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나단 공작에게 지금 상황은 절체절명의 위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태연히 다릴 꼬며 말했다.
“탈리스. 끝까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비록 분리 독립했다 해도 경어를 쓰는 게 예의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이미 갈 데까지 간 나단 공작에게서 탈리스를 향한 예의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하! 어리석은 건 네놈이겠지! 감히 연합을 배신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했나!”
위셀란의 왕이 역정을 냈다.
카잔 제국이라면 치를 떠는 그였기에 그의 눈에선 벌써부터 살기가 가득했다.
“…진정하시오! 위셀란의 주인이여!”
“…탈리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배신자를 두고 진정하라니!”
오히려 화낼 당사자는 탈리스였지만 그는 오히려 위셀란의 왕을 진정시키고 나섰다.
그리곤 나단 공작을 이해한다는 듯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는 그저 일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이오. 나 또한 그녀를 보고픈 마음에 크나큰 실수를 범할 뻔했으니.”
“으음…….”
“하지만 아무리 실수라 해도……!”
“우리 북방인들이 프레이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소? 때문에 저들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도 난 저들을 탄압하지 않았소. 프레이야가 없는 북방은 속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니까.
내가 그녀를 아낀 것처럼, 저들도 프레이야를 향한 충성심 때문에 그러는 거라 생각하고 참고 또 참았소. 프레이야가 되돌아오기만 한다면 저들도 다시 되돌아올 테니까.”
“…….”
연합의 수장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탈리스의 간곡한 부탁에도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주지 않은 건 다름 아닌 저들이었으니까.
탈리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많은 걸 바라진 않겠소. 그저 내가 했던 것처럼. 연합의 수장들께 부탁하겠소. 단 한 번만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진 못하겠소?”
그가 저렇게까지 나오자 연합의 일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제일 힘든 건 탈리스일 거다.
프레이야를 되살리기 위해 내민 구원의 손길도 거절당하고, 자신의 영토 반절을 떼어 주면서까지 가신의 독립을 허락했다.
탈리스가 늙긴 했지만 힘이 없어진 건 아니다.
때론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다 유연하게 휘어 주는 게 더 낫다 생각한 그의 희생.
그런 그의 희생을 무시한다는 건 차마 그들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단 공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아직 연합을 탈퇴하겠다 선언한건 아니니 말이오.”
“…….”
“…자네들이 프레이야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는 나도 잘 안다네. 그러니 자네들을 놓아준 거고. 하지만 이건 아닐세. 프레이야를 그 꼴로 만든 놈들 편에 선다니! 필시 놈들은 프레이야를 멀쩡히 되살려 주려는 게 아닐 걸세!”
탈리스 역시 경어가 아닌 평범한 말투로 나단 공작을 타일렀다.
연합의 수장으로서가 아닌, 한때 자신을 섬겼던 가신을 향한 진심 어린 말투였다.
탈리스는 착잡한 눈길로 나단 공작을 바라봤다.
나단 공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푸하하!”
다름 아닌 비웃음이었다.
“아주 눈물 겹구만그래. 늙더니 이젠 아주 나약해졌어. 북방 최강의 남자라 불리던 이름이 우습군!”
“…뭐, 뭐라?”
인내심의 한계라도 테스트 하는 듯한 나단 공작의 말투에 탈리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나단 공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릴 이해한다고? 정말로 당신이 그럴 같나?”
“그게 무슨……!”
“우리가 왜 프레이야를 따랐는 줄 아나?”
“그야…….”
“신화 속 존재니 뭐니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구. 우리가 그녈 따랐던 이유는 단 하나다.”
“…….”
“그녀가 가장 강했으니까.”
“…….”
“당신 말대로 프레이야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살려 주진 않겠지. 하지만 그래서?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긴! 놈들은 파멸을 불러일으킬 거다! 프레이야를 놈들의 권속마냥 부리면서!”
“그럼 오히려 좋은 거지. 프레이야를 권속으로 부린다는 건 그가 블루 드래곤 따위보다 훨씬 강하다는 거니까.”
“이놈이……!”
“우리 북방인들은 더 강한 이를 따를 뿐이다. 그가 프레이야보다 강한 이라면! 그자를 따르면 되겠지!”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던 탈리스의 목덜미에 핏줄이 불룩 솟았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은 전성기 시절 북방 최강의 남자를 떠올릴 수준이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구나! 네놈 목을 비틀어……!”
…콰앙!
별안간 회담 장소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이는 탈리스의 것도, 나단 공작의 것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에게서 난 소리였다.
흉흉한 기세를 풀풀 풍기는 그의 오러 소드가 프란츠의 기사단장, 세이렘의 검과 맞부딪히고 있었다.
뜬금없는 칼부림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칼로스!”
화들짝 놀란 위셀란의 국왕이 소리쳤다.
검을 모르는 그가 봤을 땐, 빈트하겐의 검이 탈리스를 공격하려다 세이렘의 검에 가로막힌 거였으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똑똑히 봤다.
탈리스를 지키던 프란츠의 기사단장 세이렘.
그가 탈리스의 등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는 걸.
다행히 빈트하겐이 막아서 망정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탈리스라 해도 치명상을 피할 순 없었을 거다.
“칫.”
기습에 실패한 세이렘이 짧게 침음을 흘렸다.
카앙!
세이럼이 검을 강하게 밀쳐 빈트하겐을 튕겨 냈다.
둘 모두 어마어마한 강자였기에 자칫했다간 다른 이들까지 휘말릴 수 있기에.
일단은 서로 거릴 벌리며 한숨 돌렸다.
“고맙군.”
프란츠 기사단장 세이럼의 검을 막아 낸 빈트하겐이 내게 작게 말했다.
“어떻게 안 거지? 프로스트 랜드뿐만 아니라 프란츠의 기사단장마저 배신할 거란 걸.”
“엄…….”
솔직히 말하자면 세이럼 저 녀석까지 배신할 줄은 몰랐다.
소설에선 탈리스도 연합을 탈퇴한 터라 프란츠의 기사단장이 그를 기습할 일은 없었으니까.
“…왠지 그럴 것 같더라구. 확신이 없어서 말은 못 했지만.”
“…그렇군.”
“그나저나 넌 어떻게 안 거지? 세이럼이 배신할 거라 귀띔해 준 적은 없는데.”
“…어젯밤 잠시 담소를 나누다보니 낌새가 이상하더군. 북방인은 가장 강한 자를 따라야 하는데. 지금의 탈리스는 그런 게 아니라면서 말이야.”
“아하.”
뭐 어찌 됐건 빈트하겐이 나서 준 덕에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아무리 탈리스가 북방 최강의 남자라 해도 등 뒤의 기습은 막을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탈리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왕의 가장 충직해야 할 심복이 왕을 죽이려 한 거니까.
세이럼은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의 옛 주인을 향해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 또한 이들과 뜻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믿었던 가신들의 배신.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그간 자비를 베풀려던 탈리스도 이젠 한계를 넘어 버렸다.
“이 망할 놈들이……!”
탈리스의 두 팔이 불룩 솟아올랐다.
‘아이고.’
탈리스는 프레이야와 두 아이를 낳은 이후론 좀처럼 화를 낼 일이 없었다.
그때부터 성격이 유해진거라 해야 하나.
하지만 그가 이따금 참아 왔던 화를 폭발시킬 땐,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야 그는 한때 북방 최강의 남자.
단 두 주먹만으로 프레이야와 맞붙을 수 있었던 남자.
무투 8랭크의 괴물
무투왕 탈리스였으니까.
탈리스의 양손이 붉게 물들었다.
무투 랭크 보유자들만이 쓸 수 있다는 오러 피스트.
예리함은 오러 소드에 부족하지만, 파괴력만큼은 그 이상이라 해도 모자람 없었다.
“드디어 그 같잖은 위선을 그만두는군그래.”
“위선? 닥쳐라! 프란츠의 기사들이여! 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 당장 저 배신자 무리들을……!”
“지금이다!”
나단 공작의 외침을 시작으로 북방인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커헉!”
“끄악!”
프란츠 기사들 사이에 칼부림이 벌어졌다.
모두 프로스트 랜드로 변절한 이들이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기습에 탈리스를 따르던 기사들은 순식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미 프란츠 왕국 기사들 대부분이 변절해 버린 뒤였다.
“모두 국왕 전하를 지켜라!”
연합의 기사들은 저마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모두 자기네들 국왕만 지키려 달려들었을 뿐 프로스트 랜드의 배신에 맞서려는 이는 없었다.
그건 아이소테르도 마찬가지였다.
“…….”
빈트하겐은 이글렌의 옆을 지킨 채로 검을 뽑아 들었다.
연합이니 뭐니 해 가며 난리를 떨었지만 결국엔 남이다.
‘나라도 나서야 하나?’
하지만 지금의 난 나로선 수행원으로 나온 기사 하나 상대하는 게 고작인 수준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탈리스의 손속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빠져 있는 게 나았다.
놈들의 기습에 프란츠 쪽은 무투왕 탈리스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탈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화만 더 났을 뿐.
“죄송합니다! 전하!”
푸각!
변절한 프란츠의 기사들이 탈리스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화합의 섬에 수행원으로 따라온 그들 또한 상당한 랭크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사방에서 파고든 기습.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의 오러 소드들이었다.
하지만.
파캉!
“어엇……!”
날카로운 예기를 풀풀 풍기던 검은 탈리스의 몸 지척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그의 살갗에 닿은 채로 우뚝 멈춰 선 상태였다.
전성기 시절 그나마 카잔 제국과 대등하게 맞서던 왕국, 프란츠.
오로지 힘만을 숭배하는 북방인들의 정점에 선 자.
그게 탈리스다.
적어도 랭크 6은 되어 보이는 기사의 검격이었지만 분노한 탈리스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이런…….”
실패를 감지한 기사들이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기껏 배신해 놓고 한다는 게 이 정도인가!”
콰직!
무식하게 내려찍는 주먹 한 방.
워해머로 내려찍은 것마냥 일격에 녀석은 머리가 짓눌리며 즉사했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어딜!”
뒤늦게 놈들이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분노한 탈리스를 막을 없었다.
그가 권격을 내지를 때마다 놈들은 머리가 터져 나가며 숨이 끊어졌다.
카앙!
이를 막아선 건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심복이었던 프란츠의 기사단장 세이렘.
빈트하겐의 검마냥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는 오러 소드가 탈리스의 주먹을 짓눌렀다.
“자네가 어찌……!”
콰드득!
탈리스의 맨손이 그의 검을 붙잡았다.
산조차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어마어마한 검이었지만, 탈리스는 그저 맨손으로 이를 붙잡았다.
“으윽…….”
세이렘의 입가에선 침음이 흘러나왔다.
“어찌 자네가 날……!”
콰악!
그저 한 손으로 기사단장의 검을 막아 낸 채로, 탈리스의 반대쪽 손이 세이렘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째서……!”
“크으윽!”
숨 죽여 이를 지켜보던 연합의 수장들이 외쳤다.
“그래! 그걸세! 배신자 놈의 목을 콱 비틀어 버리게!”
‘…얄미운 놈들.’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연합의 수장들은 나서지도 않으면서 탈리스를 응원하는 척했다.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다. 탈리스의 입장에선.
“닥쳐라! 네놈들은 뭐 다를 거라 생각하나?!”
“아앗…….”
“연합이니 뭐니… 허울 좋은 말들뿐이지! 그녈 되살리는 데 단 한 번도 도움 준 적 없는 놈들!”
“타, 탈리스! 그건…….”
탈리스의 분노 가득한 모습에 나단 공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크큭! 이제 깨달은 건가? 연합이건 어디건 여기 당신 편은 없어. 모두 자기네들 생각만 하기 바쁜 놈들이지!”
“이 자식이……!”
분하지만 나단 공작의 말에 틀린 건 없다.
무투 랭크 8의 괴물.
공식적으론 현 대륙에서 오베론 다음가는 강자가 바로 탈리스다.
그런 그에게 프레이야까지 되돌아간다면, 연합의 균형이 깨지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여기 있는 연합의 수장들 중 모두 진심으로 탈리스를 위하는 이는 없었다.
빨리 그가 노쇠하여 수명이 다해 죽기만을 기다릴 뿐.
오베론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평화.
지금 이 모습이 거짓된 평화 아래 만들어진 연합의 실체다.
나단 공작은 분노로 날뛰는 탈리스를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
“우습지 않나? 탈리스? 무투왕이란 칭호까지 얻어 가며 살아온 인생.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는 게?”
그의 말에 탈리스의 두 눈이 점차 검붉은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곤 깨달았다.
어쩌면 나단 공작이 원하는 건 프란츠의 연합 탈퇴가 아닌.
무투왕 탈리스의 분노였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