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대전제 당시 사라졌던 기사.
레니 베나트.
프로스트 랜드는 아이소테르에서 워낙 먼 곳에 떨어진 땅이라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셸랑 데카드, 그러니까 크로드 그 녀석한테 당해 버린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북방인 특유의 조금은 살집이 있는 듯한 몸집.
마흔줄은 된 듯한 거칠게 생긴 얼굴까지.
대전제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기사, 레니 베나트가 분명했다.
그와 검을 섞은 적은 없었지만 워낙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터라 먼 발치에서 유심히 지켜봤던 녀석이다.
“아. 오랜만이군. 아이소테르의 젊은 기사여.”
그는 날 보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인사말에 다른 기사들의 경계심도 다소 누그러졌다.
“으음… 오랜만이군.”
겉보기엔 아무런 이상 없는 대화가 오갔다.
지난 대전제 우승자와 우승 후보 간의 인사였으니까.
“화합의 섬엔… 수행원으로 온 건가?”
“그렇지. 아이소테르에서 꽤나 소란이 있던 듯하던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돼서 참 반갑군.”
“뭐… 그렇지.”
“그나저나.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우리 프로스트 랜드 사람들한테?”
“아.”
베나트는 내가 선 땅을 흘긋 바라봤다.
엄밀히 따지면 타국의 영토를 무단 침범한 거다 보니 눈치를 주는 듯했다.
“아니. 그냥…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을 다시 보니 놀라서 말이야.”
“호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런 일?”
베나트는 생판 남 이야길 듣는 것마냥 굴었다.
“난 그쪽 얘길 하는건데?”
“나 말인가?”
“대전제 준결승. 거기서 갑자기 사라졌잖아?”
내 말에 다소 누그러졌던 기사들의 눈빛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특히나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들 눈빛에선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 그거 말이군. 본국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주최 측엔 알리지도 못하고 돌아갔지 뭔가.”
“…그래?”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게다가 우승 상품은 다름 아닌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었다.
지금 녀석들 입장에선 반드시 필요한 재료 아이템이다.
랭크 6의 레니 베나트가 아닌, 프로스트 랜드의 기사단장을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얻어 내야 할 재료.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를 되돌릴 재료였지.’
그나마 타국의 눈치가 보여 기사단장이 아닌 레니 베나트가 나온 거다.
기사단장을 보낼 순 없으니, 랭크 6의 차기 기사단장 급으로 상당히 강한 기사를 보내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 본국에 일이 생겨서 되돌아갔다고?
자기네들의 신이자 주인을 되살릴 때 필요한 아이템을 내버려두고?
“…꽤나 급한 일이었나 보군.”
“…뭐 그렇지.”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프로스트 랜드에서 온 기사들의 눈빛도 여전히 심상치 않았다.
“…이거 실례했군. 화합의 섬에서 아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라서 말이야.”
“그래. 그럼. 들어가라구.”
그에게 더 캐물어 봐야 좋을 건 없었기에 이쯤에서 물러났다.
여전히 싸늘한 프로스트 랜드 기사들의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자릴 떴다.
* * *
“무슨 일이길래 얼굴이 그리 심각해요?”
“…지난 대전제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가 사라졌던 거, 기억하십니까?”
“으음. 그랬었죠.”
당시 공주였던 이글렌도 사절단 신분으로 대전제에 참석했던 터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몰라서. 프로스트 랜드의 사절단도 별 말 없이 되돌아가 버렸거든요.”
“음…….”
“게다가… 대전제 이후엔 바로 ‘그 일’이 있었던지라.”
“아.”
이글렌의 낯빛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대전제 이후론 갈렌 그 미친 놈 때문에 정신 없었으니까.
먼 타지의 기사 하나쯤 사라진 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나저나… 아까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네? 아뇨.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에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슬슬 자러 가야겠네요.”
“아. 그렇군요.”
“잘 자요. 이안.”
따뜻한 말 한마디였지만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퉁명스러웠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뭐 오랜만에 멀리 나와서 피곤한가 보지.’
이글렌은 푹신한 침대에서 잘 테니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다.
딱딱한 모포나 깔고 자야할 내 처지나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에휴.”
“이안 백작.”
“아. 칼로스.”
이글렌을 돌려 보내자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 칼로스가 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여왕과는 영 껄끄러운지 이글렌과는 거릴 두고 있었다.
그래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가 맡은 호위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듯했다.
“방금 프로스트 랜드 쪽에 가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직은 없지.”
“아직이라.”
칼로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프로스트 랜드 쪽을 노려봤다.
“당신이 만약 북방인이라면 뭘 것 같나? 프레이야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보다 중요한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칼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북방인들에게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는 그런 존재였다.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반드시 되살려 내야 할 존재.
그걸 버리고 본국으로 되돌아갔다는 건 단 두가지 의미밖에 없다.
레니 베나트 저자가 미쳐 버렸다거나.
‘되살릴 다른 길이 생겼다는건데.’
“최악이군.”
“으음…….”
소설의 내용을 아는 터라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소설의 극후반부에서나 등장해야 할 대참사의 시작.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의 왕국 연합 탈퇴.
라크레시아도 돌아온 마당에 불가능할 것도 없다.
둘의 탈퇴를 종용한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원래 시점보다 한참이나 먼저 봉인에서 깨어났으니, 두 왕국의 탈퇴가 앞당겨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되는 왕국이 연합을 탈퇴하는 건 나도 반대다.
최악보단 차악이라고.
아무리 왕국 연합이 개차반이라 해도 2차 대전쟁으로 이어지는 것보단 나으니까.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내가 상상하는 그게 맞는지부터 확인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칼로스.”
“…뭐지.”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 솔직히 나한테 미안한 감정도 꽤 많을텐데.”
“…….”
솔직히 이놈 때문에 턱뼈가 부서질 뻔했던 거 생각하면 몇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다.
때려 봐야 내 손만 아프니 못하는 거지만.
“싫어?”
“부탁이 뭔지 말부터 해라.”
“별거 아니야. 프란츠 왕국에 기사단장. 그 녀석이랑은 잘 아는 사이지?”
“뭐… 그렇긴 하다만.”
내가 알기론 둘은 서로 검도 섞어 보고 젊었을 땐 술도 같이 먹고 그랬던 사이다.
타국의 기사단장이란 자리 때문에 조금 사이가 멀어지긴 했지만.
“그럼 잠깐 그 녀석 시선 좀 끌어 줄 수 있나?”
“…무슨 짓을 하려는거지?”
“뭐긴. 지금 상황이 최악의 상황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 보려는 거지.”
“…네 녀석 설마?”
칼로스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기사단장들이 맡은 임무는 각 왕국의 국왕을 지키는 것.
그런 기사단장의 시선을 딴 데 돌려 달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오늘 밤. 프란츠의 왕을 만나러 갈 거야.”
물론 비밀스럽게 말이지.
* * *
“전하.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
프란츠의 현 국왕.
탈리스는 한 남자의 제안에 침음을 흘렸다.
이미 예순을 넘어 일흔이 가까워진 나이.
쇄약해질대로 쇄약해진 그는 남자의 제안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반대로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으음…….”
탈리스와 독대를 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프로스트 랜드의 주인.
나단 공작.
북방인을 다스릴 수 있는 건 오직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뿐이라며 분리 독립한 자들의 수장이었다.
둘 모두 혹독한 북방에서 구른 터라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했다.
하지만 탈리스는 점점 시들어 가고, 나단은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럼. 내일 회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
“…알겠다.”
나단은 그렇게 탈리스만을 내버려두곤 자릴 떴다.
나단 공작과 탈리스 국왕 둘 모두 호위를 물린 채 가진 은밀한 회담.
거기서 나단은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왕국 연합의 탈퇴.
이는 곧 또다시 대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연합법상 연합의 탈퇴는 곧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항목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프로스트 랜드 홀로가 아닌, 프란츠 왕국까지 가세한 연합의 탈퇴.
탈리스의 입장에선 고려해 볼 만한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제안의 대가가 너무나도 달콤했다.
“프레이야…….”
탈리스는 옛 생각에 눈을 감았다.
한때 북방에서 최고로 강인한 남자라 불렸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
나단 공작의 제안이었다.
프로스트 랜드와 함께 연합을 탈퇴해 주기만 한다면, 프레이야를 되살려 주겠다는 것.
‘그게 가능할까?’
대륙 전역의 마법사들을 불러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고대인의 유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그라면?
‘얀 공작.’
처음 나단이 얀 공작의 이름을 꺼냈을 땐 탈리스도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카잔 제국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로 되돌아가 버린 프레이야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탈리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 대륙 전역을 적으로 되돌린다 해도.
“…….”
탈리스의 눈앞에 프레이야와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프란츠는 사실 군소 귀족들이 모인 야만인들의 땅에 불과했다.
탈리스도 그런 북방인들 중 하나였다.
주먹 힘 하나만큼은 어마무시하게 강하긴 했지만, 그러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를 만나고, 군소 귀족들을 규합해 프란츠 왕국을 건국했다.
북방인들에겐 사실상 신이나 다름없는 블루 드래곤과 그녀의 반려.
그런 둘의 통치 아래 야만인에 가까웠던 북방인들도 하나된 왕국의 이름 아래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프레이야가 죽기 전까진.
“…하아.”
탈리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야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갈라진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를 다시금 규합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리고 그런 정치적인 이유 말고도 탈리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극히 사적인 이유 하나.
“보고 싶구려, 프레이야.”
대전쟁 이후 20년이 지났음에도 새로운 짝 하나 없이 오로지 프레이야만을 바라본게 탈리스다.
그가 얼마나 프레이야를 끔찍이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탈리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나단 공작과 만나는 터라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진 출입을 금한다 했을 텐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설마 나단 공작이 내 시선을 돌린 틈에 개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들어오거라.”
“예입.”
그때 문이 열렸다.
하지만 열린건 탈리스의 침소 문이 아니라 옆에 있던 창문이었다.
* * *
“…웃차!”
“웨, 웬 놈이냐!”
“어어. 조용하세요. 몰래 온 거니깐.”
“…….”
탈리스는 날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장 하나 없이 맨몸으로 온 모습에 호위를 부르진 않았다.
일흔에 가까운 백발이 형형한 노인.
하지만 아마 이 노인네랑 맨손으로 싸우면 내가 질 거다.
터프하기론 프란츠 왕국 기사단장보다 더 한 남자니까.
‘그러니 프레이야가 반하지.’
소설 속 회상씬에서 둘이 꽁냥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터프하다고 탈리스가 집채만 한 용이랑 사귄 건 아니다.
인간 형태로 만나긴 했으니.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탈리스 전하… 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네는… 이안 백작이로군.”
다행히 낮에 만났던 터라 내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다.
칼로스가 시간을 벌어 주곤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진짜 연합 탈퇴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