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빈트하겐 칼로스.
ㅈ됐다.
이 남자만큼은 마주하지 않길 바랐는데.
소설에서도 많이 본 자다.
프리아나 이전 기사단장이었던 자.
프리아나가 기사단장으로 나오는 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은 지나야 있는 일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가 제니스 기사 학교를 졸업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다가 소설의 중후반부에나 가서 등장한다.
그도 그럴게 일국의 기사단장이 되려면 무조건적인 전제 하나가 붙어 있어야 하니까.
검술 랭크 7.
이는 크로드조차 갓난아이 상대하듯 가지고 노는 경지다.
랭크 9가 소설에서 신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이상.
랭크 7은 인간 수준에선 최강의 반열에 오른 거나 다름없다.
‘이거 소설이랑은 좀 다른데.’
소설에서 빈트하겐은 아이소테르 왕위 찬탈 전쟁에서 철저히 중립을 표했다.
그가 이토록 굳게 나서는 바람에 다른 적갑 기사단원들조차 내전엔 참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국을 지키는 검인 이상, 같은 왕족을 향해 칼을 겨눌 순 없다.
때문에 소설에서도 갈렌과 이글렌은 서로 적갑 기사단 없이 싸우게 된다.
결과는 갈렌의 승리.
이미 갈렌이 후계자 자리를 너무나 오래 차지한 탓에 줄을 댄 귀족들 수 차이가 컸다.
하지만 만약 적갑 기사단이 이글렌의 편을 들었다면?
아마 갈렌도 쉽게 이글렌을 이기지 못했을 거다.
그 중심에 있는 자가 바로 빈트하겐 칼로스.
‘그냥 다른 적갑 기사단 녀석들이 흑마법에 세뇌된 거라 생각했는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도 빈트하겐은 중립을 표할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갈렌 왕의 명령에도 이글렌을 향해 검을 겨누지 않았던 인물이니까.
하지만 대체 왜…….
“단장님.”
“…프리아나. 자네로군.”
“…기억해 주시고 계셨군요.”
프리아나는 빈트하겐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째서 갈렌을 따르는 겁니까.”
“…….”
“당신 같은 분이 어째서!”
“…그것이 기사다.”
…파앙!
순간 눈으로도 좇기 힘든 속도로 녀석의 인영이 사라졌다.
그리곤 순식간에 프리아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콰드득!
“…커헉!”
동시에 프리아나의 하복부에서 괴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에 내던져질 강한 충격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좀 나았을 것을.
이미 빈트하겐의 한쪽 손이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덕분에 충격을 고스란히 한 몸에 받아 낸 녀석은 붉은 피거품을 토하며 두 눈에 초점을 잃었다.
“…자넨 이곳에서 죽기 아쉬운 몸일세.”
“그르륵…….”
기사단장의 주먹 한 방에 프리아나가 빈사 상태가 돼 버렸다.
프리아나 정도의 강함이라면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둘의 격차는 컸다.
빈트하겐이 무심한 눈빛으로 고갤 돌렸다.
“하지만 넌. 다르지.”
무심하지만 평온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태어나서 몇 번 겪어 보지 못한 감정 하나를 느꼈다.
압도적인 공포.
죽음을 눈앞에 둔 기분이 바로 이러했다.
그리고 천천히.
빈트하겐의 손이 내게로 가까워졌다.
피해야 하나?
아니, 피할 수 있나?
프리아나조차 주먹 한 방으로 보내 버린 괴물을 상대로?
영겁의 시간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머린 지금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계 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슬퍼하고 있군.”
“…….”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
천만 다행히도 그 말 한마디에 녀석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사실은 네놈도 싫은 게 아닌가? 갈렌의 명을 따르기는.”
“…….”
“그러니 프리아나를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키려 한 거겠지. 갈렌의 명령 때문에 애꿎은 인재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하아…….”
빈트하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녀석을 설득시킬 수 있…….
콰악!
“우읍!”
녀석의 손아귀가 내 턱주가리를 움켜쥐었다.
“내 마음에 동요를 일게 하는군. 안 되겠어.”
꾸드득!
“끄으읍!”
턱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 뼈를 타고 흘러넘쳤다.
아무래도 잘못 건든 건가?
“머, 멈추십시오!”
“…응?”
이대로 머리가 터져 죽는 건가 싶던 그때.
기절한 줄 알았던 프리아나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입가엔 붉은 피를 게워 내면서도 녀석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당신은 정말……! 왕국을 위하는 게 맞습니까……!”
“…….”
“정말 당신이 왕국을 지키려 하는 것이라면! 분명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잘못되었다는 걸!”
빈트하겐은 프리아나의 말에 미간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프리아나의 말이 녀석의 화를 돋구고 있는 건지, 아님 설득을 하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 턱주가릴 붙잡은 손아귀의 힘만큼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파악!
“크학!”
턱주가릴 붙잡은 녀석의 손이 강하게 날 밀쳐 냈다.
턱뼈가 빠진 것 같았지만 살았으니 일단 됐다.
“나도… 모르겠다.”
참고 참았던 빈트하겐의 말 한 마디.
역시나 녀석은 갈렌을 따르는 걸 후회하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녀석이 후회하면서도 갈렌의 명령을 따르는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가족 때문인가?”
“…그래. 국왕 전하의 힘에 정신을 잃은 상태긴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프리아나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더더욱 싸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족을 인질로 잡은 자를 위해 일하다니요!”
“프리아나, 그만둬라.”
난 프리아나의 말을 제지했다.
맞는 말이다.
가족을 인질로 잡혔다는 이유로 악행이 정당화 되진 않는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이를 난 잘 알고 있다.
빈트하겐 저자도 분명 같은 마음이리라.
“…흥.”
녀석은 제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운 듯 작게 코웃음 쳤다.
“…그래.”
그리곤 결심한 듯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곤 프리아나에게 말했다.
“저자가 선대 국왕 전하를 져 버리고 섬기기로 한 자인가?”
“네.”
“선택에 후회를 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분은 섬길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그렇군.”
이거 원 당사잘 눈앞에 두고 웬 낯 뜨거운 소리래.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말씀이십니까?”
“그래.”
뜬금없이 제안을 하겠다는 빈트하겐.
하지만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갈렌의 편을 계속 들겠다고 한다면, 이 전쟁의 승리는 갈렌이 될 테니까.
“도무지 나 같은 미천한 자의 머리론 길을 정하지 못 할 듯하다.”
“그렇다면…….”
“결투의 여신 트라이어스 님께 맡기도록 하지.”
여기서 결투의 여신이 왜 나오지?
하지만 빈트하겐의 이어진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이 갔다.
“지금부터 단 세 합. 그걸 버텨라. 그리하면 너희들을 보내 주겠다.”
“…….”
“제안을 받아 들이겠나?”
검술 랭크 7을 상대로 세 합은 좀 많지 않나.
솔직히 일 합만 버텨도 잘했다고 칭찬 받을 만한 경진데.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프리아나는 각오를 다진 거 같았다.
“프리아나!”
“괜찮습니다, 백작님. 세 합이라면. 정말 결투의 여신님께서 정의를 위해 주신다면. 받아 내고 말 겁니다.”
“야 인마, 너 그러다 죽어!”
“설령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저희는 죽습니다.”
“아, 그렇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빈트하겐의 검을 받아 내는 건…….
“결심이 굳은 것 같군.”
빈트하겐은 프리아나의 결연한 표정을 읽곤 검을 세워 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검이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백작님. 물러나십쇼.”
“으윽…….”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프리아나의 굳은 결심을 깰 수는 없었다.
“…죽진 마라.”
“그건 좀 자신이 없네요.”
난 한 발짝 물러서 둘의 대련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프리아나는 그간 아껴 온 자신의 오러를 검에 쏟아부었다.
아르나 가문에서 내려져 온 가보.
그 검에 프리아나의 의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들어오십시오!”
“그래.”
빈트하겐은 천천히, 그리고 곧은 자세로 검을 들어 올렸다.
모든 검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
그저 평범한 내려치기.
지금껏 봐 온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검선이 프리아나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콰아아앙!
“…커허억!”
그저 검을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도 프리아나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이게 이 세상의 불합리함이다.
랭크가 낮은 자라면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상위 랭크를 이길 수 없는 그지 같은 금제.
프리아나는 그 불합리한 금제 앞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다.
…파아앙!
빈트하겐의 곧은 검선이 옆을 향해 쓸려 나갔다.
간신히 검을 좌에서 우로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녀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연이은 검격이 들어갔다.
콰지직!
“크… 아악!”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막아 내는 데 성공한 프리아나.
이제 마지막 단 일 합만이 남았다.
빈트하겐은 기진맥진한 프리아나의 심장을 향해 검끝을 겨눴다.
이대로 막지 못한다면 그대로 검 끝은 프리아나의 심장을 꿰뚫을 게 분명했다.
“끄으윽…….”
하지만 이미 프리아나는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그저 무의식 속에서 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막으면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 하더라도 프리아나는 영영 검을 쥘 수 없는 몸이 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카가가각!
마지막 세 번째 합이 프리아나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크헉!”
외마디 비명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심장을 노려 오는 검을 용린검의 면으로 막아선 것이다.
‘X이팔……! 더럽게 아프네!’
프리아나는 여기서 죽을 인물이 아니다.
원래 줄거리대로라면 차기 기사단장이 되었어야 할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날 섬겼다는 실수 하나만으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콰과과과……!
빈트하겐의 검을 막아 내려 용린검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내장이 뒤틀리고 붉은 피가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대로 막지 못하면 프리아나가 죽는다.
승승장구했어야 할 놈이 나 때문에.
“X이바아아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했다.
검에 전격이 실리고, 화염을 머금었으며 냉기를 쏟아부었다.
그래야 프리아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카아앙!
“크허억!”
끈적이는 핏덩이를 한 움큼 게워 냈다.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살았다.
나도, 프리아나 이 무식하게 용감한 녀석도.
“불청객 하나가 끼어들었군.”
빈트하겐의 무심한 눈빛에 짜증이 살짝 첨가됐다.
“크흐흐! 그래서 뭐! 프리아나 혼자 받아 내란 말은 없었잖아?!”
“…그랬지.”
챙그랑!
빈트하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바닥에 떨궜다.
“가라. 약속은 약속이니.”
“…뭐야. 진짜로?”
“그래. 결투의 여신님께서 내리신 정의를 일개 인간인 내가 바꿔서야 안 될 일이지.”
“…….”
생각보다 녀석은 너무나도 싱겁게 약속을 지켰다.
“…괜찮겠나? 이대로 우릴 보냈다간…….”
“어서 가라.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래. 고맙다.”
난 선 채로 기절한 프리아나를 부축하곤 녀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자릴 옮기려는데.
“…만약 네놈이 부하가 죽을 상황에도 가만히 있었더라면, 내 검은 지체 없이 널 베었을 거다.”
“하! 고맙네, 그거 참.”
난 녀석의 마지막 말을 듣곤 어이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그러는 한편, 녀석이 인질로 잡혔다던 가족들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쿡쿡 쑤셔 왔다.
‘절대로 네 녀석 가족들이 다치는 일은 없게 해 주마.’
빈트하겐이 물러난 뒤 쓰러진 프리아나 옆에서 주저앉아 숨을 고를 때였다.
“으윽……. 배, 백작님……?”
“정신이 좀 드나.”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우리 둘 다 사이좋게 죽어서 지옥 가는 중이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정말이겠냐.”
“아하하… 그것 참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프리아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앞으로 싸움은 나 혼자 해야 할 듯싶다.
상관없다. 남은 건 단 하나.
이 미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미친 왕 갈렌.
그 녀석만이 남았으니까.
“슬슬 끝내자고.”
난 녀석이 있는 알현실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