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05화 (105/222)

105화

“커…헉……!”

생사의 갈림길에서 내지른 무자비한 권격.

그것도 검술 랭크 5라 알려진 자가 내지른 주먹이었다.

바위조차 부숴 버릴 위력.

그걸 제대로 얻어맞은 나이디스는 그대로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그리곤 튕겨져 나가듯 경기장 밖으로 훌훌 날아갔다.

콰과과과……!

경지장을 너머서고도 한참이나 굴러다니다 움직임이 멈췄다.

범인이었다면 몸이 두 동강 나 죽었겠지만… 다행히 나이디스도 튼튼한 몸이었다.

“구르륵…….”

녀석은 입에선 피거품을 토한 채로 정신을 잃었다.

뒤늦게 놀란 제스가 허겁지겁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휴!”

다행히 죽진 않았다는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싸가지 없는 녀석이 얻어터진 건 통쾌했지만, 아도르네이 후작가 자제가 자신이 맡은 경기 도중 죽으면 큰일이니까.

‘그래도 안 죽었으면 그만이지.’

제스는 숨 죽여 작게 킬킬대곤 다시 경기장으로 되돌아왔다.

“결승전 종료! 이번 제니스 기사 생도 수석 졸업자는 디아 제니스입니다!”

***

“저, 저 기사 생도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둘 다 뛰어난 기사니까요.”

“흠…….”

이글렌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나이디스가 걱정되는 듯했다.

아마 괜찮을 거다.

저러고 며칠 못 일어나긴 하지만 일어나긴 일어나니까.

“꽤 괜찮은 기사 생도로군요. 당신이 눈여겨봤을 만큼.”

“그렇죠?”

“한 번 얘기나 나눠 볼까요? 적갑 기사단에 들어오는 건 어떨지.”

“음…….”

현 상황을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갈렌의 미친 트롤링 덕분에 적갑 기사단은 절반 가까이 물갈이 됐다.

갈렌의 편을 들었단 이유만으로 적갑 기사단을 솎아 내진 않았다.

어찌 됐건 갈렌은 후계자였고, 왕위에 오르긴 했으니까.

때문에 갈렌을 따른 조장급 적갑 기사만 직위를 해제시키는 걸로 끝냈다.

적갑 기사단의 전력이 크게 줄은 이상, 디아 같은 유망주 영입도 꽤나 괜찮은 생각이다.

주인공을 근처에 두고 키우는 것도 재밌을 테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 소설 줄거리에 손을 대서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마 지금 디아는 이글렌이라 해도 대화나 나눌 여유는 없을 거다.

짝짝짝짝!

“와아아!”

경기장을 구경 나온 이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전제만큼 관중이 많은건 아니었지만 꽤나 열렬한 반응이었다.

디아는 그런 관중들을 향해 건틀렛을 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제스가 디아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디아는 방금 전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재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뛰쳐나갔다.

관중들을 향해 정중한 인사는커녕 우승 소감조차 한 마디 없었다.

“야, 야 인마! 너 어디가!”

“끄아아악…….”

스승의 만류에도 디아는 곧장 경기장 밖으로 내달렸다.

지금쯤 한계에 도달했을 거다.

그러다 결국 그 짓까지 하게 되고.

인연이 생기는 거지.

‘그러고 보니 베로니아 가문의 그 여자를 못 봤네.’

설마 소설의 줄거리가 틀어졌나?

아직 확신하긴 이르다.

그 여자와 만나는 건 경기장 안이 아니라 밖이니까.

“이슬린?”

“네. 백작님.”

“베로니아 가문 사람들이랑은 연락하나?”

“…전 방계 사람이라 본가 사람들과는 왕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대신.”

“오호.”

“오늘 베로니아 가문의 장녀가 이 근방에 볼일이 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오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 여자 이름이 뭐지?”

“…타르옌 오셸 베로니아입니다.”

‘맞군.’

다행히 장녀가 바뀌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녀를 아십니까?”

“아는 사이예요?”

이슬린과 이글렌이 동시에 내게 물었다.

베로니아 가문 사람들과는 딱히 연관이 없었던 터라 장녀의 이름까지 묻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베로니아 본가 사람들이 저랑 무슨 연관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래요?”

뭔가 날이 선 듯한 둘의 반응에 괜히 가슴이 찔렸다.

아니지. 내가 왜 가슴이 찔려야 하지?

“자자. 사소한 건 넘어가시고. 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또 어디 가려구요!”

“어딜 가긴요.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보고 나니 화장실이 급해져서 그렇습니다.”

“흥. 그럼 얼른 가 버려요.”

“명령 따르겠습니다, 여왕 전하.”

“…….”

이글렌은 혼자 있기가 심심한지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이해해 주자. 가뜩이나 왕국 정세 살피느라 피곤할 텐데.

대신 이슬린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야. 좀 같이 놀아 드려라. 예전엔 친했다면서?’

‘제가 여왕님이랑 노닥거려서 뭐하겠어요. 시간이라도 끌 테니 얼른 다녀오시길.’

‘끄응…….’

이슬린도 뭐가 불만인지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다행히 말은 그러면서도 이글렌의 옆으로 가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면 둘은 됐고.’

일이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베로니아 가문의 장녀 타르옌.

오늘 그녀는 주인공 디아 제니스와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가져야 한다.

난 귀빈석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현재 수리 중입니다. 북문에 위치한 시설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아.”

예상대로 화장실도 수리 중이다.

수리 팻말이 붙은 화장실 앞은 들소라도 지나갔는지 바닥이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

먼저 다녀온 손님이 얼마나 급했을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럼…….”

졸업전이 열리는 경기장은 네모반듯한 성냥갑 모양의 건물이다.

높이도 별로 높지 않은 2층이 전부다.

얼른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자 경기장 주변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출한 경기장 건물 근처엔 뾰족한 가시덤불이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이쯤이었지.”

난 경기장의 남쪽 문 근처를 살폈다.

부시럭. 부시럭.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주인공께서 추레한 자셀 취하고 있었다.

바지에 똥을 지릴 바엔 노상방변이나 하자.

그것도 그닥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선택은 아니니까.

뒤이어 힘찬 비둘기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2층 건물 옥상에서도 들릴 지경이다.

저걸 용케 참은 것도 대단했다.

그러는 한편, 남문을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또각. 또각.

날카로운 구두 소리와 함께 걸어오는 한 여자.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였다.

차갑게 뜬 두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얀 은발까지 더해지자 평범한 남자라면 말도 걸어보기 힘들 것 같은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저 여자구만.’

도도하게 걸어오는 저 여자가 바로 베로니아 가문의 장녀.

베로니아 타르옌.

베로니아 가문 특유의 은은한 은발은 이슬린과 똑 닮아 있었다.

‘방계 출신이라더니 꽤 닮았네.’

정확히는 타르옌이 이슬린을 닮은 거였다.

타르예는 19살밖에 안 된 녀석이니까.

이슬린을 길게 늘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짧은 단발에 아담한 체형의 이슬린과는 달리 머리 스타일이나 체형이 길쭉길쭉했다.

“후후.”

곧 있을 개꿀잼 장면을 위해 난 숨 죽여 타르옌을 내려다봤다.

“……?”

그러다 타르옌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옥상을 향해 고갤 치켜들었다.

‘이크!’

녀석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갤 숙였다.

저 여자와 마주쳐서 좋을 건 없다.

차가운 건 외모뿐만이 아니니까.

어쩌면 차가운 걸 넘어서 얼어붙었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다면 그게 누구더라도 망설임 없이 제거해 버리는 미친 여자다.

그러니 19살의 나이에도 베로니아 가문을 집어삼켰다고 봐야 하나?

“…….”

다행히 타르옌은 날 보진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남문을 향해 오는 발걸음.

그녀와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주인공 녀석은 크나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

“하.”

일단 졸업전 도중 똥을 지리는 대참사는 막았다.

문제는 뒤처리였다.

“X팔. 왜 하필 가시덤불을 심어 놓은 거야…….”

이걸로 뒤처리를 했다간 살점이 뜯겨 나갈지도 모른다.

차라리 뒤처리 없이 얼른 기숙사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이미 디아를 찾는 이들이 기사 학교 곳곳을 뛰어다니고 있을 거다.

그러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

디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점차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내 멈춰 선 시선은 그가 낀 건틀렛에 향해 있었다.

‘이걸로 닦을까.’

하지만 그는 기사 학교에 발을 들이민 순간부터 다짐했다.

절대 그 누구의 앞에서라도 건틀렛을 벗지 않겠다.

수년간 이 악물고 지켜온 맹세가 이토록 허무한 위기를 맞딱뜨리다니.

‘안 걸리면 그만이야. 얼른 뒤처리 하고 기숙사로 뛰면 된다구.’

디아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까지 해 가며 생각에 빠졌다.

거기에 너무 심취했던 탓이었을까?

그를 향해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스륵!

결국 디아의 왼손을 감싸고 있던 건틀렛이 벗겨졌다.

갈색 천에 가죽을 덧댄 평범한 가죽 건틀렛.

그간 애지중지해 온 터라 뽀송뽀송하고 상태도 좋았다.

“…….”

어찌 보면 갈색이라 다행이었다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그는 깔끔히 끝마무리를 마쳤다.

팍팍.

그리곤 땅을 파곤 그 안에 제 명을 다해 버린 건틀렛을 묻었다.

‘부디. 성불해라.’

여벌이 있긴 했지만 그간 지내 온 정이 있던 터라 마음이 편치는 못했다.

이제 얼른 기숙사로 가서 여벌 건틀렛만 끼면…….

“거기 누구…….”

바지춤을 겨우 올리려는 그때.

디아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채 고갤 갸웃하는 한 여자.

그녀는 곧 상황을 파악하곤 낯빛이 종잇장마냥 구겨졌다.

이는 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그게 방금 처리한 건틀렛이건, 아니면 그가 가진 비밀이건.

구륵!

또다시 배에서 괴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의 침묵이 흐르고, 하얀 은발 여인의 시선은 반쯤 묻힌 건틀렛으로 향했다.

“잠깐. 당신 설마……. 디…….”

배가 아픈 탓이었을까.

그가 애지중지해 오던 건틀렛을 보낸 탓이었을까.

아니면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들킨 탓이었을까.

비록 랭크는 높더라도 열 여섯의 어린 소년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결국 내려선 안 될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사람은 머릴 세게 맞으면 기억을 잃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위험한 짓이란 의미였지만 지금의 디아에겐 너무나도 절실한 이야기였다.

“으, 으아아앗!”

“어엇……! 지, 지금 무슨……!”

오러가 듬뿍 실린 디아의 왼 주먹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타르옌은 반사적으로 수 겹의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파카카카캉!

“어엇!?”

베로니아 가문 제일의 천재라 불리던 타르옌.

그런 그녀의 마법이 얇은 유리잔 깨지듯 터져 나갔다.

“잊어라!”

디아의 기억 제거 마법(물리)이 타르옌의 이마에 적중했다.

“…꺄아악!”

퍼어어억!

결국 나이디스를 한 방에 보내 버린 주먹이 타르옌에게도 내려졌다.

그걸 맞고도 멀쩡한 이는 얼마 없을 거다.

타르옌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반쯤 풀린 바지춤을 붙잡은 채로 디아는 미친 놈마냥 혼자 중얼거렸다.

“…그, 금방 다시 올게요!”

그리곤 냅다 기숙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

“푸하하!”

진짜 때리네.

여러 의미로 골 때리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제부터 디아와 타르옌의 지독한 인연이 계속될 거다.

“후후…….”

한바탕 웃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방금 본 장면을 다시금 되뇌었다.

타르옌을 후드려 팬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건틀렛의 기사라.”

그가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건틀렛을 빼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

그건 단순히 멋을 위해서라거나, 가진 랭크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바로.

스륵.

디아의 건틀렛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가득 박힌 왼손이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

난 분명히 봤다.

이곳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왼손의 룬 문양.

분명 디아의 손에도 있어야 할 랭크 시스템이 가진 표식.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굳은살만 잔뜩 박힌 희고 깨끗한 손.

녀석의 깨끗한 왼손을 떠올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가 바로 이 대륙의 운명을 바꿀 자.

건틀렛의 기사이자 재앙을 몰고 다니는 존재.

“블랭크(blank).”

그가 블랭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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