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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15화 (115/222)

115화

아도르네이 후작령에서 시작된 한 마디 발언.

[카잔의 황제가 되돌아왔다.]

당시 자리에 있던 수많은 이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아무리 아도르네이 후작을 따르는 기사들이라 해도 이들 모두의 입단속을 할 순 없는 법.

이내 카잔 황제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지자, 그에 대한 왕국 연합의 조치도 취해졌다.

아도르네이 후작령의 던전은 후작이 알아서 처리하라 맡겼다.

백작령으로 돌아와 며칠 쉬던 내게 서신 한 장이 도착했다.

“대륙 회의?”

“네. 여왕님께서 백작님도 참석해 주시길 바라시더군요.”

이슬린은 소테라에서 온 서신을 내게 건넸다.

서신은 당시 국경선에서 있던 일을 증언해 줄 겸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긴. 소문도 소문 나름이니 확실히 해야 하니까.’

카잔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굉장히 일이 복잡해질 테니까.

당장 그가 살아 돌아온 건지는 둘째 치고.

카잔 황제의 모든 혈족을 처형 시킨 자기네들 입장이 우스워지는 꼴이니까.

“그나저나… 정말로 그를 만나신 겁니까? 카잔 황제의 아들을?”

프리아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왕국의 왕들이 역겨운 놈들 투성이긴 했다.

당장 에런골드나 갈렌만 해도 제정신 아닌 놈들이었으니까.

다른 왕국이라 해서 그리 형편이 다른 건 아니다만, 카잔 제국에 비하면 선녀다.

왕들의 추악한 민낯을 봐 온 프리아나도 카잔 황제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래. 봤지.”

녀석의 가늠조차 가지 않던 힘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저 손가락 한 번 튕긴 것만으로 주변을 날려 버릴 만한 강력한 힘.

거기에 블랭크를 만들고, 그를 던전화시켜 버렸던 것까지.

이게 가능한건 현 대륙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오베론 스테이라.

하지만 내가 만난 녀석은 오베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잠에서 깨어난 카잔 황제의 아들, 카잔 라크레시아뿐이다.

“어, 어떤 자였습니까? 악마와 계약해 뿔이 달렸을 거라던데…….”

“뭐? 프흐흐…….”

프리아나의 어이없는 말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악마와 계약했을 거라니.

세간에 떠도는 소문답다고나 할까.

하지만 녀석이 진짜 카잔 라크레시아라면, 악마 따윈 우스울 수준인 녀석들이다.

마계에 숨어 사는 놈들도 기껏해야 랭크 7 수준이면 상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랭크 7도 어마 무시한 놈들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랭크 8, 혹은 그 너머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자들이다.

오베론이면 악마쯤이야 벌레 밟듯이 터뜨릴 놈이니까.

그에 준하는 카잔 라크레시아라면…….

“평범하게 생겼더군. 한 번 보여 줄까?”

“오… 그래 주신다면야…….”

난 마법 수정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수정구 속에서 라크레시아의 모습이 투영됐다.

소리까지 나진 않았지만 그때의 모습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프리아나는 심각한 얼굴로 수정구 안을 들여다봤다.

“이자가… 얀 공작이란 이름을 쓰던…….”

“…카잔 라크레시아지.”

“으음,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군요.”

은빛으로 하얗게 센 라크레시아의 머릿결이 눈에 띄었다.

이슬린도 신기한 듯 수정구 속을 흘긋 바라보고 있었다.

“…한 여자를 원한다?”

“어?”

프리아나가 라크레시아의 입 모양을 보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읽어 냈다.

가급적 대화 내용까지 들키고 싶진 않아 소리가 안 나는 수정구를 썼다.

연합 회의 때도 이 수정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입 모양은 가려야 하나?

“그게 보여?”

“네. 백작님. 이건 또 무슨 뜻이죠?”

“그건… 나도 몰라.”

“흠.”

라크레시아가 말한 ‘한 여자’를 원한다.

농담 따먹기에 비슷한 대화가 오간 터라 잠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레드 핀이랑 블루 핀 중에 뭐가 좋냐 묻질 않나.

하지만 원하는 게 뭐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

‘한 여자를 원한다.’

그게 뭘까.

‘설마 이글렌?’

그가 노릴 만한 놈들 중에 여자는 이글렌 말곤 없을 것 같았다.

그야 현 왕국 연합에 여왕은 이글렌 혼자였으니까.

프란츠 왕국이랑 프로스트 랜드의 ‘여왕’은 지금 좀 상태가 애매하니까.

“…일단 수정구는 손을 좀 봐야겠네.”

인상을 팍 쓰고 수정구를 노려봤다.

그러자 수정구에 투영된 라크레시아의 입 모양이 흐릿하게 바뀌었다.

어차피 내 기억을 토대로 투영되는 터라 집중만 잘 하면 이 정도는 가능했다.

“자세한 건… 연합 회의 장소에 가서 생각해 봐야지.”

“음… 역시 그렇군요.”

연합의 왕 놈들이 제대로 도움이 되기나 싶을까 했지만…….

나름 한 왕국의 대가리란 놈들인데 뭐라도 도움 되긴 하겠지.

* * *

연합 회의 장소로 가기 전, 소테라에 들러 이글렌 여왕의 일행과 합류했다.

“오셨습니까, 이안 백작님.”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

그 주위로 여왕의 적갑 기사단들이 줄지어 있었다.

갈렌을 따른 이들은 모두 쳐 냈다곤 했지만 왠지 모를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 중엔 제일 껄끄러운 녀석이 하나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안 백작.”

“칼로스.”

빈트하겐 칼로스.

아이소테르에서 제일 강한 남자.

굵게 자란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다.

“다시 복직이라도 하려는 건가?”

“…화합의 섬까지 호위만 맡았을 뿐이다.”

“그래? 그것 참 아쉽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왕국 연합의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화합의 섬.

혹여나 불상사라도 발생했다간 어마어마한 대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

때문에 왕국 제일의 검인 그도 호위에 나서는 듯했다.

아주 나쁜 놈은 아니니 호위로 두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거다.

“이안. 왔군요.”

한 떨기 연꽃처럼 생긴 마차.

그 안에서 이글렌 여왕이 문을 열었다.

“또 뵙는군요, 여왕님.”

“후후, 그러게요.”

이글렌은 날 보곤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엔 그늘이 섞여 있었다.

이글렌과 만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주인공 디아의 졸업전을 관람하러 만났던 그날.

그때까지만 해도 꽤나 표정이 밝았었는데, 지금은 꽤나 수척해진 채 억지로 미소 짓는 느낌이 강했다.

“타도될까요?”

“그럼요.”

이글렌이 내민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전 뒤따라 이동하겠습니다.”

“그래.”

호위 겸 따라온 프리아나는 다른 적갑 기사단들과 함께 나와 이글렌의 뒤를 따랐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칼로스와 동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꽤나 가슴 벅차하는 듯했다.

탁.

마차 문을 닫자 조금은 어색한 적막이 맴돌았다.

운전석도 따로 분리된 터라 마차엔 나와 이글렌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분위기 전환이라도 할 겸 이글렌에게 슬쩍 한마디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그러는 이안은 긴장도 안 되나 보네요.”

“뭐… 일어난 건 일어난 거니까요.”

카잔 라크레시아의 등장.

이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침울해 있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고.

“…카잔 황제의 아들. 그를 정말로 만나신 건가요?”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으음…….”

“혹시 그를 만난 적 있었나요?”

“네?”

내 물음에 이글렌은 고갤 갸웃했다.

라크레시아가 원한다던 한 여자.

그녀가 이글렌일 수도 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글렌은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없죠. 전 대전쟁 당시엔 갓난아기에 불과했으니까요.”

“흠. 그건 그렇죠.”

대전쟁이 벌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그때 이글렌은 걸음마는커녕 기어 다니는 것도 힘들었을 때다.

뭐 라크레시아도 이글렌이랑 비슷한 나잇대긴 하지만…….

“뭐. 아니면 됐습니다.”

“…뭐예요? 싱겁긴.”

이글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렇게 이글렌과 자잘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창 밖으로 작은 섬 하나와 우뚝 솟은 등대가 비춰졌다.

대륙 정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 하나.

화합의 섬.

“저기가 화합의 섬이군요.”

“그렇죠.”

이름에 걸맞게 평화롭기 그지없는 섬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마치 섬을 바라보듯 내리쬐고 있었고, 그 위로 다양한 색깔의 새가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먼 옛날 창조신이 만들었다는 이 섬은 카잔 제국과 마찬가지로 주인이 없는 섬이다.

‘거기랑 분위기는 영 딴판이지만.’

누군가의 손길도 닿지 않은 아름다운 섬의 모습.

폐허나 다름없는 카잔 제국의 옛 영토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쿠르르…….

마차는 아이소테르 방면에서 이어진 다리를 통해 섬으로 들어갔다.

정 중앙에 놓인 섬과 이어진 총 여섯 개의 다리.

모두 왕국 연합의 일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다리였다.

일곱 왕국과 여섯 다리.

개수가 맞지 않았다.

그야 처음엔 왕국 연합도 일곱이 아닌 여섯이었으니까.

아이소테르, 위셀란, 도라스.

신성 왕국, 프란츠, 피스트.

이렇게 총 여섯으로 시작한 왕국 연합은 지금은 일곱이다.

대전쟁 이후 프란츠가 둘로 나뉘어 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아이소테르마냥 거창한 내전 같은 건 없었다.

적당히 상호 합의 하에 프란츠와 프로스트 랜드로 나뉜 거니까.

‘상호 합의라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올해로 두 번째네요. 화합의 섬에 들리는 건.”

“아하.”

화합의 섬에선 매년 연합 회의가 열린다..

올해는 이미 한 번 열리긴 했지만, 사안이 중요한 터라 한 번 더 열렸다.

이글렌도 화합의 섬에 들린 건 이번이 두 번째일 거다.

지금까진 이글렌이 아닌 에런골드가 참석했을 테니까.

“…….”

이글렌은 옛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입을 닫은 채 섬을 바라봤다.

내전을 겪은 왕국의 여왕.

그녀의 가냘픈 두 어깨에 내려진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 짐작이 갔다.

“여왕님은 지금도 잘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잘 하실 테고.”

“…후후. 고마워요, 이안.”

내 말에 이글렌의 얼굴에도 조금은 근심이 사라진 듯했다.

똑똑.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서자, 마차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뭐 일단은 여왕과 그 약혼자니, 낯 뜨거울 광경을 들키기 전에 대비하라는 뜻 같았다.

“도착했군요.”

얼른 마차에서 내려 이글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이글렌은 싱긋 미소 지으며 내 손을 꼭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화합의 섬 중앙에 높이 세워진 등대.

아마 대륙 정중앙에 핀셋을 꼽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아이소테르에서 온 이들은 천천히 등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화합의 섬은 연합 회의가 없을 땐 비워 두는 게 원칙이다.

때문에 국왕들 수발들어 줄 사람은 저마다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등대 안 자리 잡은 커다란 원탁.

거기엔 저마다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아이소테르의 주인께서 오셨군요.”

원탁을 주위로 앉은 다섯의 남자.

그들 중 서쪽에 위치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성 왕국에서 온 녀석이었다.

“다들 먼저 와 계셨군요.”

이글렌은 먼저 온 이들을 향해 가볍게 고갤 까딱였다.

“다른 분들도 이제 막 온 참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미리 자리에 와 있었다.

이글렌이 도착한 이후에도 여전히 한 자리는 공석이었지만.

‘저쪽은… 피스트 왕국이군.’

페이라 피스트 엘칸토.

성공한 갈렌이라고 해야 하나.

갈렌 못지않은 망나니 녀석이지만 갈렌과 달리 무사히 왕위에 오른 놈이다.

그 녀석이 대전쟁 당시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 보면, 왕위에 오른 것 자체가 용한 놈이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놈이다 보니 연합 회의에 없는 것도 다들 별 신경 안 쓰는 눈치다.

“피스트의 주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었으니, 이쯤에서 시작할까 합니다.”

“좋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탁 주위로 한 자리를 빼곤 모두 자리에 앉았다.

비유가 아닌, 진짜 대륙의 주인 여섯.

그 뒤로 각국의 기사단장들이 선 채 저들의 주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하나 같이 칼로스 못지않은 강자들이 허릴 꼿꼿이 편 채 서 있었다.

흔치 않은 광경이다.

이만한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건.

“…….”

아이소테르의 경우엔 빈트하겐 칼로스가 이글렌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은 불편한 자리인지라 눈치가 보이는 그였지만 이글렌을 지키는 것만큼은 제대로 할 거다.

“그럼 연합 회의를 시작하겠소.”

신성 왕국의 대표가 회의 시작의 포문을 알렸다.

“이안 임페라 백작.”

“예.”

“그럼 그날 있었던 일을. 이 자리에서 말해 주길 바라오.”

그의 말에 따라 대륙의 주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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