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03화 (103/222)

103화

“디아! 빨리 나와!”

“아! 알았어!”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제니스 기사 학교의 졸업식을 앞두고 큰 대회가 하나 열린다.

이른바 졸업전.

제니스 기사 학교의 유서가 깊은 전통 중 하나다.

해당 기수의 기사들이 한데 모여 검을 맞대는 일종의 결투 시합이다.

여기서 우승하는 자는 제니스 기사 학교 수석 졸업이라는 명예가 주어진다.

“흐흐!”

그리고 디아는 지금.

이 제니스 기사 학교의 졸업전 결승전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출세길은 따 놓은 당상!

디아는 그간 피똥 싸며 구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거의 뭐 살아남은 게 용한 수준이었다.

이제 남은 건 졸업전에서 우승만 하면 끝이다.

전쟁고아 출신이라며 온갖 괴롭힘은 다 받으며 지내 온 나날!

이제 모두 안녕이다!

“…후!”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곤 두 눈을 부릅떴다.

쿵쿵쿵!

“십 분 뒤면 결승전이라고!”

“아오! 나간다니까!”

밖에선 디아의 룸메이트 다레즈가 계속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디아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스륵.

마지막으로 세면대에 놔둔 건틀렛을 왼쪽 손에 끼고 나서야 화장실 문을 열었다.

“어으! 뭔 똥을 이렇게 오래 싸!”

“그럼. 싸우다 똥이라도 싸리?”

“…너 똥 쌀 때도 그거 끼고 싸냐?”

“그러겠냐?”

다레즈는 디아의 건틀렛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게 지난 수년간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함께 지내 온 그였지만 디아가 건틀렛을 빼는 걸 본 적이 없다.

그것도 건틀렛은 양손에 끼는 게 아니라 왼손에만 끼워져 있었다.

“…아무튼! 오늘 결투 진짜 중요한 거 알지?”

“크흐흐! 당연하지!”

“자! 그럼 이거 하나 마셔.”

다레즈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건넸다.

흰 빛깔의 걸쭉한 액체는 달큰한 향이 났다.

“…이게 뭐야?”

“뭐겠냐? 이 엉아가 만든 특제 자양강장제지.”

다레즈는 자신만만한 듯 가슴을 쭉 편 채 말했다.

“뭐? 자양강장제? 그런 거 먹어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있는 집 녀석들은 다들 졸업전 나간다고 영약이니 뭐니 엄청 챙겨 먹는데! 이거 하나 먹는다고 탈이라도 나겠어?”

“아니. 배탈 날 거 같아서 그러지.”

“야! 내가 언제 너한테 이상한 거 준 적 있냐? 저번에 내 덕에 토벌 따라 나가서 산 거 기억 안 나?”

“저저번달에 너가 준 영약이니 뭐니 먹었다가 피똥 싼 것도 기억나는데.”

“그…건 배합이 좀 잘못된 바람에 그런 거고! 이번엔 믿어 보라니까?”

“흐음…….”

디아는 미심쩍었지만 한편으론 솔깃했다.

다레즈 이 녀석이 좀 괴짜 같긴 해도 이런저런 영약 만드는 덴 도가 텄으니까.

솔직히 이번 졸업전은 좀 쫄리긴 한다.

상대는 나이디스 아도르네이.

아도르네이 후작가 출신 녀석으로 꽤나 실력 있는 놈이긴 했다.

어쩌면 한 번 믿어 보는 게…….

“에잇.”

디아는 다레즈가 건넨 정체불명의 흰 액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곤 단숨에 들이켰다.

“옳지. 쭈욱 들이키라구.”

“…크하! 이게 뭔 맛이야? 한 일주일 썩은 우유 맛 나는데?”

“그럴 리가!”

다레즈는 허리춤에 검을 디아에게 건넸다.

제니스 기사 생도들을 위해 지급되는 훈련용 검이었다.

디아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훈련용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바아앙!

“오오!”

그러자 평소보다 더 환하게 오러 소드가 빛을 내뿜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야! 이거 개쩌는데!”

“크흐흐!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

다레즈는 의기양양하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리곤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럼… 나중에 출세하고 나서도 나 잊기 없다?”

“흐흐! 당연하지!”

“크흐흐… 고맙다. 너밖에 없다니깐.”

다레즈는 실력으로 따지면 디아에게 한참 못 미쳤다.

나이로는 다레즈가 몇 살은 위였지만 실력은 아래.

검이라면 다레즈가 몇 년은 더 먼저 잡았지만 재능 차이란 건 확연했다.

그마저도 운 좋게 첫 번째 벽을 넘어 제니스 기사 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기사 학교에서 용을 써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디아나 결승전에서 붙을 나이디스는 얼마 전 두 번째 벽을 넘었다.

검술 랭크 5.

사실상 왕국 최고 전력인 적갑 기사단에 들어가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다레즈는 그런 둘이 부러웠지만 입맛을 다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재능의 차이란 그런 거니까.

“…이번 졸업전 말이야.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오늘 결승전에 특별한 분이 오신데. 그것도 두 분이나.”

“…특별한 분? 얼마나 특별하길래? 졸업전에 귀족분들 그득그득한 거야 매년 있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특별한 분이라는 건 무슨 소리겠냐? 응?”

“서, 설마?”

디아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눈빛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여, 여왕님이 오신다고?”

“그래! 게다가 두 분이면 여왕님이랑 약혼하신 그 남자도 온다는 거지!”

“오오!”

이건 기회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게 여왕이다.

그런 높으신 분한테 제 실력을 보여 줄수만 있다면……!

‘호위 기사라도 되는거 아냐?’

이른바 엘리트 코스!

호위기사-적갑 기사단으로 이어지는 황금 라인!

출세는 물론이고 어쩌면 영지를 가진 귀족 작위를 내려 줄지도 모른다.

“이러다 우리 디아. 귀족이라도 되는 거 아냐?”

“후후! 내 그럼 그때는 너를 중히 써 주도록 하마!”

“크흐흐! 감사합니다요!”

둘은 벌써부터 고래등 기와 쓰러지는 소리를 해 대며 킬킬댔다.

* * *

“자, 결승전까지 왔으니 규칙은 잘 알고 있지?”

“네!”

“예.”

제니스 기사 학교 교사 제스는 영 딴판인 두 기사 생도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전쟁고아 출신에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디아 제니스.

다른 하나는 아도르네이 후작가에서 온갖 대접 받으며 올라온 나이디스 아도르네이.

거만한 귀족집 도련님과 근성으로 똘똘 뭉친 전쟁고아.

우연히도 둘은 나잇대 또한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궁금했다.

누가 수석 졸업의 영광을 가져갈지.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니까 한 번씩 더 설명한다. 심판이 중재했는데도 이를 무시할 경우엔 바로 실격처리 되고…….”

“됐으니까. 그만 시작하죠.”

“…….”

나이디스의 건방진 말투에 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제 졸업할 마당인 놈들한테.

더군다나 아도르네이 후작가인 이상 뭐라 하기도 뭐한 놈이다.

“…하. 그래. 그럼. 죽지 마라.”

“네! 선생님!”

“…흥.”

마침내 둘은 서로 경기장의 양끝에 서서 결승전 준비를 마쳤다.

디아는 흘긋 경기장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살펴봤다.

대부분 기사 생도들이었지만 경기를 구경하러 온 귀족들도 상당했다.

다들 자신의 가문으로 영입할 유망주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과연 디아를 데려갈 자는 누가 될까.

“후후.”

그러던 중 경기장 제일 높은 자리. 상석에 위치한 두 사람이 보였다.

반투명한 커튼을 치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누굴지는 예상이 갔다.

‘어디 한 번 잘 보라고. 아주 영입하고 싶어 안달 나게 해 줄 테니까!’

디아는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그의 반대편에 나이디스는 짜증 가득 섞인 얼굴로 디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러운 전쟁고아 출신과 같이 졸업하는 것도 짜증 나건만, 결승전에서까지 보게 될 줄이야.

심판의 중재만 없다면 슬쩍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래.’

나이디스는 마음먹었다.

제스가 개입한다 하더라도 못 들은 척 디아를 죽여 버릴 거라고.

댕~!

마침내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즉시 나이디스는 온 힘을 다해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푸른 오러를 활활 불태운 그는 그대로 상대를 죽일 작정으로 달려들었다.

‘죽여 주마!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놈!’

하지만 디아는 그런 그를 향해 차분히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빛 한줄기 뿜어져 나오지 않는 무색의 훈련용 검.

이대로 검을 부러뜨리고 디아의 목을 벤다.

그럴 생각에 나이디스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카앙!

“으읏?”

나이디스의 검은 무색의 검에 허무하게 막혀 버렸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 이내 디아의 검에 아주 약하게 어린 오러를 발견했다.

“쯧!”

“흐흐! 왜. 아쉬워?”

기사 생도 시절에도 나이디스는 디아의 오러가 마음에 안 들었다.

푸른색의 빛을 띠는 게 보통 기사들의 오러.

이따금 붉은색을 띠기도 했지만 지금의 디아는 달랐다.

아무런 색도 없이 무광에 가까운 은은한 빛.

거기에 체력을 아끼려는 듯 그 오러조차도 최대한 아끼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라! 이 망할 벌레놈!”

“에이. 그럴 순 없지.”

디아는 싱긋 미소 지으며 녀석의 검을 받아 냈다.

‘최대한 오래 끌고 간다.’

그게 지금 디아의 계획이었다.

일순간 끝내 버린다면 그만큼 실격 차이가 확연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검을 아는 자의 눈일 때나 가능한 일.

눈 깜짝할 새에 끝나 버린다면 검술의 기역자도 모르는 귀족들에겐 달리 보인다.

운이 안 좋았나? 발을 헛디뎠나?

그런 눈초리를 살 바엔 적당히 검을 섞어 가며 화려한 검무를 뽐내는 편이 나았다.

카앙! 카앙!

무색과 푸른색의 오러가 서로 뒤엉켰다.

나이디스는 계속해서 디아를 죽이기 위한 살기 가득한 검격을 찔러 넣었다.

왼쪽 가슴, 목, 하복부.

하지만 그의 검격은 들어오는 족족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그런 그의 검을 막는 디아의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듯 화려하고 우아했다.

“이 자식이……!”

“오호호…….”

숨결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디아는 계속해서 검을 막아 냈다.

이따금 퍼포먼스를 위해 검을 크게 휘두르는 척하는 건 덤.

슬슬 나이디스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디아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부터 좀 빡세질 거야.”

“뭐, 뭐라고?”

…카앙!

디아는 일부러 한 번 크게 녀석의 검을 튕겨 냈다.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지자 그 틈을 노리고 디아의 검이 쇄도했다.

카가가각!

“으읏!”

“후후.”

“이, 이 고아 자식이……!”

“흠……. 그건 좀 마음에 상처 되는 발언인데.”

콰앙!

디아의 검이 나이디스의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나이디스가 그의 검을 막은 게 아니었다.

마치 체벌이라도 하듯 디아의 검이 녀석의 검을 때린 거다.

“으윽!”

찌이잉!

순간 뼈가 울리는 듯한 통증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그렇게 큰 틈을 만들어 낸 그때.

디아의 건틀렛이 녀석의 턱주가릴 후려쳤다.

빠아악!

“어억!”

얼굴에 정타를 얻어맞은 나이디스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부모를 건들면 쓰나. 내가 뭐 고아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니? 응?”

“으윽……!”

“안 그러니? 이 X발놈아?”

입 안이 헐고 어금니가 흔들렸다.

나이디스는 분노 가득 찬 눈빛으로 디아를 노려봤다.

하지만 실력 차이는 확연했다.

그는 심판을 맡은 교사를 흘끗 쳐다봤다. 제스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곤 경기를 속행했다.

검이 어딜 찔린 것도 아니고 그냥 주먹 한 방 맞은 거다.

그걸로 경기를 중지시키긴 애매했다.

“이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에쿠, 무서워.”

분기탱천한 나이디스가 다시금 오러를 뿜어냈다.

반드시 저놈을 죽이이라.

여기서 진다면 그는 평생 2등으로 남게 된다.

수석 졸업이 아닌 차석 졸업.

그래선 아도르네이 후작가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아이소테르 최강의 가문이라는 이름이 고작 가문 하나 없이 굴러 들어온 고아 놈한테 짓밟히고 만다.

카앙!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분노만으로 싸움을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디스의 실력으론 디아를 이기는 건 역부족이었다.

“으으……!”

…구륵!

바로 그때.

디아와 나이디스 둘만이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나이디스에게서 난 소린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디아의 낯빛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