지 깨달았다.

굳이 내게 본인의 등장을 알린 이유.

놈이 등장했단 소식에 난 쫄래쫄래 왕국 수장들에게 일러바쳤다.

그 결과 연합 회담이 열렸다.

난 결국 놈의 손에 놀아난 거다.

애써 돌아다닐 필요 없이 한 방에 연합의 수장들을 처치할 수 있도록 가져다 바친 꼴이다.

“그, 그건 오해일세!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한가! 지금 저 배신자들을 처치해 준다면! 앞으론 물심양면으로 프레이야를 되살리는 데 협조하도록 하겠네!”

“그래! 마침 지난 대전제 우승자가 여기 있었군! 우승 상품으로 받았던 레서 드래곤의 마핵! 돌려주는 게 어떤가!”

연합의 수장 하나가 내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이미 크로드한테 줘 버린 뒤다.

“…그거요? 음… 이젠 저한테 없는데요.”

“…뭣이?”

마치 내게 잠시 맡겨 놓기라도 한 것마냥 말하는 신성 왕국의 수장.

좀 어이없긴 했지만 탈리스를 진정시키려면 급하긴 하니까.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거다.

그렇담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탈리스를 이토록 분노케 만든 건 그간 절박한 상황도 이유였지만 아마 다른 이유도 있을 거다.

프로스트 랜드의 수행원들을 살폈다.

‘…역시.’

그러자 대열의 맨 뒤에 숨은 채 웅얼대는 녀석들이 보였다.

프스스…….

녀석들 주위로 옅은 마나의 파동이 탈리스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지금 놈들이 쓰는 마법이라면 뻔했다.

네모반듯한 주사위 모양의 아티팩트.

평범한 주사위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선 룬 문양이 새겨진 장식이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광전사의 함.

고대인들이 광전사를 만들 때 쓰던 고대의 아티팩트다.

당시엔 별 문제 없이 쓰이던 아티팩트였지만, 지금 이 세상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녀석이다.

‘다들 저런 게 있는 줄도 모르는군.’

화합의 섬에 모인 연합의 기사단장들.

빈트하겐 칼로스를 포함한 이들 모두 고대인의 유물에 대해선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나.

고대인의 영약을 통해 단전을 얻은 자만이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감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무투 랭크 8인 탈리스였지만 놈들의 얕은 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이유도 모르는 채 내면의 분노가 계속해서 커져 나가기만 했다.

일흔에 가까우면서도 지금껏 계속 참아 왔던 그의 분노.

이미 절벽 끝까지 온 그의 등 뒤를 살짝 떠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끄으윽……!”

탈리스가 기괴한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는 자신의 분노에 집어삼켜지고 만다.

쿠구구……!

동시에 화합의 섬 주위로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크하하! 더 분노해라! 탈리스! 모든 걸 잃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 자신을 원망해라!”

길길이 날뛰던 탈리스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 못한 그는 점차 사람이 아닌 던전 마스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하, 하지만…….”

연합의 기사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지 가만히 얼어붙어 있었다.

개중엔 눈빛을 보아하니 차라리 이번이 탈리스를 제거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리 늙었어도 랭크 8이란 건 모두의 두려움을 받는 존재니까.

“연합의 배신자를 처단한다. 그게 당신네들 할 일 아냐?”

“으음…….”

“어, 어디 백작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연합의 수장에게 명령이냐!”

위셀란의 국왕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릴 지껄였다.

“백작 나부랭이? 이 새ㄲ…….”

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싸워야 할 놈은 이들이 아니다.

일단 정신 못 차리는 놈은 내버려둔 채 고갤 돌렸다.

“칼로스.”

“…그래.”

“도와줄 거지?”

“여왕님을 지키는 게 급선무긴 하지만…….”

빈트하겐은 이글렌을 흘긋 쳐다봤다.

그러자 이글렌은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칼로스. 그의 말대로 하세요.”

“예. 전하.”

“좋아.”

갈렌 편에 있었을 땐 끔찍한 놈이었지만 같은 편이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우선 프란츠의 기사단장을 맡아 줘.”

“알았다.”

그가 검을 뽑아 들자 이글렌을 호위하던 적갑 기사들도 앞에 나섰다.

“지금부터 이안 백작의 명령에 따른다. 알겠나?”

“예!”

파앗!

녀석들은 곧바로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도 연합의 다른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난 그런 녀석들을 향해 한 마디 던졌다.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으십쇼..”

“으음…….”

그렇게 가만히 있는 놈들은 내버려두고.

난 적갑 기사단 무리에 섞여 든 채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빈트하겐을 따라 아이소테르의 수행원 자격으로 동참한 프리아나.

그도 빈트하겐을 따라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을 상대했다.

카앙!

“막아라! 유물에 손을 대게 놔둬선 안 된다!”

나단 공작은 금세 내 의도를 파악하곤 기사들을 내보냈다.

정신 공격에 한창인 마법사 녀석은 적들의 검을 피해 무리 틈으로 숨어들었다.

녀석의 뒤를 놓치니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떠 봤지만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콰아앙!

“커헉!”

빈트하겐의 검에 기사 하나가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며 튕겨져 나갔다.

“…유물?”

나단 공작이 요란을 떨어 준 덕에 그도 유물에 대해 알아차렸다.

“그런 거였군.”

“그런 거지.”

빈트하겐의 콧수염이 씰룩 거렸다.

그게 그가 미소 짓는 방식인 듯했다.

“전열을 맡겠다.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으니 어서 처리해라.”

“크흐흐! 그래!”

빈트하겐은 배신자들의 수를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어딜!”

기사단장급은 기사단장급이 상대한다.

변절한 프란츠의 기사단장, 세이렘의 검이 그와 격돌했다.

“용케 정신을 차렸군그래.”

“흥!”

빈트하겐의 도발에 세이렘은 코웃음쳤다.

바로 그때.

나단 공작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빈트하겐을 에워쌌다.

“힘을 숭배한다는 기사치곤 꼴이 우습군. 세이렘.”

“…시끄럽다!”

그를 에워싼 이들의 검이 쏟아졌다.

아무리 아이소테르의 최강자라 해도 이들 모두를 이기는 건 힘들었다.

카앙! 캉!

어찌어찌 막아 내긴 했지만 점차 밀리는건 어쩔 수 없었다.

압도적인 강자가 있으면 모를까.

갈렌 덕에 적갑 기사단 정예 대부분을 잃은 터라 제대로 된 싸움은 불가능했다.

‘이쯤되면 좀 와라!’

속으로 연합의 수장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가만히 우물쭈물하던 놈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부디 싸움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위셀란의 기사단장 비렌타 세이버.

다른 기사단장들에 비해 가장 최근에 기사단장 자릴 꿰찬 남자였다.

대전쟁 당시엔 일개 평범한 기사에 불과했던 자.

그래서인지 몰라도 연합의 복잡한 정치 싸움보다 제국의 잔당을 무찔러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으으……! 알았다! 어서 저들을 도와 연합의 배신자들을 벌하라!”

“예!”

위셀란의 왕은 비렌타의 등쌀에 떠밀려 명령을 내렸다.

“…저희도 돕게 해 주십시오!”

비렌타의 목소리에 힘입어 다른 이들도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눈치 보기 급급했던 연합의 수장들은 하는 수 없이 휘하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아이소테르를 도와라! 연합의 적을 멸한다!”

“와아아!”

다른 이들까지 모두 가세하자 힘의 균형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끄으으…….”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지금은 탈리스가 얌전히 무릎 꿇은 채 있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녀석이 던전 마스터가 돼 버리고 만다.

랭크 8의 원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던전.

그게 시작되고 만다면 화합의 섬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카앙!

앞을 막아선 녀석의 검을 튕겨 냈다.

“크윽……!”

덕분에 훤히 드러난 녀석의 급소.

난 놈을 죽이는 대신 사각으로 파고들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이놈을 죽이는 게 아니다.

놈들 틈에 숨은 고대인의 유물을 파괴하는 거지.

‘어디지?’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후읍.”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곤 아비규환인 전장 한가운데서 정신을 집중했다.

고대인의 유물이 이래서 까다롭다.

한때 대륙을 지배했던 이들인 만큼 사용 가능한 유물의 힘이 끝도 없었으니까.

대신 한 가지 파훼법이 있다.

고대인의 유물만이 가진 특이한 마나의 파동.

어찌 보면 옛 지구의 이들이 쓰던 마나와 흡사한 감각.

난 놈들 사이에서 옅은 마나의 파동을 느꼈다.

“죽어라!”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집중하던 내 뒤로 검이 날아들었다.

한 발짝 옆으로 피하곤 놈의 엉덩일 냅다 걷어찼다.

“어엇……!”

쓰러진 녀석에게 연합의 기사들이 검을 내질렀다.

끼어든 불청객은 그렇게 보내 버리고 다시금 집중하자 놈들 가운데서 유물이 가진 파동이 느껴졌다.

고갤 돌려보자 텅 빈 공간에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

미친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난 내 감각을 믿었다.

그리곤 허공을 향해 오러가 가득 담긴 용린검을 휘둘렀다.

…파캉!

날카로운 유리창 깨지는 듯한 소리가 허공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곤 이내 아무것도 없던 텅 빈 공간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커…헉!”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던 마법사 녀석이 쉴드 채로 두 동강 나 버렸다.

그리고 아직 채 식지도 않은 녀석의 손엔 아까 봤던 광전사의 함이 들려 있었다.

“저, 저 놈을 막아라! 당장!”

뒤늦게 나단 공작이 날 발견하곤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광전사의 함은 내가 차지한 뒤였다.

“이딴 걸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면 쓰나.”

바닥에 놓인 광전사의 함.

그 위로 용린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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