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저 평범한 삶을 원했던 한 남자.
더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해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이내 가슴팍을 꿰뚫린 그는 먼지처럼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검격에도 죽지 않던 그가 죽어 가고 있다.
내가 그를 베었다 해도 죽지 않았을 거다. 초월적인 신체는 아무리 베어 낸다 해도 다시 되살아날 테니까.
그를 만들어 낸 창조주의 손이 아니라면 죽일 수도 없다.
그게 아니라면 만들어진 블랭크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삶의 의지를 포기한 것뿐이다.
…챙그랑!
던전 마스터의 몸이 사라지자 용린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던전 마스터의 죽음.
이는 던전 소멸로 이어지진 않지만, 던전이 다시 땅 고르기에 돌입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내 황폐한 지르하겐의 모습이 사라지고 곡식이 익어 가는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다.
앞으로 여긴 평범한 던전이 되어 남아 있을 거다. 자잘한 몬스터나 이따금 데스 나이트가 출몰하는 던전으로.
‘평범한 던전이라.’
쿠르르……!
던전을 클리어 하자 두터운 철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엔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나라.’
두터운 철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찰싹!
“어윽!”
“어이! 빨리 일어나!”
느닷없이 내려치는 거센 뺨따귀에 콜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이게 무슨……!”
눈을 뜨자 그가 마주한 건 아도르네이 후작령의 기사들.
모두 푸근한 개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수십.
던전이 생성되는 걸 보곤 부리나케 달려온 이들 같았다.
“다들 보이겠지만 방금 던전이 생겨났다. 한시라도 빨리 던전 마스터를 처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옛!”
이제 막 던전 공략을 시작하려는지, 꽤나 높아 보이는 기사 하나가 다른 이들에게 한창 연설 중이었다.
“으음…….”
“이 짜식 봐라? 어딜 한눈을 팔어?”
콜린 앞엔 따로 기사들 몇이 열에서 빠지나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그는 주윌 두리번거렸다.
“아이고.”
그를 에워싼 기사 중 하나가 보따릴 뒤적이고 있었다. 카잔 제국에서 훔쳐 온 유물이 담긴 보따리였다.
“하이고. 참 많이도 챙기셨네.”
“도굴꾼인 건 확실하지?”
“그럼. 여기 카잔 제국 문양까지 박힌 금화도 있네.”
‘으음…….’
콜린은 침음을 흘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카잔 제국과의 국경선을 넘는 건 대역죄.
그가 상당한 금화를 뇌물로 쓴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뇌물 한두푼으론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한테 금화를 줬다간 평생 빚지고 살게 될테니까.
“그, 그게 사실 전 배…….”
‘백작님과 던전화를 막는 중이었지.’라고 말하려다 콜린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안 백작이 아도르네이 후작령뿐만 아니라 국경선을 넘었던 건 비밀 중에 비밀.
그걸 함부로 말할 순 없었다.
“배… 뭐?”
“배, 배가 아파서 볼일 좀 보려다 휘말린것 뿐입니다… 하하…….”
“…하! 이거 안 되겠네.”
콰악!
옆에 있던 기사들이 콜린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한 녀석이 검을 뽑아 들어 콜린의 눈앞에 갖다 댔다.
“지금부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토씨 하나 빼지 말고 불어라. 그럼 정상 참작해 주지.”
“아하하… 정상 참작이라심은……?”
“물론 단칼에 죽여 주겠다는 거다. 도굴꾼은 처형이 원칙이니까. 하지만 입을 다물겠다면… 일단 두 눈부터 파내는 걸로 시작하지.”
“으으…….”
어서 백작님이 나오셔야 할 텐데.
콜린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그때.
쿠구구구……!
굳게 닫허 있던 던전의 철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이 던전 마스터를 처치했다는 걸 수도 있고, 어쩌면 이안이 죽고 땅 고르기가 다시 시작되려 하는 걸 수도 있다.
아마 후자의 경우라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가 쏟아질 텐데…….
꿀꺽!
“모두 전투 준비!”
“하압!”
기사들은 서로 빈틈 하나 없이 단단한 진을 형성했다.
그렇게 모두가 숨죽여 이를 지켜보는 그때.
던전의 문이 열렸다.
***
“…뭐야?”
던전 문을 열자 수많은 기사들이 날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아도르네이 후작령의 기사들이었다.
아마 날 던전 마스터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 진정들 하라구. 나야 나.”
“…누구?”
“…으응? 임페라 백작님?”
그러다 기사들 중 하나가 내 얼굴을 알아봤다.
“이안 임페라 백작님. 맞으십니까?”
“그래. 맞다. 이안 임페라 백작.”
“…모두 잠시 대기하라.”
그제야 기사들은 내게 겨누고 있던 검을 집어 넣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보이는 대로다. 던전이 생성됐고. 방금 던전 마스터를 처치하고 오는 길이다.”
“…예?”
내게 물었던 기사는 뜬금 없는 대답에 제 귀를 의심했다.
다른 기사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방금 생성된 따끈따끈한 던전이 벌써 공략됐다는 거니 놀랄 만했다.
“니들이 들은 게 맞다. 이제 더 이상의 땅고르기는 없을 거다.”
“허어…….”
녀석들 중 대장으로 기사가 허무한 듯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긴가민가하는 얼굴들이었지만 다들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고갤 끄덕였다.
방금 생성된 던전이 이렇게 조용하려면 던전 마스터를 처치하는 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으니까.
“…진짜야? 벌써 던전 마스터를 처치했다고?”
“던전이 조용한 걸 보면 진짠가 본데.”
이내 정신을 차리곤 대장 녀석이 내게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백작님 덕분에 추가적인 희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된 거겠지.”
방금 던전 마스터였던 베닐의 죽음을 본 터라 가슴 한켠이 불편하던 차였다.
그건 그렇고.
“콜린. 콜린 어디 있지?”
콜린이 힘써 준 덕에 첫 번째 땅 고르기를 멈출 수 있었다.
상이라도 내려 줘야…….
“응?”
“배, 백작님…….”
멀지 않은 데서 콜린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 보니 따로 떨어진 기사 녀석들이 콜린을 에워싸고 있는 걸 보니, 으름장을 놓고 있던 것 같았다.
“어이. 거기 지금 뭐하는 거지?”
“아! 백작님. 지나가던 도굴꾼 놈을 붙잡아서 말입니다. 사정 청취가 필요해 살려 두려 했었습니다만… 백작님께서 오셨으니 필요 없겠군요.”
스릉!
기사 녀석은 콜린을 처형하려 들었다.
“멈춰라. 나와 같이 땅 고르기를 멈춘 녀석이다. 처형은커녕 오히려 고마워해도 모자랄 텐데.”
“예? 정말입니까? 그런데 왜 굳이 말을 안 하고…….”
“그, 그게……!”
콜린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했다.
보아하니 국경선 넘은 게 들통날까 봐 함부로 말을 못한 듯했다.
‘짜식.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비밀을 지키다니.’
꽤나 마음에 드는 놈이다.
사역 랭크도 제법 도움이 됐고.
“…실례지만 백작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던전화를 막아 주신 점은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라겠지만… 어째서 임페라 백작님께서 이곳 아도르네이 후작령까지 당도하신 겁니까?”
‘호오.’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한 기사가 던졌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이 녀석이 도굴꾼인 건 확실한데. 왜 도굴꾼을 데리고 국경선엘…….”
다들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내게 딴지를 건 녀석을 시작으로 다른 기사들도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녀석은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자세히 보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적갑 기사단인가.’
갈렌 왕의 편을 들었던 적갑 기사.
그들을 모두 처형했다간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기기에 하는 수 없이 처형이 아닌 좌천으로 끝낸 녀석들도 있었다.
보아하니 녀석도 그런 놈들 중 하나 같았다.
나만 없었으면 지금쯤 적갑 기사단으로 떵떵거리며 살았을 테니, 어떻게서든 꼬투릴 잡고 싶겠지.
미안하지만 녀석의 기대처럼은 안될 거다.
“전방 순찰 겸 왔다.”
“어째서죠? 임페라 백작님께선 전방의 일과는 관계가 없을 텐데요.”
“하, 어이가 없군.”
“…네?”
“지금 내가 던전화를 막았는데 그딴 소리가 나오나?”
“하, 하지만 그건…….”
“며칠 전부터 아이소테르의 국경선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느껴지더군. 그런데 아도르네이 후작은 오히려 조용했지. 얀 공작을 위시한 신흥 세력이 생겨났는데도 말이야.”
“으읏…….”
“그래서 혹시나 해서 온 거다. 물론 그렇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아도르네이 후작령에 제국의 망령과 협력하는 놈들이 있어 정보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거라면… 아주 큰일이니까.”
“…….”
“뭐 운이 좋았지. 국경선 인근을 순찰한 덕분에 초기에 던전화를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내 말에 녀석은 분한 듯 입을 앙다물었다.
물론 얀 공작과 내통한 자는 없어 보이지만, 내 말의 속 뜻은 이거다.
얀 공작과 내통한 걸로 몰리고 싶지 않으면 깝치지 말라고.
“여왕 전하와 약혼을 맺었으니. 나도 준 왕족은 될 테고. 이단 심문권이라도 써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이, 이단 심문……!”
그 말에 다른 기사들도 내 시선을 회피하기 바빴다.
사실상 사형 통보나 다름없는 게 이단 심문이니까.
어느새 콜린이 뭘 도굴하려 했는지는 다들 안중에도 없었다.
이래서 힘이 세야 좋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백작님. 주제도 모르고 그만 실언을…….”
“알면 됐어.”
약점 하나 잡겠다고 좋아라 하던 녀석은 금세 꼬랑질 말고 물러섰다.
“어떻게 된 건가! 임페라 백작이 와 있다니!”
뒤늦게 전보를 듣고 아도르네이 후작이 달려왔다.
얼굴엔 잔 주름이 잡혀 있긴 했지만,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듯 몸집은 다부졌다.
“아, 왔구만. 이 대참사의 주역께서.”
“으읏… 임페라 백작. 당신이 왜 여길……?”
“이유야 두 번 말하긴 귀찮고. 그냥 낌새가 심상찮아서 온 걸로 생각하쇼.”
아도르네이 후작과는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에선 상당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악의 있는 경계심이 아닌, 그저 정체 모를 무언가를 향한 경계심.
‘그런 거였나.’
지금껏 아도르네이 후작이 나와 거릴 두던 이유가 뭔가 했는데.
하기사 불과 몇 년 만에 거지 백작가 망나니 공자였던 게 이안이다.
그런 놈이 여왕의 반려 자릴 꿰찼으니 수상할 만하겠지.
문제는 이 노인네의 경계심 때문에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는 거다.
“분명 내가 알기론 국경선에서 별문제는 없다 했던 거 같은데.”
“흥! 당연한 소릴! 국경선은 아무런 문제없이 지켜지고 있다! 괜한 트집 잡을 생각하지 마라!”
“지금 던전화 때문에 전초기지 하나가 박살이 나고 순찰대원들까지 죽어 나갔는데?”
“던전이 생겨난 건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다! 얀 공작과는 관계가…….”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이 세상의 상식선에선 그렇다.
던전은 깊은 원혼이 모였을때 생겨나는 거니까.
하지만 상대가 카잔 황제의 아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이 던전은 한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거다.”
“던전의 본체를 말하는 건가? 그게 남자가 됐건 여자가 됐건…….”
“아니.”
베닐은 정말로 평범한 남자였다.
아마 그가 얀 공작에게 징집돼 죽었을 때도 그리 큰 원혼을 만들어 내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얀 공작이 가진 힘이라면 다르다.
사람을 하나 새로 만들 수도 있는 놈인데, 심지 하나 뒤틀리게 만드는 것 하나 못 할까.
어마무시한 힘과 깊은 원혼의 주입.
그걸로 평범한 베닐은 던전 마스터가 돼 버리고 말았다.
“후…….”
난 던전 앞에 모인 이들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얀 공작의 진짜 정체.
라크레시아 카잔.
이 소설의 최종 빌런이자 끝판 왕.
“카잔의 황제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