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06화 (106/222)

106화

블랭크.

물론 주인공은 대부분의 블랭크와는 결이 다르다.

이 세상 블랭크는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블랭크들은 후천적인 원인으로 블랭크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주인공 디아의 경우엔 다르다.

디아는 태어날 때부터 랭크 시스템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왼손의 룬 문양.

그게 없는 전쟁고아 출신의 어린 소년.

디아가 얼마나 고생해 가며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아마 현 기사 학교장인 그가 없었더라면 일찍이 길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을 거다.

“…감상은 이쯤이면 됐고.”

주인공과 히로인의 만남은 어찌저찌 잘 이루어졌다.

히로인과의 첫 만남이 죽빵인 건 좀 웃기긴 하지만.

어쩌면 이토록 강렬한 만남이라 둘 사이가 이어진 걸지도 모른다.

“뭐 잘 만났으면 된 거지.”

슬슬 이슬린과 이글렌도 심심할 거다.

졸업전 우승자는 내빼고, 같이 온 놈은 자릴 비운 지 벌써 한참이나 지났으니.

“디아! 여기 있어?”

“응?”

훌훌 털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옥상 위로 올라왔다.

보아하니 똥 싸러 간 주인공 녀석 찾으러 온 것 같은데.

“누구지?”

“…아앗! 추, 충성! 제니스 기사 생도 다레즈 후아렌입니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냅다 경례를 올렸다.

아마 내 차림새 때문일 거다.

일단 정식 혼례는 치루지 않았어도 여왕의 약혼자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기도 해서 화려한 금실로 치장된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기사 생도 입장에선 자기네들을 영입해 줄지도 모르는 귀한 손님.

자연스레 경례가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녀석의 말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거슬리는 단어 하나.

“…다레즈?”

“네, 네! 후아렌 가문의 다레즈! 이번 제니스 기사 학교 졸업 예정자입니다! 자, 잘 부탁 드립…….”

“너가 왜 여기 있어?”

“…네?”

녀석은 뜬금없는 소리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뭔가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했는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단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너가 왜 여기 있냐고.”

“그게… 방금 결승전에서 친구 녀석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찾으러 다니는 중…….”

“하.”

뭔가 이상했다.

그야 소설 속 다레즈는 이 시점에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놈이니까.

다레즈가 비약을 가장한 독약을 디아에게 먹이고 난 후, 녀석은 미안한 마음에 차마 디아의 결승전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놈이 지금 여기 있다는 건…….

“시,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안 임페라다.”

“이안 임페라? 이안 임페라……. 허억! 서, 설마 그 임페라 가문의……!”

“아, 됐고.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 봐.”

“으븝!”

녀석은 무슨 침묵 마법이라도 걸린 것마냥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걸었어도 됐지만 알아서 조용해졌으니 걸진 않았다.

‘어디서 뒤틀린 거지? 분명 아도르네이 후작가 쪽에서 협박하는 바람에 독약을 줬어야 했을 텐데.’

그럼 친구란 놈한테 독약을 먹여 놓고 어떻게 되나 구경까지 하러 왔다는 건가?

내가 아는 소설 속 다레즈란 캐릭터는 그럴 인물이 아닐 텐데.

“어이. 혹시 네 친구가 졸업전에서 우승 해 놓고 꽁지 빠지게 내뺀 이유가 너 때문이냐?”

“그, 그게…….”

“빨리 대답해라. 지금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됐으니까.”

“…실은 제가 취미로 포션을 만듭니다! 그러다 친구 녀석이 졸업전 결승까지 가게 돼서… 도움이 되었음 하는 마음에 그만…….”

다레즈는 죄라도 들킨 것마냥 고갤 푹 숙였다.

딱히 문제될 건 없다.

기사 학교 수석 졸업은 곧 출세로 이어지는 길.

때문에 많은 기사 생도들이 영약이니 뭐니 많이들 처먹는다.

이런 아마추어가 만든 싸구려 비약을 문제 삼는 건 어거지나 다름없었다.

‘뭐 딱히 규정도 없고.’

“…누군가 협박을 해서 독약을 줬다거나. 그런 건 아닌가?”

“그, 그럴 리가요! 디아 그 녀석이 얼마나 좋은 녀석인데요!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

“정말인가? 솔직하게 말해라. 무슨 이유가 됐건 간에 내 이름 이안 임페라를 걸고 너한테 피해 없도록 하겠다.”

“사실입니다요. 제발 믿어 주십쇼……!”

“흠.”

눈물까지 글썽이는 걸 보니 사실인 듯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으름장을 놔 봤지만 다레즈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저 실수.

그 말인즉.

‘원작과 상황이 달라졌다.’

아도르네이 후작가 상황이 변해서 그런 건가?

“흠.”

간만에 좀 편해졌나 싶었는데.

다레즈 이 녀석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됐다.

“으으…….”

녀석은 대체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 떠올리려 안간힘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 잘못도 아니고.

“…됐다.”

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녀석을 내버려두곤 뒤돌아섰다.

아니라는 놈 붙잡고 있어 봐야 득 될 것도 없고.

간만에 놀러왔다가 새로운 일만 떠안게 됐다.

아도르네이 후작.

미친 왕 갈렌을 몰아낸 뒤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녀석.

조용히 있길래 별다른 조치는 따로 없었다.

하지만 소설의 줄거리에 변화가 생겼다면 얘기가 다르다.

‘확인해 볼 게 생겼어.’

* * *

‘이상하단 말이지.’

일단은 이글렌과 이슬린이 있는 귀빈석으로 돌아왔다.

둘은 옛 시절로 되돌아간 듯 서로 조잘대기 바빴다.

이슬린의 입가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언뜻언뜻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매 같달까.

이슬린의 머릿결이 이글렌마냥 금발이었다면 둘이 자매 사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창 조잘대던 둘은 날 보자마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흥! 시원하셨나요? 이렇게 우리 둘만 내버려 놓고 가니.”

“흠…….”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를 이슬린이 금세 눈치채곤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별거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군요.”

이슬린은 대충 알아듣곤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뾰로통해 있던 이글렌도 뭔가 심상찮아 보이는 반응에 궁금해진 듯했다.

“…이안 백작.”

“네. 여왕님.”

“저한테도 비밀인가요?”

이건 또 뭔 소리래.

“딱히 비밀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닌 것뿐이죠.”

“흐응.”

이글렌은 한쪽 눈썹만 치켜뜬 묘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 말하기도 애매했다.

‘소설 원작이랑 스토리가 좀 바뀐 것 같습니다.’

라고 해야 되나?

그러기엔 이미 바뀐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원작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상황이고.

“그럼 선물 하나 드릴 테니까 어떤 비밀인지 살짝. 아주 살짝만 얘기해 주는 건 어때요?”

“선물?”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고갤 갸웃했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하기사 수개월 만에 만난 약혼자한테 선물 하나 준비했다고 이상할건 없다.

나야 빈손이지만.

“뭐죠? 그 선물이란 게.”

“일단 비밀부터 말해 줘요.”

“그건 좀…….”

“흥. 여왕으로서 내리는 명령이에요. 빨리요.”

이글렌은 좀처럼 그녀답지 않게 생떼를 부렸다.

아니지. 애초에 그녀다운 게 뭘까.

일단은 약혼 관계긴 했지만 난 이글렌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녀와 가까워진 건 상황이 급박해졌을 때였다.

너무 바빠 공적인 대화도 짧게 할 정도.

그거 외엔 대회 때의 잡담과, 그전엔 소설 속 내용을 본 게 다였다.

아직 난 이글렌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말하기 싫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테라리움에서 고이 모셔온 이 선물은 그냥 다시 가져가는 수밖에.”

이렇게까지 나오는걸 보면 보통 선물은 아닌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최대한 밝힐 수 있는 선에서 이야길 늘어놓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아직은 그저 기우일지도 모르지만요.”

“호오. 그걸 어떻게 알았죠? 갈렌을 몰아낸 뒤로도 후작가에선 별다른 반응도 없었는데.”

“여왕님 기준에선 살짝의 기준이 꽤나 크군요.”

“후후. 그런가요?”

이글렌은 그쯤이면 됐다 싶었는지 한 번 싱긋 웃고는 표정을 바꿨다.

“그래요. 그럼 저도 선물을 드려야겠죠?”

탁.

이글렌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옆에 있던 이슬린이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왔다.

보아하니 아까 전해 줘 놓곤 나한테만 비밀로 한 듯했다.

이슬린 이 자식.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다니.

녀석을 한 번 째려봤지만 이슬린은 못 본 척 얌전히 고갤 숙이고만 있었다.

“이게 뭐죠?”

“일단 열어 봐요.”

“흠.”

투박하게 생긴 상자를 보니 귀금속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귀금속이면 좀 실망 할 거 같다.

차라리 먹을 거라면 모를까.

“음?”

예상외로 상자엔 평범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선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겼다.

종이라면 보통 보푸라기가 일거나 먼지 같은 게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종이엔 그럴게 전혀 없다.

그저 종이 그 자체.

‘완벽’한 종이의 모습을 띈…….

‘설마?’

난 얼른 종이를 펼쳤다.

[에이먼 임페라의 저택으로 가라. 그곳에 이안 임페라를 몰락시킬 재료가 있을 것이다.]

“이건……?”

“뭘 것 같나요?”

“…편지로군요.”

“그래요. 평범한 편지 한 장이죠. 하지만 그게 누구한테 간 편지라 생각하나요?”

“…갈렌.”

미친 왕 갈렌.

녀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임페라 백작령을 쳐들어갔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에이먼의 저택을 털고, 우연찮게 네크로노미콘을 발견한 거라고.

하지만 이 편지가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군가 갈렌을 충동질했고, 그 결과 네크로노미콘이 테라리움으로 새어 들어갔으며.

갈렌이 에런골드를 죽이고 미친 왕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는 건……?

이 편지를 쓴 자가 이 모든 일의 시작점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의 상태를 보아하니 떠오르는 유력한 용의자가 하나 있다.

‘완벽’에 가까운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한 남자.

대마법사 오베론.

그가 갈렌한테 편지를?

그렇다면 왜?

왜 그가 에런골드를 죽게 만들고 테라리움을 미친 왕 갈렌의 손아귀에 떨어지도록 만든 거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너무나도 많은 피를 묻혔다며 홀연히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운 자.

그런 녀석이 갈렌이 미친 학살극을 벌이도록 부추겼다고?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갈렌이 처형되고 난 후. 그 자의 방에서 발견된 편지입니다.”

“그렇겠죠.”

갈렌이 아무리 멍청한 짓을 했어도 본판 자체가 바보는 아니다.

누군가의 투서로 일을 벌인 이상, 가능한 투서는 없애 버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불태우려 했어도 쉽지 않았을 거다.

예전 황금 은행에 팔아넘긴 돌멩이마냥, 이건 랭크 9를 달성한 누군가가 만든 종이니까.

평범한 불론 타지도 않을 테고, 찢어 버린다 해도 금방 원 상태로 돌아오고 말 거다.

‘이렇게 말이지.’

부욱.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지지를 반으로 찢었다.

이를 본 이슬린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이글렌은 평온했다.

프스스……!

그리곤 찢겨져 나간 부위를 다시 붙이자 종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어, 어떻게 그런……!”

“그냥 평범한 종이는 아니란 거지.”

“그렇죠.”

이슬린은 뭔가 깨달은 듯 신기하단 눈빛으로 종이를 훑어봤다.

“…아.”

“보아하니 이안, 당신도 이 편지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셨나 보군요.”

“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녀석을 봤었거든요.”

“호오. 꽤나 찾기 힘든 녀석일 텐데요?”

“뭐. 어쩌다 보니.”

“후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자 이글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편지의 출처는…….”

“역시나 모른답니다. 아이소테르의 내로라하는 모든 마법사들이 달라붙었음에도.”

“으음…….”

“아무튼. 이건 선물이에요. 당신이라면 어딘가 요긴하게 쓰겠죠.”

“정말입니까? 이런 걸 그냥 저한테 주겠다구요?”

“네, 선물이니까요. 그리고 여왕으로서 명령을 한 번 더 내리겠어요. 그 편지의 출처를 알게 된다면, 그 즉시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글렌의 얼굴엔 다시금 왕위 찬탈 전쟁 당시의 결연한 표정이 묻어났다.

이 왕국에 크나큰 위기를 불러일으킨 자.

그리고 이글렌의 아버지 에런골드 2세를 죽게 만든 자.

난 그녀의 결연한 마음에 답하듯 고갤 끄덕였다.

“여왕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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