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 그게 무슨 소린가!”
탈리스는 정곡을 찔린 듯 화들짝 놀랬다.
‘진짠가 보네.’
회담 내용까진 듣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프로스트 랜드의 주인이 프란츠의 주인한테 할 말은 그거 말곤 없을 테니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리나 할 거면 지금 당장 나가게!”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던가.
탈리스는 괜한 역정까지 내가며 날 내보내려 했다.
“목소리 좀 낮추시죠. 싸우려고 온 것도 아닌데.”
“으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탈리스의 고함을 듣고 호위 하나가 문 밖에서 물었다.
프란츠의 기사단장은 아니었다.
아마 그였다면 대뜸 문부터 열어젖히곤 상황 파악부터 했을 거다.
“…….”
난 조용히 탈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노기에 가득 차 있는 눈빛이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곤 입을 열었다.
“…괜찮네. 나쁜 꿈을 꿨을 뿐일세.”
“예. 전하. 혹여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네.”
탈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호위도 별 말 없이 되돌아갔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귀찮아질뻔했군요.”
“알면 이만 나가 보게. 자네랑 이 늦은 시간까지 할 얘긴 없으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만.”
“이익……! 글쎄 아니래도!”
“진짭니까? 그럼 아닌 걸로 알고 이만 가 봐도 되는 건가요?”
“…….”
탈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블루 드래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강인한 남자긴 했지만, 들키지 않고 거짓말을 칠 만큼 능글맞지는 못했다.
“…하아.”
이내 큰 한숨을 내쉬고 마는 탈리스.
그리곤 못 이기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하는 수 없군. 나단 공작과의 회담. 자네도 들었겠지?”
“…네.”
솔직히 듣진 못했지만 대강 뭔 내용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자가 내게 말하더군. 프레이야를 되살릴 방법이 새로 생겼다면서 말이야.”
“흠.”
알로 되돌아간 프레이야를 되돌리는 방법.
그건 프레이야가 잃은 마나량만큼 알에 담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블루 드래곤.
워낙에 가지고 있던 마나가 많다 보니 하루 이틀 마나를 주입한다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마나를 퍼붓는다 해도 문제다.
마나란 건 한곳에 계속 머무르지 않으니까.
‘그러니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 필요했던 거지.’
간단히 말하면 충전지 같은 거다.
레서 드래곤의 마핵으로 마나를 붙잡아 놓고,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알에 마나를 공급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프레이야를 되살리는 건 이미 북방인들이 모두 달려들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하고 있기야 하지. 이십 년째 말이야.”
“으음…….”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이 소모되는 세월.
북방 최강의 남자라 해도 오랜 세월 앞엔 약해져 갈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제 늙었네. 지금처럼 프레이야를 되살리려 해도, 그게 성공할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
“연합을 탓하기도 이젠 지쳤네. 연합이니 뭐니 해도 어쨌건 그들에겐 남일 테니까.”
탈리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전제 우승 상품으로 나온 레서 드래곤의 마핵.
프레이야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재료인 만큼, 북방인들은 연합에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마핵을 줄 수 없겠냐고. 원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하지만 연합은 이를 거절하고 보란 듯 대전제 우승 상품으로 내걸었다.
프레이야가 되살아났다간 연합이 가진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는 거니까.
정말로 원한다면 체면 다 구겨 가며 대전제에 기사단장이라도 보내 봐라.
프란츠 입장에선 모욕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만약 프란츠가 진짜로 기사단장을 보냈다면… 다른 나라도 기사단장을 보냈겠지.’
때문에 프로스트 랜드에서 레니 베나트가 출전한 거다.
기사단장까진 아니어도 우승할 만한 인재로.
하지만 그가 정말로 우승을 했어도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줬을까?
‘아니지.’
소설을 본 나는 안다.
연합이란 치졸한 놈들 투성이니까.
갖은 이유를 대 가며 우승 상품을 내어주지 않았을 거다.
더한 경우엔 프로스트 랜드로 되돌아가는 일행을 습격까지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북방인들은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얻지 못한다.
대신 다른 마핵들을 그러모아 겨우 구색만 맞췄을 뿐.
레서 드래곤이 아닌 다른 몬스터의 마핵은 마나의 결이 다르다.
아무리 해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
소설에서도 수년이 지난 미래 시점이 돼서야 겨우 성공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프레이야를 되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카잔 라크레시아의 등장.
결국 그의 등장으로 프레이야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히려 참혹한 결과만 남길 뿐.
그가 프레이야의 알을 건드린다면 무슨 대참사가 일어날지 난 안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프란츠의 국왕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푸흐흐. 아무래도 내가 늙긴 했나 보군. 카잔 황제의 아들이란 놈이 진짜 프레이야를 되살릴 수 있을지, 아님 그저 연합을 해체시키려는 거짓말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아뇨. 그가 하는 말은 사실일 겁니다.”
“뭐,뭐라?”
실제로도 그랬다.
카잔 황제마냥 고대인의 유물을 자유자재로 쓰는 게 라크레시아였으니까.
그의 손에 프레이야도 되살아나긴 했다.
북부를 지키는 블루 드래곤이 아닌, 라크레시아의 충실한 심복으로.
“거짓말 하지 말게! 북방인 모두가 달려들어도 불가능했던 걸 그가 혼자 해내다니!”
“하지만 진짠걸요.”
“지금 이 늙은일 놀리기라도 하려는 겐가!”
똑똑.
“전하?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 없다 하지 않았느냐!”
“아앗… 아, 알겠습니다.”
탈리스는 애꿎은 호위 기사한테 역정을 냈다.
호위기사는 탈리스의 역정에 문 한 번 못 열어 보고 되돌아갔다.
순진하다 해야 하나 멍청하다 해야 하나.
“…….”
탈리스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한 번 질끈 감곤 다시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아니. 애초에 자네가 그걸 어찌 알지?”
‘소설에서 봐서요.’
라고는 차마 말 못하니 대충 얼버무렸다.
“책에서 봤습니다. 고대인의 유물을 이용한다면, 마나를 잃고 알이 되어 버린 드래곤조차 되살릴 수 있다고.”
“설마 금서라도 읽은 겐가?”
“뭐 그런 거죠.”
고대인의 유물에 대한 책은 왕국 연합법상 금서에 해당됐다.
소설이건 금서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쇼. 알이 돼 버린 드래곤을 강제로 되돌린다. 그것만 놓고 보면 상당히 수상쩍지 않습니까?”
“그야…….”
“아무리 고대인의 유물이라 해도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필요한 건 당연할 터. 그런 수고를 들이면서 그냥 드래곤을 되살릴 이유는 없겠죠.”
“그, 그렇다면....”
“만약 라크레시아가 프레이야를 되살린다면.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블루 드래곤이 아닐 겁니다. 라크레시아의 명에 복종하는 마물에 불과하겠죠.”
“그런… 하지만 꼭 그럴 거란 보장은…….”
“드래곤을 되살리는 방법이 적혀 있던 책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
“[드래곤 길들이기]라는 제목이더군요.”
“드래곤을 길들여? 하! 웃기는군!”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경한 제목이지만… 고대인이 쓴 책이니 불가능 할 것도 없죠.”
물론 드래곤 길들이기 같은 책은 없다.
적당히 지어낸 거긴 했지만 탈리스에겐 꽤나 충격으로 다가올 거다.
“으음…….”
탈리스는 침음을 흘렸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나단 공작의 제안에 찬성할 게 아니라 적으로 간주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 난 절박하네. 자네 같은 자가 침소에 들락날락거리며 하는 얘길 들어줄 정도로.”
“저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는 거구요. 절박함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
탈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푸하하!”
“…응?”
그러다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던 그는 메마른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푸흐흐… 나도 참 늙었구만.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한테 동정이나 받다니.”
“…그렇게 어리진 않습니다만.”
새파랗게 어리다니.
살짝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지만 넘어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전성기 시절 블루 드래곤과 한판 붙기까지 했던 녀석이니까.
“아아. 기분 나빴다면 내 사과하지.”
그리곤 그는 결심이 선 듯 말했다.
“내 방금 자네와 대화로 결심이 섰네.”
“…어느 쪽으로죠?”
“그거야 내일 날이 밝으면 알게 되겠지.”
두루뭉술한 그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날 놀리려는 듯한 그의 말에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정말로 그가 연합을 탈퇴하고 라크레시아의 편에 들기로 마음먹었다면 저런 말은 안 했을 테니까.
“그럼. 이만 나가 보게나.”
“…예. 내일 다시 뵙죠.”
푸근하면서도 씁쓸함이 느껴지는 탈리스의 미소.
난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 * *
다음 날.
화합의 섬에 두 번째 날이 밝았다.
“크흠!”
다들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피스트 왕국의 자리는 비어 있는 채였다.
아마 오늘 회담 결과에 따라 조사단이 꾸려질 거다.
피스트 왕국으로 향하는 조사단. 그리고 카잔 제국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조사단까지.
조사 결과에 따라 앞으로 대륙의 미래가 결정 날 것이다.
대전쟁.
소설에서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기였지만, 어찌 보면 오히려 좋았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뒤라면 제국의 힘이 더 강해졌을 테니까.
매도 미리 맞는 게 나은 법이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 제대로 출병을 할지 의문이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
난 아무 말 없이 이글렌의 왼편에 앉은 탈리스 국왕을 바라봤다.
밤새 고민이 깊었는지 그의 눈가엔 그늘이 잔뜩 져 있었다.
“그럼 두 번째 연합 회담을 시작…….”
“잠깐.”
신성 왕국 대표가 회담을 시작하려는데 한 남자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프로스트 랜드의 대표.
나단 공작이었다.
“회담 시작에 앞서. 우리 프로스트 랜드와 프란츠 왕국에선 전할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나단 공작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운 채 탈리스를 흘긋 쳐다봤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아니면 제가 먼저 말할까요?”
“…….”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된 그때.
탈리스 국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프란츠 왕국의 주인이자. 탈리스 프란츠 1세는…….”
‘제발. 멍청한 소린 하지 말길.’
“…왕국 연합에서 탈퇴하는 일은 없을 거라 단언하겠소.”
‘역시.’
탈리스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었기에 연합의 수장들은 고갤 갸웃했다.
그리곤 이내 속뜻을 파악하곤 프로스트 랜드의 주인, 나단 공작을 노려봤다.
“나단 공작……!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하. 역시.”
연합의 탈퇴를 종용했다는 건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그 상대가 아무리 한 왕국의 주인이라 해도.
이제 나단은 끝이다.
연합의 기사단장이 모두 자리 한 이상.
아무리 프로스트 랜드의 주인이라 해도 쉽게 빠져나갈 순 없을 터.
“이건 대역죄요! 연합을 탈퇴하려 한 것도 모자라, 다른 이에게까지 탈퇴를 종용하다니!”
화합의 섬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회담 장소엔 전운이 흘렀다.
이를 나단 공작 개인의 일탈이라 봐야 할지, 아님 프로스트 랜드 전체를 적국으로 간주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뭣들 하는 게요! 당장 저 역적을 구금…….”
“어딜!”
신성 왕국의 불호령에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모두 검술 랭크 7의 괴물들.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나단 공작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