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두터운 철문을 밀고 들어섰다.
파아앗!
그러자 눈부시게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시야를 가렸다.
“…….”
눈부신 빛에 눈을 찡그리자 이내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누렇게 익은 곡물이 황금빛 물결을 일렁이는 드넓은 들판의 풍경.
솔솔 풍겨 오는 고소한 풀냄새는 어딘가 그리움이 느껴졌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방금까지 흉학한 기세로 몬스터를 내뿜던 던전이라곤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런 던전은… 처음 보는데.’
혹시나 소설에 나오는 던전은 아닐까 기대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도 처음이었다.
던전은 보통 던전 마스터의 인생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발디그 던전이 위대했던 기사이자, 블랭크로 전락해 버린 헤카테의 인생을 본떠 만들어졌듯이.
던전화를 멈추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던전을 공략해야 했다.
…쿵!
“…들어왔군.”
이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단 걸 말하려는 듯, 육중한 철문이 굳게 닫히며 요란스런 소리를 냈다.
지금 이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누구의 발도 닿지 않았던 신흥 던전.
던전이 새로 생성되면 누군가는 던전에 들어가 확산을 막아야 한다.
문제는 던전에 무슨 몬스터가 생기는지도, 클리어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거다.
어떤 함정이 도사릴지 알 수가 없는 터라 대부분 공략조를 꾸려 차근차근 공략에 나선다.
밖에선 땅 고르기를 막기 위한 병력들까지 잔뜩 꾸려 놓은 채로 말이다.
지금처럼 홀로 던전에 들어서는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쯧.”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방금 땅 고르기의 기세를 봤을 때, 이 던전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던전이 되고 말 거다.
초장에 제지하지 않는다면 던전은 계속해서 커져 갈 터.
게다가 이 근방 순찰대원들은 모두 죽었다.
아도르네이 후작이 이변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병력을 보내고 있긴 하겠지만…….
한참은 걸릴 테고 던전은 또다시 땅 고르기에 들어가고 난 뒤일 거다.
“저건…….”
드넓게 펼쳐진 들판.
그 너머로 우뚝 솟은 흰 탑이 보였다.
제니스 기사 학교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던 마탑.
라피스 마탑이었다.
게다가 그 주위로 넓게 펼쳐진 교역소.
분명 이는 과거 지르하겐 교역소의 모습이었다.
한 어린아이가 들판을 뛰놀며 놀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한적한 농촌.
따사로운 볕 아래 곡식이 여물면 지르하겐 교역소에 가져다 파는 평범한 삶.
하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자신이 사는 나라의 왕.
그자가 일으킨 전쟁 때문이었다.
아이는 왕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잘 몰랐지만, 대전쟁의 여파로부터 안전할 순 없었다.
화르륵!
이내 황금빛을 내뿜던 들판이 불길이 치솟았다.
저 멀리 자리 잡은 지르하겐 교역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땅에선 불덩이가 치솟고 하늘에선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견고히 버티던 라피스 마탑도 수많은 마탄 세례에 무너지고 말았다.
타오르는 불 밭 한가운데.
아이는 쪼그려 앉은 채 울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국은 멸망했고. 농사만 짓고 살던 어린아이도 제국의 일원이었다.
파아앗!
불길로 일렁이던 지르하겐 외곽의 작은 마을.
이내 주변은 모두 지금의 참혹한 폐허 모습만이 남았다.
“…….”
머릿속으로 녀석이 가진 기억이 스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폐허가 되어 버린 그의 고향.
이후로도 녀석의 비참한 삶은 변하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얀 공작에 의해 징집되어 국경선으로 내보내졌다.
어이없을 정도의 개죽음.
이대로 끝인가 싶었지만, 그에겐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몸이 다시 되살아난 거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는 살아남기 위해 국경선을 넘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안식처는 없었다.
제국의 망령을 향한 무자비한 처형뿐.
마침내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렸을 땐.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젠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이 된 한 남자가 폐허 속에서 홀로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런 녀석의 왼손에 룬 문양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얀 공작, 라크레시아에 의해 만들어진 블랭크.
그의 주변에 폐허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르륵……!
폐허 속에서 자라난 창백한 피부의 기사들.
모두 같이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순찰대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아도르네이 후작을 따라 망령을 처형하던 그들이.
새로운 던전 마스터를 섬기고 있었다.
“그랬군.”
[…….]
이 던전의 마스터.
베닐 노먼.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처절한 인생이다.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해 발버둥 쳐 봤지만 끝내 이룰 수 없던 그의 꿈.
이제 그는 영원히 던전에 속한 던전 마스터로 살아갈 것이다.
이름 모를 영웅에게 퇴치 당하기 전까지.
“베닐 노먼. 맞나?”
녀석은 작게 고갤 끄덕이곤 내게 물었다.
[너는… 누구지……?]
“이안 임페라. 아이소테르의 백작이지.”
[백…작……?]
녀석은 백작이란 단어에 얼굴이 구겨졌다.
귀족.
그저 자기네들의 목적만을 위해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베닐의 인생에서 귀족들은 모두 똑같았다.
그 잘난 카잔 황제도 그랬고, 얀 공작이란 녀석도 그랬다.
오로지 자기네들만 생각할 뿐, 놈들의 발에 짓밟히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백…작……!]
스릉!
크르륵……!
베닐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질세라 나도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초장부터 데스 나이트라. 좀 빡쎈데.’
던전 종류마다 다르긴 하다만, 보통 던전은 초장엔 조무래기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코볼트나 고블린 같은 놈들.
거기에 함정을 더해 까다롭게 만드는 게 보통 던전이다.
하지만 베닐의 던전은 달랐다.
시작부터 데스 나이트라니.
최소 검술 랭크 4이상인 시체로만 만들 수 있는 몬스터다.
화르륵!
데스 나이트들의 검에서 짙은 흑색의 오러가 피어 나왔다.
보아하니 보통 데스나이트보다 훨씬 강한 놈들 같았다.
[너도 똑같아. 더러운 귀족 놈들.]
머리에 대고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데스 나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앙!
놈들이 발을 한 번 구르자 주변에 잔뜩 깔린 폐허가 박살 났다.
그리곤 쏜살같이 내달려오는 검은 포물선.
데스 나이트만이 쓰는 검은 오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카카캉!
용린검을 빠르게 휘둘러 무수히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 냈다.
하나같이 묵직한 검격이다.
죽기 전 꽤나 검 좀 썼던 녀석들인 게 분명했다.
어렵사리나마 검을 막아 냈나 생각했던 그때.
“…으읏!”
콰앙!
유독 검붉은색을 띠는 오러가 품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젖혀 막아 내긴 했지만 배 속을 쥐어 짜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놈은 좀 센데.’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적갑 기사단 조장이었다가 갈렌의 편을 든 녀석을 쫓아냈다고 했는데.
아마 이놈이 그 놈인 듯했다.
조장 녀석이 까다로운 건 둘째 치고.
던전 마스터 녀석한테 이런 괴물까지 당했다는 건데.
“…쯧!”
불행인지 다행인지 던전 마스터는 꼼짝도 않고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귀족이란 자가 기사들한테 죽는 걸 보고 싶기라도 한 걸까.
…콰앙!
한숨 돌리는가 싶었던 그때.
놈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까다로운 놈들이다.
생전에 같이 합을 맞춘 녀석들이라 그런지 파고 들어오는 검격이 매서웠다.
상단을 노린 공격이 들어옴과 동시에 하단을 노리는 다른 데스 나이트의 검.
조장 녀석은 합이 좀 안 맞았지만 개인의 무력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렇다면.
‘데스 나이트라.’
일반 기사들보다 무서운 놈들이다.
아무리 기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이들이라 해도, 결국엔 진짜 죽음 앞에선 움츠려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그렇지 않다.
이미 죽은 그들이기에 또다시 죽음이 허용될 리가 없으니까.
퍼억!
쏟아지는 검격을 파고들며 놈들 중 한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크르륵!
하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목이 살짝 뒤틀리긴 했지만 힘주어 고갤 돌리자 다시금 제 모습을 갖췄다.
‘까다롭군. 까다롭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겉으로 보기엔 최강의 전사라 보일 수도 있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릴 놈이란 뜻이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상식이다.
두려움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잠재의식.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전사는 멈출 줄 모르는 마차나 다름없다.
그런 마차는 반드시 박살 나기 마련이다.
목덜미를 노리고 파고드는 검격.
난 그에 맞서듯 녀석의 발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발 하나 잘리는 것쯤은 신경도 안 쓰는지, 녀석의 검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질주했다.
콰득!
검이 목덜미를 훑으려는 찰나.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녀석의 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베어 가르고, 용린검은 놈의 한쪽 다릴 그대로 베어 버렸다.
그걸 시작으로 데스 나이트들 간에 균열이 발생했다.
한쪽 발이 잘려 비명을 내지르진 않았지만, 제대로 된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녀석이 비틀대며 견고히 짜여진 데스 나이트들의 합에 틈이 보이자, 난 지체 없이 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서걱!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지고.
어느새 조장급 데스 나이트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화르륵!
검붉은 오러를 흉흉하게 내뿜는 데스 나이트.
녀석은 창백한 얼굴로 날 노려본 채 자셀 잡았다.
양손에 검을 꼭 붙든 채로 녀석의 허벅지가 불룩 부풀었다.
…콰앙!
지면을 박살 낼 정도로 강력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검을 따라 검붉은 선이 뻗어 나왔다.
한 방에 모든 걸 걸겠다는 무지막지한 공격.
난 그런 녀석을 상대로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서걱!
“크윽!”
녀석과 한 합이 오가고.
가슴팍에 커다란 상처가 벌어졌다.
그사이론 붉은 피가 흘러나와 허름한 망토를 적셨다.
마지막 하나 남았던 데스 나이트는 발걸음을 돌려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다가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졌다.
…크륵!
주인 잃은 몸뚱이는 그렇게 몇 발짝 더 걷다 이내 주인을 따라 쓰러졌다.
[…….]
던전 마스터는 부하들을 모두 잃은 뒤에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자세도 없이 그저 웅크리고 앉아만 있는 적.
이대로 목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럼 녀석도 죽고 말 거다.
평범한 던전 마스터라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봤자 먹히지도 않을 테고.
챙그랑!
난 용린검을 내팽개쳤다.
예상외의 모습에 당황이라도 한 듯 베닐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자는 피해자다.
카잔 황제의 야욕과 그의 아들의 복수심에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
이 녀석이 무슨 힘이 있었을까.
홀로 제국의 야욕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라크레시아의 농간이 저항할 수 있었을까?
“…….”
난 녀석에게 검을 휘두르는 대신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녀석이 얼굴을 구기긴 했지만, 이내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보자 고갤 갸웃하기까지 했다.
팡!
품속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작은 물병.
뚜껑을 따자 청량한 소리와 함께 달큰한 과일 향이 퍼졌다.
블루 핀 시럽을 탄 에이드였다.
“한잔해라.”
[…….]
녀석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가 건넨 에이드를 받아 들었다.
이미 어떤 독을 먹어도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걸 안 까닭이었을까.
녀석은 조심스레 블루 핀 에이드를 홀짝였다.
[…….]
“X같지? 인생이란 게.”
[…….]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면 쓰나.”
[…….]
“네 잘못이 아니다. 너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
[…….]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근본부터 기괴하게 뒤틀린 이 세상은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베닐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제라도 멈춰라. 너 같은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다면.”
[…….]
꼼짝도 않던 녀석이 움직였다.
녀석은 바닥에 내팽개친 용린검을 집어 들었다.
검붉은 파도처럼 불안정하게 오러가 요동쳤다.
오러의 크기만 놓고 보면 크로드와 맞먹을 정도라 해야 하나.
조장급 기사를 죽여 데스 나이트로 부릴 만했다.
하지만 녀석의 팔은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파괴되었다 재생되길 반복했다.
저 검으로 날 찌르면 바로 죽겠지.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을 거다.
[…….]
던전 마스터 베닐.
얀 공작의 농간에 만들어진 블랭크.
…푸각!
그는 그렇게 불안정한 오러 소드를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