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둥! 둥! 둥!
“와아아아!”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이 공략하기로 한 건 소테라 외성의 남쪽 문.
평지에 세워진 소테라의 외성은 동서남북 어디나 경사가 완만했다.
덕분에 어딜 통해 공격하나 공략 난이도는 비슷했다.
쿠르르르……!
제일 먼저 투석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이끄는 건 하룬이 만든 골렘.
덕분에 일반 병사들이 끄는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이윽고 투석기의 사정거리에 성벽이 닿자 골렘들의 손에 거대한 바위가 옮겨졌다.
“결계술사! 앞으로!”
평범한 바윗덩이론 소테라의 외성을 공략할 수 없다.
몇 겹으로 쳐진 결계에 바윗덩어리가 닿는 순간 모래처럼 부스러지고 만다.
결계엔 결계로.
그게 이 세상의 전쟁 방식이었다.
“웅얼웅얼.”
투석기에 올린 바윗덩이에 주문을 외자 반투명한 막이 바위 주위로 생겨났다.
“발사!”
투웅!
동시에 십수 대의 투석기에서 바위가 솟구쳐 올랐다.
급조한 결계라 위력이 다소 뒤떨어졌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부숴지라고 던지는 놈들이니까.
…쿵! 쿠쿵!
거대한 바위가 부딪히자 성벽 주위로 결계가 요동쳤다.
처음엔 바윗덩이가 산산조각 나기 일쑤였지만, 공격이 계속될수록 결계가 빛을 잃고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르륵!”
이에 질세라 성벽에서도 반격이 이어졌다.
제물의 의식에 잠식된 검은 눈의 병사들.
그들은 죽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성 벽 위로 몸을 주욱 내밀곤 검붉은 화살을 퍼부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돌격!”
“와아아아!”
아이소테르 전역에서 모은 오합지졸의 군대.
하지만 모두들 하나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갈렌을 내버려뒀다간 자기네들의 집마저 짓밟히고 만다는 걸.
수많은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투석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쐐액!
“악!”
검붉은 화살이 빗발처럼 내리꽂았다.
흑마법에 의해 강화된 화살은 그대로 병사들의 가슴팍을 관통하곤 땅에 고갤 처박았다.
치이익……!
화살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화살은 요란한 소릴 내뱉으며 대지를 오염시켰다.
“으으……!”
“멈춰선 안 됩니다!”
전장에 이글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전투는 속도가 생명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뒤따라야 할 건 병사들의 사기.
이를 위해 이글렌은 위험천만한 전장에 직접 나섰다.
물론 그녀의 옆에 이슬린과 프리아나가 찰싹 달라붙어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파아앗!
이글렌이 땅에 손을 집은 채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굵은 나무뿌리가 솟아나 병사들의 머리 위를 가로막았다.
이따금 나무뿌리가 꿰뚫리기도 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엔 충분했다.
“와아아아!”
“여왕님을 위해!”
거센 화살이 빗발쳤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귀족들의 사병이긴 했지만, 마음가짐만큼은 달랐다.
이건 왕위 찬탈을 위한 내전 따위가 아니다.
미친 왕 갈렌을 막기 위해, 저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쟁이다.
“사다리를 걸어라!”
어느새 성벽에 도달한 병사들이 성벽 위로 길목을 터냈다.
“크라악!”
성벽 위 적들이 사다리를 떨쳐 내려 연신 도끼질을 해 댔다.
“크륵?”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아닌, 단단한 나무뿌리가 사다리를 꽉 붙들고 있었다.
“으읏……!”
마법을 퍼붓던 이글렌이 고통스런 신음 소릴 냈다.
“무리해선 안 됩니다.”
그런 그녀가 걱정돼 한 마디 했지만 이글렌은 오히려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병사들의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어서 성문이 돌파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바위가 다 떨어졌다!”
“크흐흐! 그럼 어쩔 수 없지! 가라! 내 아이들아! 너희들도 싸울 시간이다!”
“부오오……!”
투석기에 쓸 바윗덩이가 바닥나자 골렘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집채만 한 덩치의 골렘들이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콰앙!
이내 거대한 골렘의 몸이 성벽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크륵!”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적 병사 하나가 성벽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키익!”
녀석은 반항해 보려 했지만 그대로 골렘의 발에 밟혀 납작해지는 걸로 움직임을 멈췄다.
“놈들을 막아라!”
슬슬 일반 병사가 아닌 적갑 기사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놈들 사이엔 검뿐만 아니라 활을 쓰는 놈도 있었다.
‘저건 좀 귀찮은데.’
아니나 다를까, 적갑 기사단 하나가 골렘을 노리고 오러가 담긴 화살을 발사했다.
부옷!
골렘은 그대로 마핵이 꿰뚫리곤 다시 원래의 바윗덩어리로 되돌아왔다.
“으악! 내 아이들이!”
하룬은 픽픽 쓰러져 가는 골렘을 보고 울부짖었다.
“미안하지만 다시 만들어야겠네.”
“으으……! 재료는 충분히 주겠지?”
“당연하지.”
“크흐흐! 그럼 그만이지! 계속해서 박아라!”
부오옷!
남은 골렘들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성벽에 고개를 들이박았다.
그렇게 공성전이 계속되던 와중.
마른침을 삼키던 내게 기쁜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오오!”
저 멀리 성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결계는 어느 정도 파훼됐다는 소리였다.
“허억……. 허억…….”
지금껏 마법을 퍼붓던 이글렌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으윽…….”
그러다 결국 균형을 잃고 비틀대는 이글렌.
난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이제 좀 쉬시죠.”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난 분한 듯 입술을 꼭 깨문 그녀를 이슬린에게 넘겼다. 결국 이슬린의 도움을 받으며 이글렌은 뒤로 물러섰다.
“프리아나.”
“네! 백작님!”
“이제 우리 차례다.”
“네!”
프리아나는 몸이 근질근질 했는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이윽고 난 준비했던 ‘그걸’ 꺼냈다.
펄럭!
녀석을 뒤덮고 있던 두터운 천막을 걷어 냈다.
그러자 반짝이는 광택을 뽐내며 마차(魔車)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 사교 파티에 타고 간 녀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육중한 차체에 철갑을 덧댄 바퀴. 덕분에 승차감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상관없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타게 되는 걸 테니까.’
마차의 머리 부분은 길고 뾰족하게 솟아난 철창이 덧대어 있었다.
어제 귀족들한테 ‘송곳’이 되라 한 건 비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난 오늘 이 마차와 함께 송곳이 된다.
쿠르르르!
엔진까지 개조한 마차는 힘찬 울음소릴 내뱉었다.
한 대에 일반 마차 몇 십 배를 호가하는 사치품 중에 사치품.
지금 난 그걸 일회용 송곳으로 쓰려 했다.
아까워 죽겠지만 성공만 하면 그만이다.
“간다!”
“네! 백작님!”
콰르르륵!
프리아나를 옆에 태우곤 패달을 있는 힘껏 밟았다.
오로지 출력만을 위해 개조한 마차답게 골이 울릴 정도로 차체가 뒤흔들렸다.
엔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열기가 후끈거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 단 한 발만을 위해 개조된 녀석이니까.
점차 가속 받던 마차는 그대로 소테라 외성의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우우웅……!
균열이 간 성문 틈으로 날카롭게 솟은 마차의 뿔이 격돌했다.
…콰아앙!
순간 마차가 붕 떠오르며 그대로 성문을 꿰뚫었다.
“성공했습니다!”
“아직이야!”
그럼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먹잇감을 더 달라 외치는 듯 요란한 소릴 내며 속도를 높였다.
“크륵?”
이는 곧 소테라 전역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울들을 향해 갔다.
카가가가각!
그 바람에 정처 없이 소테라를 떠돌던 구울들이 마차에 부딪혀 자잘한 육편이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크하하! 다 죽어라!”
“으, 으아악!”
성공이다.
이대로 테라리움에 들이 박기만 하면……!
…콰앙!
“커헉!”
“끄헉!”
거칠 것 없이 내달리던 마차는 테라리움의 벽에 부딪히자마자 그대로 멈춰 섰다.
날카로운 뿔이 백색 거산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긴 했지만, 뚫지는 못했다.
“어으윽…….”
이건 뭐 술 취하고 운전하다 전봇대에 들이박은 기분이다.
에어백이랄 것도 없었으니 예전 이안의 몸뚱이였다면 그대로 납작해져 죽었을 거다.
“서, 성공한 겁니까?”
프리아나도 난생처음 겪어 보는 미친 짓거리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라라락!”
“어우……. 이, 일단 일어나야…….”
벌써 마차 주위로 소란을 듣고 온 구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간 녀석들에게 둘러싸이고 말 거다.
거기에 성벽이 뚫렸으니 적갑 기사단도 부랴부랴 올 테고.
“프리아나! 빨리 정신 차리라고!”
“네, 네엣!”
겨우 정신 차린 녀석이 주섬주섬 검을 챙겨 들었다.
벌써 주위엔 새카맣게 구울들이 몰려와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까지 다 생각해 둔 게 있어서 온 거니까.
“플레어.”
마법 랭크 1도 쓸 줄 아는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마법.
이거 하나론 구울 하나 처치하면 잘 했다고 박수 쳐 줄 거다.
하지만 플레어가 작렬할 대상은 구울이 아니다.
…치이익!
마차 뒤에 한가득 채워 둔 폭약.
거기에 연결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만한 양의 폭약이면 소테라의 외성을 뚫을 순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다.
테라리움까진 들어서지도 못하고 폭약만 낭비하고 만다.
그렇다면.
외성을 뚫고, 테라리움에 구멍을 낸 다음에, 거기에다 한방에 폭약을 밀어 넣은 다음 터뜨리면?
“뚜껑 덮고!”
“네!”
미리 준비해 뒀던 철판으로 마차의 윗부분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마차 크기만 한 수류탄 하나가 완성됐다.
“튀어!”
이윽고 도화선의 끝이 폭약에 닿는 순간.
나와 프리아나는 있는 힘껏 테라리움에 연결된 수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콰아아앙!
뒤이어 어마어마한 크기의 폭음과 함께 마차가 폭발했다.
폭약뿐만 아니라 잔뜩 과열된 마핵까지 합쳐진 폭발.
이는 마차를 둘러싼 철판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철 파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주변을 일소시켰다.
“…푸핫!”
한참이 지나서야 폭발은 잠잠해졌다.
그제야 난 수로 밖으로 고갤 내밀었다.
“…프리아나?”
그런데 프리아나가 없다.
옆을 보니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몸뚱이가 물에 둥둥 떠 있었다.
뒤집어 보니 기절한 프리아나였다.
“으이구.”
찰싹찰싹.
녀석의 두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기자 녀석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허억……! 바, 방금 무슨……?”
“뭐긴. 성공이지.”
수로 밖으로 나온 프리아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내 녀석의 표정은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성공했습니다! 백작님!”
“크크! 그래!”
앞엔 자그맣지만 분명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테라리움에 나 있었다.
“빨리 들어가자고. 곧 있으면 소리를 듣고 적갑 기사단 놈들이 죄다 몰려올 테니.”
“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이번 전쟁의 목표는 테라리움을 괴멸시키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미친 왕.
갈렌만 제거하면 끝난다.
그리하면 결국 적갑 기사단도 이글렌을 모실 수밖에 없을 거다.
작게 난 구멍으로 프리아나와 난 몸을 구겨 넣었다.
예상외로 테라리움 내부는 조용했다.
병사들도 딱히 보이지 않았고, 적갑 기사단도 하나 없었다.
“왜……. 아무도 없죠? 백작님?”
이상함을 느낀 프리아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설마 외성이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
별안간 들려오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이는 나도, 프리아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두터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안면갑을 한쪽 옆구리에 낀 남자가 서 있었다.
짧게 정돈된 갈색빛 머리칼에 인중을 가득 메운 굵은 콧수염.
거기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었지만, 왠지 그를 마주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여기에 아무도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 당신은……!”
프리아나는 홀로 태연히 걸어 나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경악을 넘어서 그토록 강한 프리아나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외성뿐만 아니라 테라리움 전역이 뚫려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
“나 하나만 있다면.”
남자는 나지막이 마지막 한 마딜 내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적갑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 지금부터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반역자를 처단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