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끄으윽!”
이른 새벽.
국경선 인근 전초기지에선 시원한 트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계 근무로 한창이었어야 할 시간대.
하지만 남자는 경계 근무엔 그닥 관심이 없었다.
“내, 내가아……! 적갑 기사단이었다고오!”
챙그랑!
괜히 술병을 던져 화풀이를 해 봤지만 그의 주사를 받아 주는 이는 없었다.
애꿎은 술병만 박살 나 산산조각 났을 뿐이었다.
“에잇. X팔!”
과거 적갑 기사단의 조장이었던 기사.
하지만 줄을 잘못 선 탓에 최전방인 아도르네이 후작령의 전초기지로 좌천되고 말았다.
이제 출세길은 막혔다.
평생을 전초기지 이곳저곳을 맴돌다 애먼 망령한테 칼침 맞아 죽는 것 말고는.
차라리 그만둘까 생각해 봤지만, 미친 왕 갈렌의 편을 들었던 그를 받아 줄 귀족은 없었다.
어쩌면 이런 최전선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나을지도.
“…낫긴 개뿔!”
북방 왕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 겨울 추위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추위 덕에 근무 중 약간의 술이 허용될 정도였다.
물론 이 남자는 약간이란 선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지만.
“어이!”
남자는 밖에 대기하고 있을 대원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줄을 잘못 선 거지 힘이 약해진 건 아니기에, 남자는 대원 하날 본보기로 두들겨 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뭐… 카잔 제국의 망령들 탓이라 하면 그만이다.
“내 말이 안 들리나!”
남자는 막사 밖으로 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전초기지는 여전히 조용했다.
“…….”
아무리 새벽이라 해도 이렇게 조용할 리는 없다.
오랜 세월 검을 잡아 온 그였기에, 수상함을 감지하곤 검을 뽑아 들었다.
파아앗!
술에 취했음에도 환히 빛나는 그의 오러. 다만 조금 요동치고 있긴 했다.
한 손엔 검, 한 손엔 횃불을 들자 주위가 환하게 밝혀졌다.
“나, 나으리…….”
“누구냐!”
남자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횃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순찰대원의 복장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반쯤 겨우 걸쳐 입기만 한 옷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무리 주정뱅이라지만 순찰대원 얼굴 하나 기억 못 할 정도로 해이해지진 않았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 놈은 순찰대원들을 죽이고…….
“이 자식!”
남자는 대뜸 검을 휘둘렀다.
서걱!
맨손에 오들오들 떨고 있던 정체불명의 적은 그대로 남자의 검에 양단됐다.
“…뭐야?”
터무니없이 강할 줄 알았던 적은 예상외로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이놈이 아닌가?”
다른 적이 있을 수 있었기에, 남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방금 처치한 시체.
둘로 나뉘어 있던 살점들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허억!”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지만, 잘려져 나간 살점이 다시금 붙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왜! 도와달라는데 검부터 휘두르는 거냐고!”
“뭐, 뭐라고?”
“너도 똑같은 놈이야.”
다시금 제 모습을 갖춘 베닐은 그대로 조장에게 달려들었다.
***
콰앙!
부서진 새장 주위로 벼락처럼 뭔가가 떨어졌다.
“끄악!”
재수 없게 녀석들의 발밑에 있던 새장 관리인은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었다.
하지만 이내 피어오른 붉은 흙먼지에 놈은 조용히 숨을 거뒀다.
부옇게 솟아난 흙먼지가 가라앉자 놈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곱이라.’
저마다 다른 복장을 한 일곱의 남녀.
딱히 얼굴을 가리고 있진 않았다.
덕분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놈들의 낯빛이 눈에 띄었다.
그런 놈들의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가 저런 눈빛을 띄지 않을까.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량이 하나같이 상당했다.
‘이런 놈들이면… 바르자니가 얻어터진 것도 이해 가는군.’
“크하핫! 이 멍청한 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몰라도! 이분들께서 온 이상…….”
파각!
신나서 떠들던 구경꾼 녀석의 머리가 그 자리에서 수박 터지듯 폭발했다.
“허억…….”
‘마법인가?’
무자비한 놈의 행태에 구경꾼들은 입이 얼어 버렸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녀석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을 뵈러 왔다고 했나.”
“후후. 그래.”
“따라와라.”
“…그래 그럼.”
놈들은 생각보다 쉽게 응했다.
바르자니마냥 몇 대 얻어터지는 건 아닐까 했는데.
군말 없이 공작과 자릴 마련해 준다는 놈들을 따라 나도 조용히 뒤따랐다.
“그나저나 여긴 삭막하구만. 나 옛날에 살던 곳보다 더하다고 해야 하나.”
옛 임페라 백작령보다 처참한 지르하겐의 풍경에 감상을 더했다.
거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긴 했으니까.
어찌 보면 멸망한 지구랑 더 가깝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다들 말수가 적은 편인가 보구만.”
놈들은 앞장선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놈들을 따라 걷길 수 분.
모조리 폐허가 된 지르하겐 속에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주위에 높다란 기둥까지 세워져 신전 비스무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한 채.
아이소테르에서 보던 것과는 건물 양식이 완전 딴판이었다.
“여긴가?”
“들어가라.”
“그래그래. 들어가야지.”
놈들은 어느새 날 앞장세운 채 건물로 날 안내했다.
말이 안내지 사실상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거절하면 몸 성히 보내 줄 생각은 없단 거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횅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가구 한 점 없이 횅한 건물 내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왔군!”
“응?”
텅 빈 공동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메마른 분수대 하나.
거기에 반쯤 걸터앉은 한 남자가 날 보고 환히 미소 지었다.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
머릿결은 짧진 않았지만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회색빛 두건만 걸친 채였지만 추레해 보이지는 않았다.
묘한 분위기가 풍겨 오는 남자다.
그리고 어두운 공동을 환히 비출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은발.
이 세상에 은발이 한둘은 아니었다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마법에 특화된 베로니아 가문 출신일지도 몰랐다.
턱.
날 안내하던 놈들은 문을 닫은 채 밖에서 대기했다.
그렇다는 건 저 멀쩡해 보이는 놈이…….
“당신이 얀 공작인가?”
“후후! 그렇지! 내가 그 공작이야!”
“…진짜?”
에런골드마냥 분위기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메마른 분수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그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얀 공작과는 많이 달랐다.
‘누구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 건 분명했다.
겉으로 보기엔 소설 속 묘사되던 오베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오베론쯤 되면 겉모습 바꾸는 건 일도 아닐 터.
녀석의 정체를 추측하려다 보니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아무튼 만나게 돼서 반갑네! 이안!”
“…….”
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목에 걸고 있던 아티팩트를 매만졌다.
분명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하! 뭘 그리 놀라고 그래? 어차피 나중 가면 말할 생각 아니었나?”
“…괜히 공작이란 이름을 내건 게 아니긴 했나 보군.”
“흐흐흐…….”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놈이다.
굳은 얼굴로 놈을 탐색하려 했지만 놈을 바라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왜 그리 굳어 있고 그래? 나 만나고 싶다 하지 않았어?”
“…….”
“난 만나고 싶었는데.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 아니야?”
“…뭐라고?”
순간 녀석의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지옥에서 살아남았다고?
지옥이라면 설마……?
과거의 나, 이진수는 지옥에서 살아남았고, 결국 굶어 죽었다.
그걸 아는 이는 이 세상에 단 둘밖에 없을 거다.
나, 그리고 날 이 세상으로 보내 버린 누군가.
“그럼! 황금 은행의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고, 거지 백작령인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나?”
“…….”
마치 날 놀리는 듯한 발언.
정말 이놈은 내 정체에 대해 아는 걸까?
그렇다면….
스릉!
난 지체 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오러를 사정없이 방출시킨 채로, 녀석을 향해 검을 겨눴다.
“네놈. 정체가 뭐지?”
“뭐긴! 얀 공작! 알고 찾아온 거 아니었나?”
“이 새끼가……!”
검은 종이 한 장 겨우 들어갈 만한 위치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공작은 미동도 없었다.
“흐흐! 왜 멈추고 그래?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X팔.”
난 하는 수 없이 검을 거뒀다.
“흐흐흐.”
놈은 여전히 밖에 서 있는 부하들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만큼 날 상대할 자신이 있다거나.
내가 함부로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단 걸 아는 거겠지.
“그렇게 똥 씹은 얼굴로 있지 말고. 우리 정보 교환이나 해 보는 게 어때?”
“…뭐?”
“싫음 말고.”
놈에게 휘둘리는 느낌이 다분했지만 어쩔 수 없다.
공작에 대해 아는 정보가 난 너무 적었으니까.
“…원하는 게 뭐지?”
정체를 물어봐야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정보라도 얻어 내야 했다.
카잔 제국에 새로이 발호한 얀 공작의 세력.
놈들과 국경선을 마주한 이상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잘 구슬려 보는 게…….
“원하는 거는… 한 여자야. 누군지는 비밀이고.”
한 여자라.
누군지 궁금했지만 일단 넘어가자.
적어도 아이소테르 침공이 일 순위는 아니란 거니까.
“꽤나 순정파구만 그래.”
“흐흐! 그런가?”
“이제 네 녀석 차례군.”
“음…….”
공작은 미간에 주름까지 잡아 가며 신중하게 질문을 골랐다.
그리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블루 핀 와인이랑 레드 핀 와인 중에 뭘 더 좋아해?”
“…하.”
“왜 웃어! 난 진지하다구.”
어이없는 질문의 내용과 달리 녀석의 표정은 진지했다.
귀한 질문을 이딴 식으로 낭비한다는 건.
나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다는 의미였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흐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 우리 대화는 여기까지야.”
“…굳이 따지자면 블루 핀 와인이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의 장단에 맞춰 줬다.
“이제 다시 내 차례다. 넌 오베론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건가?”
놀아 주는 건 놀아 주는 거고, 정보를 빼 오는 건 빼오는 거다.
지금 공작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등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녀석이 오베론을 따르는 자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오베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줄거릴 뒤틀 만한 미친 존재니까.
“오베론……?”
오베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지금껏 능글맞게 미소 짓던 녀석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
녀석의 낯빛에선 분노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군.”
“질문은 여기까지 하지. 기분이 안 좋아져서 말이야.”
얀 공작은 피곤해진 듯 메마른 분수대에 걸쳐 앉았다.
“…….”
“아! 내 차례인 걸 깜빡했네.”
그러다 다시금 환한 낯빛으로 돌변하곤.
탁!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사라락!
그러자 주윌 에워싸고 있던 건물 벽이 모래 바람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무, 무슨……?”
“후후.”
이 건물이 환영이었던 건 아니다.
그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건물을 날려 버릴 만큼 녀석이 강했을 뿐.
아마 놈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이 건물과 함께 나도 날아가 버렸을 거다.
“나도 질문 하나 하지.”
“이게 대체 뭔…….”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노닥거릴 때야?”
“…….”
바로 그때.
사라져 버린 건물 벽 너머로 환한 빛기둥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빛기둥이 시작되는 건 다름 아닌 아이소테르.
아도르네이 후작령이 자리 잡고 있는 땅이었다.
***
“이, 이 괴물 놈…….”
조장의 수많은 검격에도 적은 죽지 않았다.
마치 인간 이상의 존재라도 된양, 베닐의 사지는 아무리 베어도 다시금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퍼억!
“커…헉……!”
베닐의 주먹이 조장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다만 조장의 상처는 메워지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숨을 거뒀다.
“…….”
베닐은 조장의 배를 꿰뚫은 주먹을 내려다봤다.
수많은 순찰대원의 피로 뒤덮인 왼손.
하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리 잡고 있던 룬 문양이 없다. 거기에 같았다면 상상도 못 할 괴력까지.
“난…….”
지금의 난 뭘까.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러면서 점점.
베닐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파스스…….
이내 형태도 없아 녹아내린 베닐의 자리엔 하얀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일어나선 안 되는 대재앙.
던전화.
그간 평화에 찌들었던 아이소테르의 땅 위로 새로운 던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