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간만의 외출이 끝나고, 난 다시 임페라 백작령을 향했다.
우웅…….
새로 뽑은 마차(魔車)가 묵직한 소릴 내며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테라리움 공략 당시 장렬하게 산화한 마차의 뒤를 이어 하룬이 새로 만들어줬다.
차체도 큼직큼직하고 출력도 좋아지긴 했다.
편안한 승차감에 몸을 맡기고 눈이나 좀 붙일까 싶지만, 간만에 영지 밖으로 나왔다가 생긴 골칫거리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흠…….”
멀어져 가는 제니스 기사 학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금 주인공 녀석에게서 확인해야 할 건 끝났다.
멀쩡히 잘 살아 있고 히로인과 첫 만남도 어찌어찌 성사되긴 했으니.
남은 건 차분히 주변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난데.’
한창 운전 중이던 이슬린은 조용히 내게 물었다.
“시키실 거라도 있으신지요.”
“…많지. 시킬 건.”
“뭐든 말씀해 주시길.”
“그래. 일단 머리 좀 정리하고.”
“네, 백작님.”
그리곤 다시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꽤나 좋은 운전 솜씨다.
나야 1종 보통 운전면허 소지자긴 해도 이슬린은 이런 마차를 몰아 본 적은 없었을 텐데.
머리 좋은 사람이 운전도 잘 한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마법 랭크 올리는 데 집중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네, 어디까지나 제 본업은 백작님을 보좌하는 거니까요.”
“후후, 그래.”
“…….”
본인이 괜찮다는데 억지로 시켜서 뭐하겠나.
어쩌면 날 따라다니다 마법 랭크가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고.
지이잉.
뒷좌석에 마련된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왼편 바닥이 솟아오르더니 차갑게 식은 블루핀 에이드가 나왔다.
고급 차에 전용 운전수, 거기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까지.
곡물 죽만 퍼먹던 인생이랑 비교하면 꽤나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후릅.”
달큰한 음료가 목을 적셨다.
블루 핀.
당도가 너무 강해 여러모로 관리가 어려웠던 임페라 백작령 특산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가공을 거친 끝에 잼이나 지금 마시는 에이드로 쏠쏠한 수익을 안겨 주고 있다.
‘맛도 괜찮고.’
달달하면서 새콤한 게 매실청 맛이라고 해야하 나.
덕분에 마차에도 잔뜩 실어 놓고 맨날 먹는 중이다.
“…백작님.”
“응?”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그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이슬린이 슬쩍 물었다.
“…여왕님과 정식 혼례는 언제 치르실 예정이십니까?”
“…푸확!”
“…….”
뜬금없는 질문에 마시고 있던 에이드를 뿜었다.
달콤한 과일 향이 마차 내에 맴돌았다.
예상은 했는지 이슬린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그걸로 대충 입가를 훔치곤 녀석에게 물었다.
“그, 그건 왜 물어보지?”
“벌써 약혼을 치루신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슬슬 제대로 된 혼례를 치르실 때지 싶어서요.”
“으음.”
이슬린 말이 맞긴 했다.
보통 약혼하고 1년 후 정식 혼례를 치르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나나 이글렌처럼 혼기가 찬 경우엔 그 전에 혼례를 치루는 경우도 많았다.
슬슬 정식 혼례 얘기가 나올 시기긴 했다.
‘아까 둘이 한참 떠들더니. 그런 얘기까지 한 건가.’
이글렌도 나쁜 상대는 아니다.
성격이나… 얼굴도 뭐 이쁘긴 하지.
하지만 이글렌은 여왕이다.
사실상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권력을 가진 자.
그런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상당히 귀찮은 일들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단순히 귀찮은 걸 넘어서는 일도 생길 테고.
이 소설에 후반부에서 왕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좀 껄끄럽긴 했다.
미친 왕 갈렌을 몰아낼 당시엔 워낙 상황이 급박해 동맹을 결성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이상 없던 일인 척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이제 와서 약혼을 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뭐 그거야 적당히 시간 되면 해야지.”
“진심이십니까?”
“흠흠. 진심이고 아니고 할 게 뭐 있나?
“…여왕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과의 약속을 저버려선 안 되겠지요.”
“아니 뭐… 그렇긴 하지.”
“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이슬린 때문에 더 복잡해졌다.
“후.”
지금껏 날 노리는 수많은 놈들을 처치했는데도 계속 이 모양이라니.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여유는 없다.
온 대륙이 개판 나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일 테니까.
그렇담 대비해야 한다.
이 망할 대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슬린.”
“네. 백작님.”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동향을 파악해 봐라. 주로…….”
아도르네이 후작가는 아이소테르의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대륙의 모든 왕국이 연합의 이름 아래 묶인 지금.
최전방이란 말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소테르엔 분명한 적국이 있다.
적‘국’이라 하기엔 땅이 없는 녀석들이지만.
“카잔 제국의 옛 영토. 거길 중심으로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동향을 살펴봐라.”
“네. 백작님.”
카잔 제국의 옛 영토.
지금 시점에선 딱히 위협될 건 없다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한때 온 대륙을 집어삼킬 뻔했던 카잔 제국.
하지만 오베론에 의해 멸망한 곳.
‘문제는 그다음이었지.’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린 결과가 어떤지 알았기에, 왕국 연합은 멸망한 카잔 제국의 영토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보통 한 나라가 몰락하면 주변 나라에서 사이좋게 뜯어먹기 마련.
하지만 여러 왕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엮였던 터라 연합은 다소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건 바로 ‘아무도 영토를 가지지 않는 것’.
덕분에 드넓은 카잔 제국의 옛 영토는 아무런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내버려졌다.
자연스레 힘깨나 쓴다는 녀석들이 각지에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무주공산.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지느라 난리도 아니다.
아도르네이 후작가에서 맡은 일이 바로 이 난리통이 아이소테르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
지금 시점에서도 아이소테르 국경선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는 일도 빈번했다.
‘별 일 없길.’
조용히 굴러 나가는 마차 안.
“후릅.”
내 앞길도 지금처럼 조용하길 간절히 바라며 블루 핀 에이드를 홀짝였다.
* * *
“오늘도인가.”
“…그렇습니다. 후작님.”
“빌어먹을. 질리지도 않나. 이 망할 망령 놈들.”
아도르네이 후작은 높다란 성벽 위에 오른 채 짧게 침음을 흘렸다.
저 멀리 보이는 드넓은 황무지.
그 너머로 먼지 구름이 부옇게 일어나는 게 보였다.
카잔 제국의 망령.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놈들은 아니다.
그저 무주공산이 돼 버린 카잔 제국의 옛 영토, 거기서 넘어오는 놈들을 부르는 멸칭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랭크를 보유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병장기랄 것도 없는 도적떼 같은 놈들이다.
하지만 며칠째 계속된 놈들의 침범은 아도르네이 후작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로써 놈들이 국경선을 넘어온 게 일주일째다.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성을 포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리저리 시선만 끌다 돌아가는 게 끝.
‘오늘도 어슬렁거리다 돌아갈 생각인가?’
카잔 제국의 옛 영토와 아이소테르를 잇는 길목.
망령 놈들은 무슨 속셈인지 며칠째 그 주변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날 자극하려는 속셈이겠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만 확실한 건 공성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은 아니다.”
“음… 그렇긴 한 것 같습니다.”
부관은 후작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저들이 진짜 후작령을 공격하려 했다면 벌써 침공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위는커녕 민가 약탈도 없이 얼쩡거리기만 하는 게 전부다.
뭔가 속셈이 있어 보이긴 했다.
“얀 공작. 그 자식을 사로잡지 않는 이상 놈들은 계속 국경선을 넘어오겠지.”
얀 공작.
수개월 전 홀연히 나타나 망령 놈들 가운데 손에 꼽는 세력을 갖춘 녀석이다.
물론 제대로 된 공작은 아니다.
카잔엔 작위를 내려 줄 왕도 뭣도 없는 땅이니까.
그저 스스로를 공작이라 칭한 녀석은 어느 샌가부터 슬금슬금 아도르네이 후작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병사들의 상태는 어떻지?”
“며칠째 놈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 터라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몸이 달아올라 있다고 해야 할까요.”
“놈들의 수준은 파악됐나.”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카잔 영토에 있는 놈들이라 수준을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운집해 있는 놈들 가운데서 딱히 강한 마나 반응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랭크 보유자도 없이 그저 쭉정이들로만 이루어진 군대라.
이건 뭐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얼른 자기네들을 죽여 달라 아우성치는 수준이었다.
“기사들을 불러 모아라.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서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나 함정이기라도 했다간…….”
“후후. 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검술 실력까지 녹슬진 않았다. 저들이 이토록 날 자극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을 노릇이지.”
“예. 그럼 제일 강한 기사들로만 모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아도르네이 후작은 생각할 게 많았다.
수도 소테라에선 갈렌이 개짓거릴 하는 바람에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이글렌이 왕좌를 찬탈하긴 했지만 아직 못 미더운 점이 많았다.
그야 이글렌이 여왕이 되기까지 제일 큰 공을 세운 게 그 남자니까.
‘이안 임페라.’
몰락한 거나 다름없던 임페라 백작가를 홀로 일으켜 세운 것도 모자라, 여왕의 마음까지 빼앗은 사내.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쉬이 믿어선 안 될 놈이다.’
때문에 아도르네이 후작은 소테라와의 연락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여왕에게 가는 정보는 곧 이안 임페라, 그 남자에게도 갈 테니까.
지금 카잔 제국의 망령들이 날뛰고 있단 사실도 함구령을 내렸다.
소테라엔 이따금 국경선을 넘어오는 이들이 있으나 문제없이 격퇴하고 있다 둘러대면서 말이다.
게다가 제니스 기사 학교로 보낸 아들 녀석도 문제다.
졸업전 결승에서 지는 바람에 얼마나 길길이 날뛰던지.
평소 같았더라면 녀석의 응석을 다 받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적당히 기사 학교 졸업식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란 말만 짧게 남겼다.
“후.”
고민거리가 많다.
그럼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그만이다.
제일 먼저 저 눈엣가시 같은 카잔 제국의 망령 놈들부터.
이윽고 아도르네이 후작가 최강 전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후작은 결연한 목소리로 자신의 기사들에게 외쳤다.
“출격하라.”
* * *
“허억……! 허억……!”
말 위에 탄 기사가 피를 토한 채 쓰러진 적들을 살폈다.
아직 숨이 붙은 놈을 발견하자마자 기사는 지체 없이 녀석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커윽…….”
“더 없나?”
후작의 출진은 상상 이상으로 싱겁게 끝났다.
수십의 마상 기사들을 필두로 한 돌격 한 방.
그걸로 놈들은 수수깡 썰려 나가듯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
사실 제대로 된 지휘 체계도 없이 몰려다니는 놈들한테 제대로 된 군대 수준을 기대한 게 우습긴 했다.
‘그저 기우였던 건가?’
후작은 너무나도 싱겁게 죽어 버린 적들 가운데서 눈살을 찌푸렸다.
“…제, 제발 목숨만은…….”
“아이소테르를 넘본 주제에 목숨을 구걸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우, 우린 그저… 녀석이 시키는 대로…….”
푸각!
마지막 살아남았던 망령이 한 기사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주인 잃은 몸뚱이는 싸늘한 바람에 식어 갔고, 왼쪽 손에 새겨졌던 룬 문양도 빛을 잃어 갔다.
“흥.”
후작은 어이없게 해결돼 버린 고민거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돌아간다. 괜한 시간 낭비를 했군.”
후작의 기사들은 죽은 망령들의 시체를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시체를 함부로 놔뒀다간 전염병뿐만 아니라 마물이 꼬일수도 있다.
어쩌면 던전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때문에 이런 전투가 벌어지고 나면 시체를 한곳에 모아 불태우곤 했다.
화륵!
마법을 쓸 줄 아는 기사 하나가 시체 더미에 자그마한 불똥을 던졌다.
시체는 마른 장작 마냥 활활 타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참이나 시체가 불타 오르는 걸 바라보던 후작은 그제야 다시 본성으로 말머릴 되돌렸다.
타닥. 타닥.
모두가 자릴 비우고 시체만이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이 모두 사그라들 때쯤.
어디선가 두건을 쓴 인영이 잿더미 근처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런 녀석의 반쯤 가려진 두건 너머엔 의중을 알 수 없는 비릿한 미소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