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크흐흐! 시작됐구만!”
‘랭킹빨로 세계 정복!’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
지금껏 궁금했지만 그를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없었다.
뭐 억지로 찾아가면 찾아갈 수야 있었겠지만, 지금껏 깽판 친 것 때문에 일어난 개판들을 생각해 보면 최대한 참아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공을 건드는 건 이 소설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테니까.
“그렇게 재밌으신가요?”
“그럼요. 이걸 보려고 제가 몇 년을 참아 왔는데.”
“…그래요? 그래 봐야 고작 기사 생도들 싸움인데?”
“…말이 그렇단 거죠.”
“흥.”
옆에 앉은 이글렌은 뭐가 불만인지 두 볼을 부풀렸다.
하기사 몇 개월 만에 만나서 하자는 게 기사 생도 졸업전 관람이니까.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뭐라도 맛있는 거 사 줬어야 했나?
‘애초에 여왕님인데 입에 맞는 건 있나 모르겠네.’
미친 왕 갈렌을 몰아낸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글렌은 여왕의 자리에 올라 혼란해진 아이소테르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당시 소테라에 있던 인구 중 절반 가까이가 구울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랭크가 조금이나마 높았던 이들은 제물의 의식이 멈추자 살아남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낮은 랭크 보유자들은 구울화가 풀리자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미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슬픔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글렌이 소테라의 혼란을 수습하는 한편.
난 임페라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에이먼이 죽어 버린 터라 옛 임페라 백작령은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는 지경까지 가 버렸다.
결국 내가 지내던 영지까지 합쳐 꽤나 큰 규모의 임페라 백작령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영지 규모가 곱절은 늘어났다지만 괜찮았다.
이스바르트의 경영 능력 덕분에 영지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으니까.
어찌 보면 나랑 에이먼만 있을 때보다 잘 산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수개월간 아이소테르에 남은 상흔을 치유하던 와중.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랭킹빨로 세계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
디아 제니스의 졸업전.
중간중간 기사 학교 회상씬이 나오긴 했지만 제일 첫 시작은 여기다.
최대한 주인공 시점에서 변화가 없도록 이것저것 준비 많이 했다.
다만 한 가지 가장 큰 게 빠져 있었다.
‘에런골드가 죽어 버렸다는 거지.’
때문에 이글렌한테 부탁했다.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볼 겸 같이 가자고.
“후후.”
지금껏 글로 수십, 수백 번도 더 본 장면이다.
세상이 멸망해 버리고 놀거리라곤 발할라 시스템으로 소설이나 훑어보는 거 말곤 없었으니까.
덕분에 이 소설도 꽤나 여러 번 정주행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구경하다니.
일부러 이날을 위해 팝콘까지 준비해 왔다.
바삭. 바삭.
“…그게 뭐죠?”
뾰로통해 있던 이글렌이 팝콘을 보곤 고갤 갸웃했다.
“아 이거요? 이건 옥수…가 아니라 메르를 소기름에 튀긴 겁니다.”
“메르? 메르가 이렇게 된다구요?”
메르는 이 세계에서 콩 비슷한 곡물이다.
아쉽게도 이 세상에 옥수수는 없었다.
옥수수 비슷하게 생긴 건 있어도 맛은 전혀 달랐고.
덕분에 팝콘 한 번 만들어 보려고 온갖 곡물을 다 튀겨 봤다.
그 중 제일 비슷한 맛이 이 메르다.
콩이지만 기름에 튀기니 팡팡 터지는 게 맛도 꽤나 비슷했다.
여기에 설탕이랑 소금을 마늘 기름에 볶아서 뿌리면…….
바삭!
“크흐! 이 맛이지.”
“…신기한 걸 드시네요.”
“먹어 볼래요?”
“으음… 당신이 만든 거면 뭐… 맛있겠죠?”
이글렌은 못 이기는 척 팝콘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활짝 펼쳐진 속살은 분홍빛이 나는 게 예쁜 꽃 같았다.
바삭.
“…음?”
“맛있죠?”
“흠… 뭐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말은 시큰둥하면서도 이글렌은 저도 모르게 팝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뭔가 계속 먹게 되는 맛이네요.”
“저기 달달한 녀석도 준비돼 있으니 맘껏 드십쇼.”
“…전 그냥 이안이 들고 있는 거 먹을래요.”
“그래요, 그럼.”
캬라멜 팝콘보단 오리지날 팝콘파인가 보다.
굳이 내가 들고 있는 걸 먹겠다는 걸 보면.
뒤에선 이슬린이 연신 팝콘을 튀기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꼭 영화관에 온 기분이었다.
“너도 좀 앉아서 먹으면서 봐.”
“괜찮습니다, 백작님.”
이슬린은 싱긋 미소 한 번 짓고는 팝콘 튀기는 데 집중했다.
“흠,. 그래라 그럼.”
오늘 제니스 기사 학교엔 이슬린만 데리고 왔다.
프리아나는 지금쯤 빈트하겐과 검술 대련이 한창일 거다.
빈트하겐 칼로스.
녀석은 아직까지도 적갑 기사단장 자릴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 검술 랭크 7의 괴물이 그 말곤 더 이상 없었으니까.
하지만 왕위 찬탈 전쟁 당시의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곤 칩거에 들어갔다.
그마저도 프리아나가 간곡히 부탁한 덕에 기사단장 자리만 유지하고, 지금처럼 가끔 프리아나와 검을 섞는 게 고작이었다.
‘빨리 프리아나가 랭크 7이 되면 좋을 텐데.’
빈트하겐과 검을 섞었던 그때.
그땐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프리아나는 그 일로 검술 랭크 6에 도달했다.
소설에서보다도 꽤나 빠른 시기였다.
‘다행이지. 죽지 않고 산데다가 성장도 빨라졌으니.’
이만하면 아이소테르의 정국도 대충 안정화 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도르네이 후작가 쪽이 좀 신경 쓰이긴 해도.
“그러고 보니 저기 금발 녀석. 아도르네이 후작가 출신이라 했죠?”
“네. 실력은 있는 놈이다만… 싸가지가 없는 놈이죠.”
“흠… 백작은 기사 생도들 성격까지 다 알고 있나 보네요.”
“…척 보면 척 아닙니까. 생긴 거 보세요. 남들 깔보는 건 기본일 것 같이 생겼는데.”
“흥, 그렇게 첫인상으로만 판단하는 건 나쁜 겁니다.”
“그렇긴 하죠.”
그렇게 사담을 나누는 중에, 드디어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댕~!
“오, 시작했네요.”
바삭. 바삭.
경기가 시작되자 이글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팝콘만 뜯어 먹었다.
한 조각씩 오물오물 먹던 그녀는 어느 샌가 한 움큼씩 집어 능숙하게 팝콘을 흡입했다.
이를 알아챈 이슬린은 금세 새로 튀긴 따끈따끈한 팝콘을 채워 넣어 줬다.
‘그냥 새로 담아서 주면 안 되나?’
자꾸 내 팝콘 바구니에 손을 대는 게 신경 쓰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얘기하진 않았다.
바삭. 바삭.
“…자. 어떻게 됐나 봅시다.”
상황은 아직까진 소설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승전 상대도 아도르네이 후작가의 그 양아치 그대로고.
디아가 기사 시절 죽자고 괴롭힌 게 저놈이다.
심지어 그를 영입하지 말라 다른 귀족들에게 입김까지 불어넣을 정도였다.
그러다 결국엔 큰 사달이 나고 말지만.
카앙!
첫 합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디아는 상대의 검을 차분히 받으며 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호오.”
한가로이 팝콘을 뜯던 이글렌도 흥미롭다는 듯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그 둘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소설 속 디아가 맘에 드는 건 단순히 착한 바보라서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고구마 처먹이는 소설이라며 싫어했을 거다.
하지만 디아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선한 녀석인 건 맞지만, 호구는 절대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서든 이득을 보려 머리를 굴리는 그런 녀석이다.
이번 졸업전에서도 최대한 귀족들의 이목을 끌어 출세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와!”
“올해 기사 생도들은 수준이 좋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 기수에 랭크 5가 둘이나 있다니!”
“저런 자가 우리 가문에 들어오기만 해 준다면!”
“흐흐! 그런 일이 있기나 하겠수? 저만한 친구면 왕립 기사단은 들어가야 마음에 찰 텐데!”
“크… 역시 그렇겠지요?”
아래층의 구경꾼들의 이야길 엿들었다.
어차피 아도르네이 후작가 녀석은 영입 못 할 테고, 디아는 혹시 몰라 영입했으면 하는 눈치다.
“이안?”
“네, 여왕님.”
“지금 막기만 하는 생도 말인데요. 왜 건틀렛을 끼고 있는 거죠?”
“뭐… 퍼포먼스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저 건틀렛 덕에 벌써 이명까지 붙었더군요. ‘건틀렛의 기사’라구요.”
“흠, 그래요?”
이글렌은 제법 눈썰미 있는 질문을 던졌다.
디아의 왼손에만 끼워진 건틀렛.
덕분에 은근슬쩍 엿보려 해도 디아의 왼손에 새겨진 룬 문양을 엿보는 건 불가능했다.
카앙! 캉!
그러는 와중에도 둘의 싸움은 계속됐다.
그러다.
퍼억!
“커헉!”
디아의 건틀렛이 상대방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오우, 아프겠네.”
“역시. 봐주고 있는 거였군요?”
“티 납니까?”
“뭐… 저보다 더한 자들의 대련도 봐 왔으니까요.”
“그렇군요.”
이글렌은 벌써 디아의 속셈을 한눈에 파악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해야 되나.
소설에서도 에런골드는 디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영입을 관뒀다.
전쟁고아 주제에 너무 잔머리를 쓴 게 오히려 독이 돼 버린 거다.
거기에 패배한 아도르네이 후작가 쪽에서 괜한 어깃장을 놓고, 흉악한 헛소문까지 퍼뜨리고 만다.
그러다 결국 아무도 영입을 안 하고 하는 수 없이 용병길에 나선다.
‘여기까진 다 똑같네. 턱주가리 후둘겨 패는 것까지.’
그렇다면…….
슬슬 때가 됐는데.
구륵.
대련장에서 자그맣게 기름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검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푸흐흐…….”
그러게 아무거나 받아먹으면 큰일 나는 법이지.
그의 룸메이트 다레즈가 만든 특제 비약.
‘…을 가장한 독약이지.’
소설 속 다레즈는 아도르네이 후작가 쪽 녀석한테 반 협박성 제안을 받게 된다.
후에 다레즈를 요직에 앉혀 주겠다며 디아에게 가벼운 독약을 먹이라 한 거다.
물론 거절할 경우 평생 요직은 꿈도 못 꾸게 될 거란 협박도 이어졌다.
‘나중 가선 계속 거절하는 다레즈한테 가족까지 들먹였지.’
결국 다레즈는 하는 수 없이 디아에게 비약을 가장한 독약을 준다.
먹으면 사흘은 엉덩이로 오줌 쌀 정도로 악랄한 독약.
덕분에 다레즈는 미안한 마음에 디아의 결승전을 차마 보러 오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승전의 향방은 바뀌지 않았다.
***
“뭐, 뭐지……?”
제일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건 아도르네이 후작가 출신의 기사 생도.
아도르네이 나이디스였다.
“어윽…….”
디아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격통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분명 아침에 화장실은 갔다 왔다.
그러고 나서…….
‘다, 다레즈 이 멍청한 놈이……!’
디아는 격통 때문에 집중력이 점점 흐려져 갔다.
“지금 날 농락하려는 거냐!”
“자, 잠깐……!”
“감히 네 까짓 놈이!”
자길 가지고 놀려는 줄 안 나이디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터져 올랐다.
그리곤 상대를 향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어윽!”
가까스로 막긴 했지만 덕분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검을 타고 전해져 오는 진동에 배가 더 아파 왔다.
“잠깐 우리 휴식을 갖는 게……!”
“닥쳐라!”
콰아앙!
다시 한번 서로의 검이 격돌했다.
그제야 나이디스는 디아의 상태가 이상해진 걸 깨달았다.
지금껏 작지만 옹골차게 빛나던 오러가 지금은 해파리마냥 흐물흐물 요동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디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른다.
녀석이 약해진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
심판에 나선 제스도 아직 이 상황을 눈치채진 못했다.
“크흐흐!”
이대로 놈을 죽이기만 하면……!
최후의 일격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오러를 뽑아냈다.
흉흉한 기세를 잔뜩 머금은 검이 디아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여전히 디아는 검조차 들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차라리 싸 버릴까.’
그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졸업전에서 바지에 똥 싼 기사로 기억될 거다.
출세는커녕 대륙 전역에 똥쟁이 기사로 기억된다.
건틀렛의 기사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똥쟁이 기사.
“……!”
나이디스의 검이 얕게 디아의 머릿결을 베어 내는 순간.
디아는 재빠르게 몸을 핑그르르 회전시켰다.
그리곤 회전력을 그대로 실은 채 건틀렛을 내질렀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퍼어어억!
순간 디아의 건틀렛과 나이디스의 오른쪽 뺨 사이에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