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어찌 보면 익숙하다 해야 하나.
멸망한 카잔 제국의 땅은 옛 지구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마지막 대격변 이후로 이런 모습이었지.’
부서진 건물 잔해들로 가득한 황무지.
과거 지르하겐이라 불리우던 거대 교역소가 있었던 곳이다.
제국과 아이소테르를 잇는 길목이다 보니 자연스레 교역이 활발할 수밖에 없는 위치다.
지금이야 흙먼지만 흩날리는 폐허지만.
정보망에 따르면 얀 공작이 세를 불린 곳도 이곳 지르하겐이라 했다.
교역소다 보니 이래저래 아티팩트도 많았을 테고, 세를 불리기엔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곳이다.
“흠.”
좀 더 들어가자 낡은 판자집 하나가 보였다.
나무를 대충 덧댄 창틈새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있긴 했네.’
다른 사람들과 모여 사는 곳 같지는 않았다.
쓰레기들로 가득한 폐허 가운데 홀로 지어진 집.
난 조심스레 판자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뭐야?”
그러자 덥수룩한 흰 턱수염의 노인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꾀죄죄한 땟국이 줄줄 흐르는 노인이었지만 일단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문을 열어젖힌 왼쪽 손에 룬 문양도 제대로 새겨져 있었고.
“콜린의 소개로 왔다.”
“…후후! 콜린? 난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만?”
“…….”
“그하핫! 농담이야! 오랜만에 띨빵한 놈을 보니 골려 주고 싶어져서 말이지!”
“…띨빵?”
“그래! 이 지옥에서 한가롭게 노크나 하고 있다니! 그흐흐!”
노인의 말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노크 좀 했다고 띨빵이라니.
한편으론 동정심이 일었다.
카잔 제국이 멸망한 뒤론 일말의 인간성조차 허용되지 않는 땅이란 뜻이었으니까.
“그렇담 당신이 까마귀 학살자 바르자니인가?”
“그흐흐! 그렇지!”
까마귀 학살자 바르자니.
여기서 까마귀는 프로스트 랜드나 프란츠의 정찰대를 뜻하는 은어다.
그런 자들을 학살했다는 건데…….
‘보기보다 꽤나 터프한 노친네구만.’
쾅!
바르자니는 문을 세게 열어젖히곤 판자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는 의미 같았다.
녀석은 헝겊을 엮어 놓은 듯한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그리곤 방금까지 마시고 있던 걸로 보이는 술병을 다시금 입에 가져다 댔다.
“한입 하겠나?”
“아니.”
“그흐흐… 싫음 관두고!”
아무리 비위가 좋다지만 저걸 먹었다간 속을 게워 낼 것 같았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그래.”
난 준비해온 배낭을 꺼내 들었다.
촤라락!
배낭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주로 생필품 위주였다.
면도용 손칼, 비누, 양초…….
당장 후미진 마을 시장에만 들려도 살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바르자니는 생필품들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오! 많이도 가져왔군!”
하루가 멀다 하고 쌈박질하기 바쁜 땅에선 다들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서걱. 서걱.
“으음!”
놈은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턱수염을 깎아 보기까지 했다.
수염이 반쯤 밀리자 생각보다 젋어 보였다.
“쓸 만하구만!”
“이것도 있지.”
잠시 밖으로 나가 바닥에 내려앉은 눈을 한 움큼 집어 왔다.
내린 지 얼마 안 된 터라 순백색의 빙수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물통에 담겨 있던 진득한 액체를 뿌렸다.
푸르스름하고 달달한 향이 물씬 풍겨져 올라왔다.
혹시 몰라 챙겨온 블루핀 시럽.
눈 위에 낭낭하게 뿌려주니 금세 빙수 한 그릇이 완성됐다.
“이건… 뭐지?”
“먹어 봐라.”
“호오!”
달달한 향에 바르자니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빙수를 한 줌 퍼먹었다.
상상 이상의 달달함에 바르자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어어엇!”
“고향에서 가져온 과일로 만든 거다. 가끔 눈 내릴 때 뿌려 먹어 보라구.”
“흐흐! 아주 좋아!”
얼린 우유에 뿌려 먹으면 더 맛있겠다만.
이런 폐허에서 우유 구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니까.
“띨빵한 놈치곤 제법이군! 좋아! 네 녀석 부탁. 한번 들어 봐 주도록 하지!”
“후후.”
띨빵하단 말이 좀 거슬리지만, 정보를 구하기 위해선 녀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녀석을 만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얀 공작이란 자에 대한 정보.
외지인도 카잔 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긴 하지만, 현지인에게서 구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줄곧 카잔 제국에서 살아왔던 이 노친네라면 정보의 질 자체가 다를 터.
금화로 환심을 살까 생각도 해 봤지만, 여긴 무법지다.
금화 쪼가리야 노랗게 생긴 금속 파편에 지나지 않는 땅.
때문에 양초 같은 생필품이 더 귀했다.
‘소설에서도 그랬지.’
디아가 카잔 제국으로 넘어갈 당시 이런 묘사가 있긴 했다.
소설 속 정보꾼은 바르자니가 아니었지만, 달달한 거에 사족을 못 쓰는 건 같아 보였다.
찹. 찹.
“으음!”
바르자니는 블루핀 빙수가 맘에 드는지 연신 퍼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으읏!”
그러다 머리가 찡한지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빙수를 퍼먹었다.
“그렇게 맛있나?”
“으음. 난 신경 쓰지 말고. 어디 한번 얘기해 보라구. 원하는 게 뭔지.”
“얀 공작. 그자에 대해 알려 줬음 하는군. 직접 만날 방법이 있다면 더 좋고.”
“그흐흐. 역시 그놈인가? 요즘 들어 궁금해하는 놈들이 많군!”
“…나 말고도 그 자를 찾는 이들이 있었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흐흐흐!”
“그럼 어쩔 수 없고.”
녀석은 빙수 한 그릇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얀 공작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나타난건 수개월 전.
갈렌이 에런골드를 죽였던 떄와 묘하게 시기가 겹쳤다.
“흠.”
“무지막지한 놈이더군. 지르하겐에 힘깨나 쓴다던 놈들이 공작 부하 놈들한텐 쪽도 쓰고 모두 죽어 버렸으니 말이야.”
“공작을 직접 본 적은 없나?”
“…딱 한 번 있긴 하지.”
“호오.”
“놈이 내건 제안은 간단했지. 자신을 따르든가, 아님 죽든가. 나한테도 그 제안이 오긴 했거든.”
“…그래?”
그럼 지금 살아 있으니 얀 공작이란 놈을 따른다는 건데.
“물론 따른다고 했지. 목숨이 두 개는 아니니까.”
“…….”
“그하핫! 너무 쫄지 말라구! 그냥 안 까불고 조용히 살겠다니까 돌려보내 주더군! 뭐 그때까지 흠씬 두들겨 맞긴 했지!”
바르자니는 상의를 걷어 몸을 드러냈다.
큼직큼직한 흉터가 그의 온몸에 가득했다.
“그때 한 번 보긴 했지. 뭐 구석탱이에 처박혀서 떠들기만 하던 놈이었지만.”
“부하 놈들이 꽤나 강했나 보군.”
“뭐… 그랬지. 나도 힘 좀 쓴다 생각했는데 반격 한 번 못해 보고 얻어터지기 바빴으니.”
“놈들 랭크는?”
“흐흐! 검술 랭크 5인 내가 쪽도 못 쓰고 얻어터졌으니. 그 이상이었겠지?”
‘꽤 쎄네.’
“뭐 때문에 자꾸 놈을 캐내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라구.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놈이어도 심장이 꿰뚫리면 죽기 마련이니까.”
“상당히 친절하구만그래.”
내 말에 바르자니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놈 고향 과일로 만들었다는 게 꽤나 맛있어서 말이야! 괜히 뒈졌다가 다신 못 먹게 되면 억울할 것 같거든!”
“그것 참 고맙네.”
“그흐흐… 나중에 또 보자구?”
바르자니는 문 밖으로 배웅까지 나와 가며 내게 인사했다.
파팍.
녀석은 또다시 눈을 퍼 담아 빙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날 배웅하려고 문 밖으로 나온건 아니었나 보다.
얀 공작.
실체가 없는 가상의 인물인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검술 랭크 5인 녀석이 쪽도 못 쓰고 털렸다는 거면…….
‘골치 아프네.’
전원 랭크 5 이상의 부하라.
누군가랑 많이 겹치는 대목이다.
‘영겁의 기사단.’
고대인의 유물을 통한 편법으로 무지막지한 기사단을 꾸린 제국.
어쩌면 얀 공작도 편법을 발견하곤 부하들을 꾸린 걸지도 모른다.
그럼 골치 아파진다.
영겁의 기사단에 준하는 무력이라면 카잔 제국의 망령들을 규합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리고 그 칼 끝이 아이소테르로 향한다면…….
‘대체 누구지?’
황금 은행의 경우엔 내 존재가 소설의 줄거릴 크게 비튼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갈렌에게 보내진 한 장의 쪽지.
이건 분명 누군가 스토리에 개입한 놈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기까지 묘하게 겹치는 걸 보면 얀 공작이란 놈이 설마……?
‘왜? 오베론이 왜 그런 짓을?’
지금 시점에선 확신 할 수 있는게 없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것 말고는.
* * *
지르하겐은 웬만한 영지만큼이나 넓었다.
바르자니의 판자집이 있던 건 지르하겐의 외곽.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판자집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사람 사는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지르하겐의 사람들은 겨울이라 다들 두툼한 거적대기를 걸친 채 거릴 나다니고 있었다.
살기 팍팍한 곳이라 다들 인상이 험악했다.
놈들 중 하날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뭘 봐?”
“…….”
“뭘 보냐고 이 새ㄲ…….”
“죽기 싫다면 그냥 가라.”
허리춤에 검을 보여 주자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에잇! 퉤!”
끈적한 가래침까지 한 번 뱉어 주곤 되돌아가는 녀석.
한 대 쥐어 팰까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이목을 끌 때가 아니니까.
“와아아…….”
저 멀리서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뭔갈 구경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대충 엮어 만든 커다란 새장.
그 안엔 피투성이의 남자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싸워!”
파지직!
“으윽!”
새장을 관리하는 듯 보이는 한 놈이 지팡일 찔러 넣었다.
지팡이 끝이 전격으로 반짝이더니 새장 속 한 남자의 몸에 붉은 상처를 남겼다.
“이 새장에서 나갈 수 있는건 단 하나다! 그러니 얼른 한 놈을 죽이고 나와 보라구! 크하핫!”
“…으아앗!”
다시금 새장 속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처절한 합이 오갔다.
“이건 뭐지?”
구경꾼 한 놈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뭐? 모르면 꺼ㅈ…….”
콰아악!
“으윽!”
아니나 다를까, 험한 말이 튀어나오길래 손아귀에 힘을 잔뜩 실었다.
“까,까마귀 놈이랑 들개 놈을 주워서…….”
까마귀는 북부의 정찰대, 들개는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순찰대인 듯했다.
몰래 국경선을 넘었다 놈들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쯧.”
“허윽!”
붙잡고 있던 어깨에 손을 떼자 녀석은 분한 얼굴로 슬금슬금 자릴 피했다.
퍼억! 퍽!
둘 모두 체력은 한계에 달한 듯했다.
싸움이 끝난다고 치료를 해 줄 리는 없을 테고.
둘 중 하나가 나온다 하더라도 살아 돌아가긴 글러 보였다.
파지직!
새장에 손을 얹자 전격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어이! 타 죽고 싶어? 당장 손 떼!”
새장 관리자가 내게 소리쳤다. 가끔 구경하겠다고 새장에 달라붙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난 구경이나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콰드득!
짜릿하게 터져 나오는 새장을 그대로 뜯어 냈다.
“이,이 미친 놈이……!”
“다, 당신은…….”
새장 안에서 죽어라 싸우던 둘은 내 등장에 싸움을 멈췄다.
다행히 하룬이 준 아티팩트 덕에 얼굴을 알아보진 못했다.
“좀 쉬고 있어라.”
“아아…….”
둘은 내 말에 안심이라도 한 건지, 아님 체력이 한계에 달한 건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둘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미약하게나마 박동이 느껴졌다.
삐익!
놈은 서둘러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불었다.
순식간에 새장 주위로 놈과 한패로 보이는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아이소테르? 프란츠? 프로스트 랜드?”
“…….”
흉악한 병장기를 든 채 날 노려보고 있는 녀석들.
아직까진 그리 강해 보이는 놈들은 아니었다.
그럼 이놈들한테 볼일은 없다.
…콰앙!
강하게 발을 한 번 구르자 새장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새장 주윌 에워싼 놈들의 몸뚱이 하늘로 비산했다.
“으악!”
“이, 이 자식이……!”
죽이려고 한 공격은 아니었기에 다들 쓰러진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바르자니에게서 얻은 정보로 알아낸 게 하나 있다.
얀 공작.
그는 무작정 다른 이들을 짓밟고 죽이는 놈이 아니다.
노크 한 번 했다고 어수룩하단 소릴 듣는 게 카잔 제국.
그런 세상에서 자신을 따르든가, 아님 죽든가.
양자택일의 기회를 준다는 건 상당히 자비로운 놈에 속한다는 거다.
초면부터 날 죽이려 들진 않을거란 소리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기네들 부하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대화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거란 소리였다.
아니면 뭐…….
‘도망치면 되겠지.’
난 쓰러진 채 부들거리는 놈들에게 소리쳤다.
“얀 공작을 만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