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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12화 (112/222)

112화

“이런 미친……!”

“하하하! 느긋하게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야?”

“이 자식이!”

얀 공작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만 지은 채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

거기에 녀석의 부하들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와 공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나 아냐!”

“당연히 알지! 이 망할 대륙에 작은 선물 하나 선사해 준 거 아닌가?”

퍼억!

놈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진심으로 날린 권격이었지만 거대한 바위에 내지른 듯 내 손만 저릿저릿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건 블랭크야. 그것도 ‘내가 만든’ 블랭크.”

“…뭐라고?”

놈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놈이 만든 블랭크.

그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지금 아도르네이 후작령에 내리친 ‘저건’ 터무니없이 위험한 던전이 될 거다.

“…….”

잡아챘던 멱살을 풀었다.

지금 이놈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멱살은커녕 오러 소드로 쑤셔도 아무런 타격조차 입히지 못할 거다.

블랭크.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

‘랭킹 빨로 세계정복!’의 세상에서 블랭크는 크게 3종류로 나뉜다.

먼저 평범하게 이 세상을 살다 왼손을 잃은 자들.

블랭크가 재앙을 몰고 온다곤 하지만, 다른 두 녀석들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손 잘린 블랭크들은 아무런 힘도 없이 거지처럼 살다 죽어 버리니까.

다음은 랭크 시스템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 인간, 고대인.

이들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미 그들은 절멸한 지 수천 년이나 지났다.

이따금 자이겔론드에 숨겨진 고대인 같은 놈들 말곤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지막 하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블랭크.

놈들에겐 한계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강해지는 한계도 없이, 첫 번째니 두 번째니 하는 벽도 하나 없이.

그저 강해지고 또 강해진다.

그게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다.

“X팔……!”

난 녀석을 거칠게 밀치곤 밖으로 내달렸다.

한가롭게 지르하겐 관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흐흐! 어서 달려! 내 선물이 네놈의 거지 백작령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말이야!”

그저 날 놀리기 위했을 뿐이었을까.

얀 공작의 부하들은 국경선을 향해 내달리는 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또 보자구! 이안!”

끝까지 내 등 뒤를 향해 도발하는 얀 공작.

턱주가리에 주먹 몇 방을 내다 꽂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도 아니고 때려도 내 손만 아플 거다.

저놈이 내가 예상한 그놈이라면.

새로운 생명을 마음대로 탄생시키는 건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인공과 동급인 녀석을 만들었다는 건……!’

이 소설에서 블랭크를 마음대로 찍어 낼 수 있는 놈은 몇 없다.

홀로 랭크 9에 도달한 자. 오베론 스테이라.

고대인의 유물로 전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던 자. 카잔 황제.

하지만 얀 공작은 둘 다 해당되지 않을 거다.

신이라도 된양 대륙의 정세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게 오베론이다.

이딴 미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

카잔 황제도 이미 죽은 지가 이십 년 가까이 지났다.

그렇담 남은 건 단 하나.

카잔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

라크레시아 카잔.

“이 X끼가 벌써 깨어났다고……?”

그렇담 녀석이 오베론에게 크나큰 적의를 드러내는 게 당연했다.

오베론 그자 하나 때문에 제국은 멸망했으니까.

카잔 황제의 마지막 핏줄이자,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라크레시아 카잔.

카잔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처형당했음에도, 라크레시아 카잔은 살아 있었다.

정확히는 어딘가의 고대인의 유물에 재워져 있었지만.

결국 라크레시아는 깨어나고 영겁의 기사단들에게 걸려 있던 마법도 파훼된다.

하지만 이는 소설의 후반부에서나 일어날 일.

이제 막 주인공이 기사 학교 졸업할 시점에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하얀 은발에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

녀석의 얼굴은 소설 속 글로만 봤던 터라 알아채기 어려웠다.

게다가 하얀 은발.

내가 알기론 녀석은 금발인데.

봉인이 빨리 풀려서 부작용으로 하예진 걸 수도 있다.

일단 놈이 깨어난 건 깨어난 거고.

지금은 저 망할 빛기둥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두두두……!

한시라도 빨리 던전화에 개입해야 한다.

지르하겐의 폐허를 박살 내 가며 빛기둥을 향해 직진했다.

깊은 원혼이 모여 만들어진 대재앙.

던전.

던전은 생전 본체의 강함 정도에 따라 위험도도 같이 올라간다.

아직 본체가 어느 정도로 강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문제는 본체가 만들어진 블랭크였다는 거다.

주인공 마냥 한계 없이 강해질 수 있는.

‘완벽한 인간.’

오베론이 남긴 유산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치유력을 보였다.

만들어진 블랭크는 그게 사람의 형태를 띤 것이라 봐야 한다.

심장을 꿰뚫어도 치유되고, 목이 베여도 찰흙마냥 다시 달라붙으니까.

때문에 놈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냥 평범한 놈이 던전화 됐을 리는 없고.”

빛기둥이 솟아오른 위치는 제국과 아이소테르의 국경선 너머.

순찰대원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곳이다.

녀석들이 빨리 이변을 알아차리고 던전화에 개입해 준다면 좋겠지만…….

지금 같은 때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만약 던전화의 본체가 순찰대원을 다 죽인 뒤라면?

심지어 전초기지까지 홀로 박살 내 끝도 없이 강해진 뒤라면?

지금의 주인공과 동급인 괴물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녀석이 던전화의 본체라면…….

“젠장.”

“백작님!”

“응?”

한창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저 멀리서 제국의 유물을 한보따리 챙긴 채 뛰고 있었다.

이슬린이 붙여 준 길잡이, 콜린이었다.

반갑게 인사나 나눌 시간은 없었기에, 우리 둘 모두 빛기둥을 향해 내달리며 말했다.

“저, 저게 대체 뭡니까?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그래. 던전화가 시작됐다.”

“허억! 그, 그렇다면……!”

“아주 X된 상황이라는 거지.”

“으음…….”

콜린도 던전화에 대해 잘 아는 듯 침음을 삼켰다.

뒤돌아볼 새 없이 내달리던 우리 둘 앞에 목책이 나타났다.

“개구멍이 어디…….”

“지금 그딴 거 찾을 때냐?”

…콰앙!

용린검으로 검기를 날리자 목책이 과자 부스러지듯 박살 났다.

나중에 한소리 듣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고.”

목책이 부서지자 던전화가 한창인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시작점은 다름 아닌 국경선 인근의 전초기지.

내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저, 전초기지에서 던전화가? 대체 순찰대원들은 뭘 하고…….”

“다 죽었단 소리겠지.”

“아아…….”

부디 늦지 않았길 간절히 바라며 나와 콜린은 전초기지에 다다랐다.

“이런.”

전초기지는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콰과과과…….

질척한 살 더미에 뒤덮여 커다란 토산이 되어 버린 전초 기지.

살 더미 사이사이로 보이는 천막과 병장기만이 이곳이 전초기지였단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본체가 깊은 원혼에 빠져 형태를 잃고 던전의 핵이 되어 버리는 첫 단계, 파종.

이미 전초기지는 던전화의 첫 단계를 지나 버린 뒤였다

키이이익……!

거대한 살 더미 한가운데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그리곤 살아 숨 쉬는 생명체마냥 끔찍한 울음소릴 내뱉었다.

살 더미는 점차 단단해지고 돌처럼 거친 표면으로 뒤바뀌었다.

주변 대지를 던전의 일부분으로 종속시키는 던전화의 두 번째 단계, 땅 고르기.

이대로 아무런 제지도 없이 던전화가 계속 된다면?

아마 아도르네이 후작령뿐만 아니라 아이소테르까지 다 집어먹을지도 모른다.

던전의 본체가 어떤 이었는지는 잠시 잊자.

지금 해야 할 건 이 던전화가 더 이상 커지지 못하게 막는 것뿐.

“콜린이라고 했나.”

“네, 백작님.”

“싸울 줄은 아나?”

“으음… 솔직히 싸움에 자신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어디서 얻어맞고 다니진 않을 정도죠.”

“다행이네. 지금부터 뒤지게 얻어맞을지도 모르거든.”

콰아아앗!

거대한 살 더미 가운데 생겨난 입.

거기서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취이익!”

“크르륵!”

초장부터 미친 몬스터들이 나오진 않았다.

최약체 축에 끼는 코볼트나 고블린뿐.

문제는 수가 너무 많았다.

파아앗!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콜린은 검술 랭크는 그닥인지 손에서 갈색빛 흙덩이를 뽑아내고 있었다.

“하압!”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로로 깊게 들어간 검격에 몬스터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밀려 들어왔다.

콰과과과……!

어느새 놈들은 우리 둘 주윌 에워싼 채로 달려들었다.

파도 한가운데로 뛰어든 꼴.

검으로 아무리 파도를 베어 낸다 해도 물의 흐름을 막을 순 없다.

던전화의 두 번째 단계, 땅 고르기의 무서움이다.

나무가 양분을 만들기 위해 낙엽을 떨구듯.

땅 고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몬스터들은 낙엽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 땅을 던전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양분일 뿐.

“크윽……!”

어느새 몬스터들은 공격보단 밀어붙이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왔다.

몬스터들과 한데 뒤엉켜 정신이 아득해질 수준이었다.

“이런 미친…….”

…콰앙!

크게 발을 한 번 굴러 오러를 발산시켰다.

키에엑!

덕분에 일순간 주변 몬스터들이 폭발하며 먼지처럼 바스라졌지만.

이내 새로 쏟아진 놈들이 빈자릴 메꿨다.

“…백작님!”

콜린은 내 이름을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파도처럼 쏟아지는 몬스터 가운데 자라난 벽이 보였다.

어차피 다 못 죽일 거 흙벽으로 잠시나마 버티고 있던 거였다.

벽 뒤로 잠시 몸을 숨긴 채 숨을 돌렸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상처는 없다만… 속이 메스꺼울 정도군.”

콰콰콰…….

단단한 흙벽에 몸을 숨긴 채 빠르게 머릴 회전시켰다.

땅 고르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최대한 놈들의 수를 줄여야 하는데…….

“백작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

콜린은 귀엣말로 녀석이 짜낸 계책을 말해 줬다.

몬스터들의 난동 소리에 겨우 들릴 정도였다.

“…괜찮네.”

“문제는 시간을 좀 벌어 주셔야 합니다. 이 흙벽 없이.”

“으음… 최대한 해 보지.”

“그럼. 시작합니다!”

콜린은 몬스터의 파도를 막고 있던 흙벽을 해지했다.

최대한 마나를 끌어모으기 위함이었다.

콰과과과……!

다시금 쏟아지는 놈들.

난 검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놈들의 진격을 막았다.

취엑!

키이익!

계속해서 놈들을 베어 봤지만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나!”

“…조금만 더!”

주문에 집중한 녀석이 내게 소리쳤다.

반말을 한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참았다.

취이익…….

키익…….

그러자 몬스터 중 몇 마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멀쩡히 달려드는 놈들도 많았던 터라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으으윽……!”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춘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럴수록 콜린의 사지가 강하게 떨려 갔다.

“…지금입니다! 숙이십쇼!”

콜린의 말에 따라 급히 몸을 숙였다.

그러자.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몬스터로 가득한 전초기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는 다름 아닌 움직임을 멈췄던 몬스터들에게서 시작된 폭발이었다.

사역 랭크 4부터 가능한 강력한 스킬.

마핵 폭발.

몬스터 체내에 담긴 마핵을 몬스터째로 폭발시키는 스킬이었다.

“허억……! 허억……!”

마핵 폭발을 시전한 콜린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코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으… 오랜만에 쓰는 거라 부담이 좀 되는군요.”

콜린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체력이 다 한 듯 쓰러진 거지 죽은 건 아니었다.

“…….”

콜린의 분전 덕에 한창 몬스터를 쏟아 내던 던전이 움직임을 멈췄다.

일단은 한숨 돌린 셈이다.

여기서 그냥 내버려둔다면 다시 땅 고르기를 시작하겠지만.

“좀 쉬어라. 이다음부턴 내가 하지.”

“어으… 부탁드립니다…….”

던전은 어느새 자그마한 문까지 갖춘 제대로 된 모습을 띄었다.

살 더미에 불과했던 땅은 단단한 돌벽이 되어 던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후.”

얀 공작의 개짓거리를 막기 위해.

용린검을 뽑아 든 채로 던전의 아가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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