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라크레시아와 만났었던 그날을 하나씩 증언했다.
아도르네이 후작령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져 잠시 국경선을 넘었다는 것부터.
만들어진 블랭크에 의해 던전 마스터가 되어 버린 베닐의 이야기까지.
거기에 미리 준비해 둔 아티팩트를 통해 그날의 상황을 영상으로 보여 줬다.
자잘한 대화는 입 모양을 흐릿하게 만들어 대화 내용까지 유추는 불가능했다.
“저, 저건……!”
던전 마스터 베닐 노먼.
그의 모습을 본 국왕들이 경악했다.
왼손에 룬 문양 없이 멀쩡한 모습을 한 인간.
이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일국의 왕쯤 되면 아는 정보였다.
만들어진 블랭크.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단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오베론에 버금가는 랭크 보유자거나, 고대인의 유물을 사용했다거나, 뭐가 됐건 범상치 않은 놈이란 소리였다.
“이안 백작, 다시 한번 얀 공작이란 자의 얼굴을 보여 주시오.”
“예입.”
난 마법 수정구를 손에 든 채로 얀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은발을 한 얀 공작의 모습이 투영됐다.
“저자가 카잔 황제의 아들, 카잔 라크레시아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어…….”
얀 공작의 얼굴을 본 이들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내비췄다.
누군 반신반의했고, 누군 두려움에 몸을 옅게 떨었다.
“얼굴을 보면 닮은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카잔 황제가 은발은 아니었잖소?”
“저 소름 끼치는 두 눈을 보시오! 카잔 제국의 그것이 떠오르는 눈 아니오!”
“으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 카잔 황제의 아들은 죽지 않았소? 대전쟁 당시에 피스트 왕국의 주인께서 처치했다고 알려져 있을 텐데?”
“그렇죠.”
왕들의 이목이 현재 공석인 피스트 국왕의 자리에 쏠렸다.
그렇담 내가 거짓말을 했다거나, 피스트의 왕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이건 꽤나 심각한 문제다.
현 피스트의 국왕 페이라는 카잔 황제의 일가족을 처치했다는 공으로 왕위에 오른 거니까.
당시 피스트의 후계자가 전쟁 통에 죽는 바람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 참. 공석이니 추궁을 할 수도 없을 노릇이고.”
“만에 하나 그가 정말로 거짓으로 공을 세운 거라면…….”
그 말에 다들 침통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어쩌면 피스트의 국왕이 제국과 내통 중이었단 뜻이 될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카잔 제국의 핏줄을 빼돌리고 죽인 것처럼 꾸몄다는 건데.
‘그건 아니지.’
소설을 읽은 난 안다.
페이라에겐 그 정도의 지능은 없다.
제국의 내성에 있던 모든 아이들을 죽이곤 그중에 라크레시아가 있을 거라 지레짐작한 것뿐.
라크레시아가 살 수 있던 건 순전히 카잔 황제 덕분이었다.
훗날을 위해 그를 고대인의 유물로 봉인한 채 숨긴 거니까.
“그럼 한시라도 빨리 피스트를 연합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게 무슨 소리요! 연합의 일원을 연합의 적이라 규정한다니! 아직 확인된 게 없지 않소!”
“그렇담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겠다는 거요? 카잔 제국의 황제가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뜻이 아니잖소!”
원탁 주위로 연합의 일원들이 목소릴 높혔다.
화합의 섬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섬은 벌써부터 서로 싸우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리 싸우기만 해서 무엇하겠소! 창조신께서 이를 보시고 어찌 생각하실런지!”
“하! 창조신? 전 그런 신은 섬긴 적 없소만?”
“…아! 깜빡했구려! 당신네들이 섬기는 신은 옛적에 죽었다는걸!”
“뭐요!”
신성왕국의 발언에 프로스트 랜드와 프란츠가 역정을 냈다.
둘로 갈라진 왕국치곤 합이 잘 맞는달까.
둘은 신성 왕국의 대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럴 만하지.’
애초에 대전쟁은 카잔 제국이 시작한 전쟁이 아니다.
당시 하나로 합쳐진 왕국이었던 프란츠 왕국.
그들은 같은 여왕을 섬기고 있었다.
그녀는 프란츠 왕국의 여왕이면서 신이었다.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
그녀가 괴한의 습격에 의해 자그마한 알이 돼 버린 순간부터 시작됐다.
드래곤이라 해서 무적은 아니다.
오히려 드래곤과 오베론이 싸우면 오베론이 이긴다고 해야 하나.
오베론을 제외하면 대륙의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길 만큼 강하긴 했지만.
마침 수면기에 습격당한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는 괴한의 습격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두 뿔이 잘려 버리는 크나큰 치명상.
죽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회복을 위해 알 형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프란츠 입장에선 그들이 섬기는 신이 죽어 버린거나 다름없는 상황.
눈깔이 뒤집히는 게 당연했다.
당시 습격의 주체가 누군지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던 신성 왕국.
거기에 카잔 황제의 계략까지 더해지자 신성 왕국은 거의 범인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그러면서 시작된 게 대륙 전쟁.
후에 오베론의 등장으로 사건의 전말이 까발려지지만 않았더라면?
둘 중 하나는 멸망해야 끝났을 전쟁이었다.
어찌어찌 제국도 멸망하고 잘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지금도 프레이야는 자그마한 알의 형태로 프로스트 랜드에서 모셔지고 있었다.
프란츠가 둘로 나뉜 것도 이 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섬겨야 할 왕이 알이 돼 버린 프레이야인지, 아니면 여왕의 반려로 현 프란츠 국왕 자릴 꿰찬 남자인지.
“이 망할 사기꾼 새끼들……!”
“사기꾼은 네놈들이지……!”
오베론이 만들고 간 거짓된 평화.
라크레시아의 등장 하나만으로 연합에 크나큰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으읏…….”
이글렌의 역정에 소란스러웠던 화합의 섬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저들도 추한 모습을 보였던 건 아는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혼란스러우실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끼리 이렇게 싸워서 해결될 건 없어요.”
“…그럼 아이소테르의 주인께선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이글렌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 입을 열었다.
“우선 피스트의 주인이 정말로 카잔 제국과 내통을 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인지부터 확인해 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조사에 순순히 응해 줄까요? 실수건 내통이건, 자기 자리에 위협이 될 건 똑같을 텐데.”
제법 예리한 질문이었다.
페이라가 거짓 공을 세워 왕위에 오른 게 까발려진다면 꽤나 골치 아파질 테니까.
“만약 단순한 실수였다면, 그 사실이 외부로 퍼져 나가지 않게 보장해 줘야겠죠. 그럼 피스트의 국왕도 순순히 협력해 줄 겁니다. 그럼에도 조사에 불응한다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겠죠.”
최악의 상황.
페이라가 정말로 제국과 내통했다는 걸 의미했다.
내가 알기론 아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페이라도 아마 그 정도면 조사에 순순히 응해 줄 거다.
체면 좀 깎는 게 왕국 연합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리고 카잔 제국에 조사단을 파견해야 합니다. 만약 얀 공작이라는 자가 정말로 카잔 황제의 아들이라면… 제거해야겠지요.”
“으음…….”
제거라는 말에 왕들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전쟁.
카잔 제국과 또다시 전쟁을 치러야 한단 말에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나 위셀란은 끔찍한 옛 기억이 떠오르는 듯 낯빛이 창백해졌다.
다른 왕국들에 비해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왕국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심란하실 텐데.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일 자세한 일정을 세워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으음. 조, 좋지요.”
이글렌의 말에 나머지 다섯 국왕은 고갤 끄덕였다.
여전히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는 신성 왕국을 향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흥, 야만인들.”
“제 손으론 아무것도 못하는 등신 같은 놈.”
서로 욕지거릴 작게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복잡한 심경을 그러앉은 채로 첫 번째 연합 회의는 끝이 났다.
* * *
“스읍.”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상쾌한 공기가 전신에 퍼지는 듯 개운했다.
“확실히 뭐가 있긴 하네.”
화합의 섬 공기는 다른 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맑았다.
대륙 한 가운데 고인 호수 위에 자리 잡은 섬.
그닥 상쾌하긴 어려운 환경이다.
‘창조신이 만든 섬이라 그런가?’
이 소설 속 창조신을 떠올려 보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안.”
“아, 여왕님.”
이글렌은 단출한 차림새로 갈아입은 뒤였다.
뒤에 보이는 숙소에서 쉬다 나온 듯했다.
화합의 섬은 비워져 있긴 했지만 각국의 수장들이 머무를 숙소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연합의 일원들은 간단한 짐만 꾸려 숙소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됐다.
건물이니 따로 관리가 필요할 법도 하지만, 화합의 섬에 있는 건물들은 신기하게도 관리 하나 없이 매번 깔끔함을 유지했다.
창조신이란 녀석이 지어서 그런가.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건물이라니.
그야말로 ‘완벽’한 숙소라 해야 하지 싶다.
짹짹.
자그마한 분홍 빛 새 한 마리가 이글렌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핫.”
이글렌이 손가락을 내밀자 새 한 마리가 살포시 그 위로 앉았다.
엄지 손가락으로 새의 턱끝을 매만지자, 녀석은 기분 좋은 듯 낮게 그르렁댔다.
“아까 멋지던데요. 그만하세요! 라고 하던 거.”
“노, 놀리지 마세요. 전 진지했다구요.”
“놀리긴요. 흐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이글렌을 보니 등골이 간질거렸다.
“…숙소는 어떻습니까?”
괜히 민망해져 황급히 말머릴 돌렸다.
“음… 뭐 다들 잘 준비해 주셔서 원래 자던 곳이랑 다를 게 없죠.”
“음… 그렇군요.”
하기사 여왕님이 마실 나오셨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난 천막 깔고 자야 되던데.’
아직 정식 혼례를 치룬 건 아닌지라 여왕의 반려로 이 자리에 함께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라크레시아를 봤단 증언이 필요해서 온 것뿐.
덕분에 나랑 같이 온 프리아나나 이슬린은 지금쯤 천막 설치가 한창일 거다.
화합의 섬엔 다른 숙소 건물도 지어져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빙 둘러 지어진 터라, 아이소테르의 숙소 옆엔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의 숙소였다.
다들 짐 정리가 한창인지 숙소 밖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응?”
프란츠 왕국와 프로스트 랜드의 숙소 앞.
거기서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임페라 백작령에선 다소 거리가 떨어진지라 거의 왕래가 없었던 이들이다.
게다가 저들 모두 국왕의 수행원으로서 함께한 이들.
머나먼 타국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을 리는 없었다.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분명히 보긴 했는데.
누구더라…….
“어때요? 이안. 짐 정리도 끝난 것 같은데 한 번 보러…….”
“…아!”
“…네?”
이글렌이 뭔가 한창 말하던 중이긴 했지만, 낯익은 그 남자를 떠올리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분명 본 남자다.
수개월 전.
대전제가 열린 위셀란에서.
“자, 잠시 만요. 여왕님.”
“으음. 그, 그래요.”
난 이글렌을 내버려두고 그에게로 향했다.
엄밀히 놓고 보면 거긴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의 왕국령이다.
떄문에 가급적 서로의 왕국령을 침범하지 않는 게 도리.
하지만 지금 난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누구냐!”
갑작스레 성큼성큼 다가가자 두 왕국의 기사들이 날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들 회의 장소에 있었던 터라 날 알아보곤 물었다.
“…이안 백작? 전하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아니.”
지금 내가 볼일 있는 건 프란츠나 프로스트 랜드의 왕이 아니다.
단 한 남자.
다부진 체격에 프로스트 랜드의 수행원으로 따라 나온 기사.
“…레니 베나트?”
대전제 준결승전에서 사라졌던 검술 랭크 6의 어마어마한 경지의 기사.
레니 베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