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카잔 제국의 옛 영토와 맞닿은 아도르네이 후작령.
국경선이 꽤나 넓은 터라 모든 지역을 성벽으로 막을 순 없었다.
때문에 국경선 곳곳에 자리잡은 전초기지에서 순찰을 돌며 제국과의 통행을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 후미진 지역엔 나름대로 여관도 있어 순찰대원이나 상인들이 목을 축이곤 했다.
국경선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여관.
[케이단 여관으로 저녁 시간에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콜린-]
이슬린이 전해준 쪽지를 다시 한번 살폈다.
“여긴 것 같은데.”
아침부터 내린 눈발이 포근하게 내려 앉은 작은 여관.
고즈넉한 산골의 작은 산장처럼 생긴 여관이다.
초입엔 말을 매어 둘 마구간도 있고 병장기를 수리할 도구들까지 미약하게나마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끼익.
오래된 나무문을 열자 여관엔 먼저 온 이들이 몇 보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상인, 용병, 순찰대 등 다양했다.
그중 한데 모여 죽을 퍼먹고 있던 녀석들이 이쪽을 흘긋 바라봤다.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문양, 푸근한 인상의 개가 그려진 인장이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
놈들은 날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아마 아도르네이 후작가에서 온 순찰대 녀석들일 거다.
다행히 날 알아보진 못한 듯했다.
‘쓸 만하군.’
목에 매달아 놓은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하룬이 만들어 준 아티팩트다.
덕분에 눈코입 위치가 좀 비뚤어지게 보이긴 했다만, 정체를 안 들키는 게 중요하니까.
여관을 두리번거리다 구석에 홀로 앉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일거리나 찾으러 온 용병 같았지만 이슬린이 알려준 행색과 일치했다.
자연스레 녀석의 앞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시죠.”
“그래.”
녀석을 따라 여관을 나올 때까지 순찰대원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마 국경선을 넘으려는 상인과 용병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원칙적으론 카잔 제국의 옛 땅에 드나드는 게 불법이긴 했지만, 몰래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이 꽤나 많았다.
그럴 때마다 순찰대원들에게 뒷돈을 찔러 주니 녀석들 입장에선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후우웅…….
벌써 겨울이다.
차가운 바람에 쌓여 있던 눈이 다시금 흩날리고 있었다.
여관 밖은 어느새 어둠이 깔려 적막만이 맴돌았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눈만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안 임페라 백작님.”
“음. 쪽지엔 콜린이라 적혀 있었는데. 맞나?”
“예. 콜린으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제야 남자는 내게 예의를 갖췄다.
덥수룩한 턱수염 덕에 한 겨울에도 따뜻할 것만 같은 남자다.
이슬린이 말해 둔 솜씨 좋다던 길잡이 녀석이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후후.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쿠스 녀석을 손봐 주실 때 뵈었지요.”
“아. 그랬었나.”
처음 이슬린의 클랜을 흡수하려던 그때.
쿠스란 쭉정이 녀석이 반기를 드는 바람에 귀찮았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 쿠스 편에 섰던 놈들 팔다릴 으스러뜨려 놓긴 했었는데.
지금은 잘 붙었는지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푸르륵!
콜린은 마구간에 매어 둔 말을 끌고 왔다.
내가 타고 왔던 녀석까지 해서 말 두 마리가 눈 덮인 산속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우선 국경선 인근 상황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말에 탄 채로 콜린에게서 그간의 설명을 들었다.
얀 공작이란 녀석의 군대가 국경선을 넘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한 것까지.
“전멸했다고?”
“네. 시체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얀 공작은 없었구요.”
“그게 뭔…….”
애써 모은 병력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날려 버렸다고?
대체 왜 그런 짓을…….
“자세한 내막은 국경선 너머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
“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뭐지?”
“국경선 너머서부턴 백작님 홀로 움직이시겠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혼자 확인해 봐야 할 게 좀 있어서.”
“음… 그럼 국경선 넘을 때까지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콜린은 말에 매어 둔 배낭에서 망토를 꺼내 들었다.
희힌하게 생긴 룬 문양이 새겨진 망토였다.
아티팩트라 보기엔 꾀죄죄한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건 뭐지?”
“이제부터 백작님과 전 콜린 상회 사람입니다.”
“오호.”
망토에 새겨진 룬 문양은 부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문양이었다.
상단인 척 국경선을 넘겠다는 건가.
물론 카잔 제국 땅에 제대로 된 상단이 드나들진 않는다.
대부분 상단 이름을 내건 도굴꾼이나 다름없다.
강성했던 카잔 제국의 유물을 파내 팔아 치우는 이들이다.
대륙 전첼 집어먹을 뻔한 놈들인데,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물 중에서도 값나가는 게 꽤나 많았다.
개중엔 고대인의 유물이 섞여 있을 때도 많았고.
그렇게 망토를 걸친 채 국경선 인근으로 향했다.
“일부러 천천히 가는 건가?”
“네. 괜히 속도를 냈다간 순찰대원들이 수상하게 보곤 더 쫓아올 겁니다. 차라리 천천히 가는 편이 낫죠.”
어둑한 시간대라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었나 보다.
두두두…….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적막을 깼다.
“정지!”
순찰대원의 외침에 콜린이 말고삘 잡아당겼다.
나도 따라서 말을 멈추자 순찰대원 여럿이 우릴 에워쌌다.
“여기부턴 통행이 금지된 땅이다. 돌아가라!”
허리춤의 검을 언제라도 뽑으려는 듯 녀석들은 검집에 한 손을 얹은 채 소리쳤다.
처음 겪는 일이라 살짝 긴장되긴 했지만, 콜린의 안색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후후. 이런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나으리.”
“…크흠. 콜린 자네였나?”
“예. 이번에도… 용돈 벌이가 좀 필요해서 말입니다.”
순찰대원들은 금세 콜린을 알아보곤 경계를 풀었다. 덩달아 콜린 옆에 있던 나한테도 경계심을 거뒀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로군?”
“아, 예. 아무래도 혼자 다니려니 손이 부족하지 뭡니까? 친구 녀석 아들놈이 요새 놀고 있다길래 일이라도 배울 겸 왔습죠.”
“…잘 부탁 드립니다.”
친구 아들이라니. 그런 설정인가.
“흠. 한 명이면 몰라도 둘은…….”
“여부가 있겠습니까.”
콜린은 배낭에서 금화 열두 닢을 꺼내 순찰대원에게 건넸다.
순찰대원 한 명당 2골드씩 돌아갈 금액이었다.
통행료치곤 꽤 비쌌다.
1골드가 소작농 한 달 임금이니까.
순찰대원들로선 도굴꾼 둘 내보내고 그만한 돈을 받는 거다.
“물론 지금까지처럼 돌아올 땐 나으리께 다시 한번 더 인사 드리러 오겠습니다.”
“크흐흐. 내가 이래서 당신이 좋다니까.”
순찰대원들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그럼. 몸조심하라구. 저 너머엔 미친놈들이 득실댈 테니까.”
“걱정까지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흐흐, 또 보자구.”
순찰대원들은 그렇게 금화를 주섬주섬 챙겨 넣곤 다시 전초기지로 되돌아갔다.
콜린은 놈들이 돌아가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끝났군요.”
“순찰대원 한 놈당 2골드라니. 그래서 돈이 남나?”
“도굴한 유물들을 팔아도 별 남는 건 없는 수준입니다만.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죠.”
“흠.”
‘진짜 도굴을 하는가 보네.’
뭐 그 정도 자잘한 부수입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돈 몇 푼 챙기는 것쯤이야.
밤길을 따라 걷길 수 분.
마침내 후작령과 제국의 국경선을 마주했다.
사람 키 높이 정도로 그닥 높지 않은 목책.
그사이로 자그맣게 난 구멍이 눈에 띄었다.
말이 지나기엔 좁은 통로였다.
대충 목책에 말고삐를 묶어 놓은 채로 콜린과 난 국경선을 넘었다.
“후.”
목책 하나 사이로 갈라진 땅.
주변 풍경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여길 직접 오게 될 줄이야.
“드디어 도착했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소설에서 카잔 제국의 강성했던 때의 묘사들이 떠올랐다.
작은 마을 하나부터 황성까지 찬란하게 빛나던 과거의 영광.
지금 제국의 땅에선 영광 따윈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버려진 처참한 폐허.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잘 닦여 있었을 것으로만 추정되는 푹푹 메인 흙바닥뿐.
“그럼. 전 이만 여기서 인사 드려야겠군요.”
“그래. 일주일 뒤에 다시 보자구.”
“모쪼록 원하시는 바, 꼭 이루시길 기도 드립니다.”
“후후.”
꽤나 괜찮은 녀석이다.
몇 년 전 쭉정이 녀석한테 붙었다 얻어터진 놈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한 가지 말씀 드리자면.”
콜린은 제 갈 길 가려다 말고 한마디 덧붙였다.
“제국은 넓습니다. 어쩌면 아이소테르나 다른 왕국 연합들보다 더.”
“뭐. 그렇겠지.”
“그럼 이만.”
콜린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곤 나와 다른 길로 향했다.
“후.”
오랜만이다. 홀로 이런 폐허를 돌아다니는 건.
“어디 보자.”
이슬린이 만들어 준 지도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제국의 영토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크기만 놓고 본다면 아이소테르 전역을 합쳐도 됨직한 넓은 땅.
다행히 얀 공작이란 놈은 카잔 제국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북쪽으로 좀 가면 되는 거구만.”
혹시 모를 대참사는 막아야 했기에 허리춤에 용린검을 꼭 붙잡은 채로 멸망한 제국의 땅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크흐흐! 이게 얼마냐!”
“그러게나 말이야! 콜린 그 녀석. 미워할 수가 없다니깐!”
순찰대원들은 두둑한 금화 주머닐 챙겨 든 채 흡족한 미소를 내지었다.
한 달을 꼬박 채워야 들어올 봉급이 한순간에 들어왔는데 싫을 수가 있나.
심지어 도굴꾼이 되돌아올 때도 한 번 더 받을 테니, 봉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조장한테는 뭐라 할까?”
“흥. 알게 뭐야. 맨날 기지에서 술만 퍼마시는 놈 따위.”
“하긴. 그 재수 없는 새끼. 줄 잘못 섰다가 최전방으로 내쫓긴 놈 주제에 고고한 척 우리들이랑은 말도 안 섞잖아?”
“그러니깐! 순찰도 안 나가, 훈련도 안 해, 그러면서 술만 퍼마셔. 내 언제 그 자식 한번 손봐 주고 만다. 계급장 떼고.”
“푸하하! 계급장 떼면 뭐, 랭크가 높아지냐? 우리 같은 놈들 한 무더기 붙어도 조장 녀석은 못 이길걸?”
“쯧. 말이 그렇다는 거지.”
순찰대원들은 으레 그렇듯 상사 뒷담이나 까며 겨울 밤 추위를 녹여 냈다.
“빨리 순찰 끝나면 뜨끈한 술이나 한잔…….”
벌써부터 술 한잔할 생각뿐인 그들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응?”
분명 사람의 신음소리다.
귀찮은 일이 늘었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일단은 순찰이 그들의 일이다.
스릉!
녀석들은 검을 뽑아 든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 누구냐!”
“사, 살려 주십쇼….”
“…사람?”
거기엔 벌거벗은 채 쓰러진 한 남자가 있었다.
눈 발자국을 보아하니 카잔 제국에서 넘어온 게 분명했다.
“제, 제국 망령 놈 아니야?”
“하잇 참. 귀찮게 됐네.”
이따금 카잔 제국 땅에서 도망쳐 온 이들이 발견되긴 했다.
놈들에 대한 처우는 간단했다.
즉결 처형.
제국에서 넘어온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형시킨다.
그게 순찰대원이 할 일이었다.
다 죽어 가는 녀석을 건드리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벌거벗은 채 이 눈발을 헤쳐 지나왔으면 이미 살길 바라는 건 어려웠다.
“쯧.”
순찰대원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부디. 다음 생엔 평온한 세상에서 태어나라.”
짧게나마 명복을 빌어 주곤 대원은 검을 녀석의 등 뒤로 찔러 넣었다.
퍼걱!
“…….”
그리고 다시 검을 뽑아 들자, 녀석은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가자고.”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 원.”
“돈도 받았는데 술이나 한잔하지 뭐.”
“그래야겠네.”
“…….”
등 뒤로 심장을 꿰뚫린 녀석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슥……!
빠른 속도로 쓰러진 녀석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이미 끝났다 생각한 순찰대원들은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푸히힝!
순찰대원의 말 하나가 이변을 제일 먼저 알아챘다.
“이, 이놈 이거 왜 이래?”
우드득!
“…어?”
별안간 순찰대원 하나의 목이 90도로 꺾였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대처에 나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
차가운 눈발이 흩날리는 깊은 밤.
방금까지 순찰대원들이 서성이던 땅 위론 쓰러져 있던 한 남자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