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08화 (108/222)

108화

카앙! 캉!

“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른 아침.

잠이라도 깰 겸 매일 아침마다 프리아나와 대련을 가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시겠습니까?”

“그래. 역시 잠 깨는 덴 이만 한 게 없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 냈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5(검술), 5(마법). 3(대장장이), 3(사역), …….

밝게 빛나는 룬 문양.

거기엔 그간 이 세상에서 남겨 온 발자취가 담겨 있었다.

두 번째 벽을 넘긴 검술과 마법 랭크.

그 외에도 자잘한 랭크들이 무수하게 떠올랐다.

검술과 마법 랭크 빼곤 딱히 벽을 넘긴 랭크는 없었다.

‘잡캐라고 해야 되나.’

미친 왕 갈렌을 처치한 이후로 눈에 띄는 랭크 상승은 없었다.

랭크 4와 5를 구분 짓는 두 번째 벽.

거길 뚫은 이후론 수개월째 정체기에 빠졌다.

절박함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처음 이 망할 세상에 왔을 때보단 랭크 상승에 대한 욕구가 줄긴 했다.

단전까지 생긴 마당에 편법으로 랭크를 올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만.

딱히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영지 관리하느라 바빴다는 핑계도 댈 순 있겠지만…….

영 개운치 않아 보이는 내 얼굴에 프리아나가 물었다.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으음. 뭐 없는 건 아닌데…….”

그런 반면 녀석은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상쾌한 얼굴이다.

녀석은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벽의 늪에 빠지셨군요.”

“벽의 늪?”

프리아나는 미소 지은 채 고갤 끄덕였다.

벽의 늪.

소설에서도 그런 게 있긴 했다.

상위 랭크의 벽을 뚫지 못하고 정체 된 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벽을 뚫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재능이 모자란 이유일수도 있고, 심리적인 이유일수도 있다.

내 경우엔 아마…….

“안일해진 건가.”

그간 살아남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다.

고대인의 영약도 먹어 보고 우로보로스의 눈물로 뻥튀기까지 해 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검술과 마법 랭크 모두 5.

왕립 기사단에서도 어마어마한 강자라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영지도 아이소테르 내에서 손에 꼽는 백작 가문으로 거듭났다.

콰악.

“…….”

아무 말 없이 용린검을 꼭 붙잡았다.

프리아나는 그런 내게 한마디 덧붙였다.

“조급해하실 거 없습니다. 오히려 그건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저 차분히 백작님의 마음이 가는 길을 따르시다 보면, 언젠가 세 번째 벽을 뚫으실 수 있을겁니다.”

“후후. 자랑하는 거야? 지금?”

“흐흐! 그렇게 보이셨습니까?”

프리아나는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하기야 녀석도 세 번째 벽 뚫겠다고 온갖 난리는 다 쳐 봤다.

대전제도 나가 보고, 적갑 기사단에도 들어가 보고, 심지어 시골 깡촌에 다 망해 가는 백작가를 위해 일도 해 봤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 얻게 된 경지.

다 죽어 가는 말라깽이 몸뚱이가 단 몇 년 만에 프리아나와 같은 경지를 꿈꾼다는 게 우스운 거다.

“뭐. 조급해할 건 없지. 아직까지는.”

“…그렇겠죠?”

아직까지는. 이라는 말이 신경 쓰이는 듯 프리아나가 고갤 갸웃했다.

“빈트하겐 그 녀석은 잘 있나?”

“…네.”

“칩거를 깰 생각은 없고?”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건 본인의 손으로 아이소테르를 망칠 뻔한 터라……. 죄책감이 상당하시더군요.”

“양심은 있는 놈이네.”

“크흠…….”

프리아나는 말을 아꼈다.

뭐 이해는 간다. 적갑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

그자라면 아이소테르의 모든 기사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전설적인 기사니까.

지금 적갑 기사단은 갈렌에게 저항했던 이들 중 고참들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글렌 말은 좀 들어서 다행이네.’

“그럼…….”

슬슬 자릴 털고 일어나려는데 연무장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이슬린이 은색의 단발을 찰랑인 채 걸어오고 있었다.

“백작님.”

“아. 이슬린. 일어났나?”

“네.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동향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호오.”

이렇게까지 말하러 오는 거면 뭔가 있긴 했나 보다.

“아도르네이 후작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응. 너도 와서 같이 좀 듣자구.”

“네. 백작님.”

우리 셋은 저택에 마련된 방 하나로 들어섰다.

호화스런 가구로 가득한 방. 가구 배치나 벽에 걸린 장식들이 조금은 특이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예전 베네르 쓰던 다과실을 살짝 개조한 방이었다.

벽에 걸린 아티팩트들은 그대로 뒀다.

이안이 술 처먹는데 쓰겠다며 팔아 치운 아티팩트라든가,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빼앗아 간 임페라 백작령의 아티팩트들이다.

모두 베네르 백작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다시금 제 주인에게 돌아왔다.

가구 배치가 맘에 안 들긴 했지만… 기념으로 삼을 겸 벽에 걸린 아티팩트들은 그대로 놔뒀다.

“아! 백작님! 오셨어요?”

“응.”

다과실엔 일레느가 홍차를 우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검술 훈련 후 여기서 홍차를 마시는 터라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후후, 그래.”

다행히 일레느는 예전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부모 자식 사이 같았던지라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라 해야 하나.

“저도 돕겠습니다.”

이슬린은 일레느를 따라 다과 준비를 마쳤다.

덜그럭!

둘은 프리아나를 의식해서인지 커다란 대접에 한가득 쿠키를 담아 왔다.

조막만한 찻잔에 담긴 홍차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스읍…….”

벌써 군침이 돈 프리아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검술 랭크 6이나 되는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다.

“난 이거 하나면 되겠군.”

쿠키 하날 집어 들자 프리아나도 그제야 손을 움직였다.

바삭하게 구운 쿠키와 따뜻한 홍차 한 잔.

아침 요깃거리론 제격이다.

“먹으면서 듣자구.”

탁.

가볍게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탁자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퍼져 나갔다.

이내 우리가 앉은 자릴 감쌀 때쯤, 막은 퍼져 나가는 걸 멈췄다.

혹시 모를 감청을 막기 위한 결계였다.

결계가 펼쳐지자 이슬린은 품 안에서 종일 꺼내 들었다.

“먼저 카잔 제국의 옛 영토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흐음.”

지금 시점엔 별 볼 일 없어야 맞겠지만…….

영겁의 기사단 녀석들한테 기사단의 유물에 대해 알려 준 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재료 준비가 어렵다 해도 어느 정도는 궤도에 올랐을 터.

슬슬 옛 영토를 중심으로 움직임을 보일 때가 되긴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

설마 카잔 황제의 아들 녀석을 벌써 찾은 건가?

그건 좀 곤란한데.

라크레시아 카잔.

이 소설 최후의 결전에서까지 디아와 대척점에 이르는 캐릭터.

그가 벌써 나타났다면…….

“얀 공작이라는 자입니다.”

“엥?”

“아는 자입니까?”

“음… 아니. 전혀 모르는데.”

얀 공작?

그런 녀석은 소설에서도 등장한 적 없다.

‘그냥 별 볼 일 없는 쭉정이들 중 하난가?’

아직 가볍게 볼 녀석은 아니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땅에서 세력을 갖춘 녀석이라면 꽤나 끗발 있는 놈이란 의미니까.

어쩌면 라크레시아 카잔, 그 녀석이 가명을 쓴 걸지도 모르고.

“얀 공작이란 놈에 대해서 알려진 정보는 없나?”

“네. 실은 그가 남잔지 여잔지도 확실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을 공작이라 칭하는 것 말곤 모두 베일에 싸여 있을 정도니까요.”

“흠.”

“뭐하는 자일까요?”

프리아나는 심각한 얼굴로 쿠키를 계속 집어 먹었다.

“…확인해 봐야겠지.”

“클랜원들을 더 투입시키겠습니다. 아마 곧…….”

“아니. 내가 직접 간다.”

“네?”

카잔 제국의 옛 영토에 직접 간다라.

위험한건 둘째 치고 정치적으로도 좋지 않은 선택이다.

괜히 카잔 제국과 엮였다 왕국 연합에 대역죄로 처벌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카잔 제국의 옛 영토인 이상 클랜원을 보내도 제대로 된 정보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시간도 한참 걸릴 테고.’

게다가 왕국 연합이 맘에 안 드는 놈들 투성이긴 해도, 구색으로나마 만들어진 법 아래 돌아가는 세상이다.

그에 반해 카잔 제국의 옛 영토는 법이랄 게 전무했다.

가장 큰 차이가 바로 흑마법 랭크 보유자다.

거긴 흑마법을 배우건 말건 상관없다.

그저 강하기만 하면 될 뿐.

덕분에 지역 곳곳에 흑마법사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끼리 독자적인 세력까지 꾸리고 있을 정도다.

아무리 솜씨 좋은 클랜원이라 해도 그런 땅에서 정보까지 제대로 빼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만에 하나 얀 공작이 정말로 라크레시아 카잔.

그놈이라면 가만히 내버려둬선 안 될 놈이니까.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만. 백작님이라면 아무리 말려도 맘을 바꾸진 않으시겠죠.”

“흐흐. 잘 아네.”

이슬린은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길잡이로 솜씨 좋은 녀석을 하나 붙여 드리겠습니다.”

“좋지.”

글로 보긴 했어도 카잔 제국의 옛 땅을 직접 밟는 건 처음이다.

길잡이 하나쯤은 있는 게 좋을 거다.

“아도르네이 후작가엔… 비밀로 하실 생각이신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괜한 구설수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여왕의 약혼자란 놈이 카잔 제국 땅에 드나든다는 건.”

“네. 그럼 최대한 비밀리에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프리아나가 쿠키를 먹다 말고 외쳤다.

“아니. 그건 너무 눈에 띈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너까지 같이 가면 접경지에 설치된 마나 탐지기에 걸리고 말 거다.”

“으음.”

“금방 올 테니 다들 걱정 말라구.”

“네. 백작님.”

얀 공작이라.

가능한 대화가 통하는 녀석이면 좋을 텐데.

사실 카잔 제국이랑 엮인 놈들이면 대화가 안 통하는 게 기본이다.

크로드도 겨우 정보를 대가로 말이 오간 거니까.

그러고 보니 크로드 녀석.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가급적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으련만.

우웅.

“어이. 들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쟁여뒀던 통신용 마법구에다 외쳐 봤다.

[…….]

하지만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쯧.”

아마 만나는 일은… 없겠지……?

***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겨울.

올해 들어 처음 내리는 첫눈싸라기가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사라락.

하얀 눈송이는 검은 잿더미에 금세 잿빛으로 물들었다.

아도르네이 후작과 제국의 망령들의 전투.

전투라 하기도 뭐한 단 한 번의 격돌로 망령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전멸했다.

이미 시체마저도 검게 타 잿더미만을 남긴 뒤였다.

“…….”

분명 모두 타 죽고 생명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는 잿더미.

별안간 그 위로 자그마한 숨구멍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커헉!”

잿더미 속에서 나타난 건 한 남자.

남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생각했다.

“나, 난 분명…….”

베닐의 눈앞에 지금까지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저 평범하게만 살길 바라는 마음에 평범함을 뜻하는 옛 방언을 따 지은 이름 베닐.

이름과는 달리 그의 인생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려서부터 대전쟁을 치르느라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바빴고.

불행 중 다행으로 대전쟁에서 살아남긴 했다.

하지만 주인 없는 땅이 되버린 카잔 제국의 옛 영토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얀 공작이라는 사내에 의해 징집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죽었다.

‘그래. 분명히 그 기사 놈이 내 심장을…….’

베닐은 잿더미로 뒤덮인 몸을 더듬었다.

하지만 구멍 나 있어야 할 가슴팍은 말랑말랑한 살점으로 다시 채워져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꿈이라도 꾼 건가 싶지만, 주변 상황을 보니 꿈 같지는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살아남았다는 거다.

“…….”

도망가자.

어디로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땅으로.

하늘이 그에게 준 천운이라 생각하며 그는 폐허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급박한 심정 탓이었을까.

평범한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단 하나.

왼손의 룬 문양이 빛을 잃었단 사실도 새카맣게 모른 채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