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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8화 (98/222)

98화

이글렌의 생존을 알리는 교서가 아이소테르 전역의 귀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이는 아이소테르뿐만 아니라 연합에 속한 다른 왕국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라스, 위셀란 등 왕국에까지 아이소테르의 상황에 대해 알려졌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연합에 속한 왕국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묵묵부답인가.”

“예, 백작님.”

“쯧.”

위셀란에게서 서신을 받아 온 이슬린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흑마법과 연관만 됐다 하면 경기를 일으키던 놈들이 지금은 그저 묵묵부답만 할 뿐이었다.

“역겨운 놈들.”

솔직히 말하자면 교황청과 신성 왕국은 좀 다를 거라 생각했다.

소설에서도 원칙이니 뭐니 길길이 따지며 날뛰던 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엔 다 지네들 잇속 챙기기 바빴다.

괜히 나섰다가 대전쟁이라도 열릴 걸 두려워한 나머지 소설에서처럼 모른 척하기 바빴다.

“하는 수 없죠.”

이글렌은 이슬린이 받아 온 서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하…….”

“괜찮아요, 이슬린.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요.”

“…….”

“그리고.”

이글렌은 묵묵히 저 멀리 백색의 거성을 올려다봤다.

“이건 가정사니까요.”

지금 우린 소테라의 외성 앞에 와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저택으로 쳐들어온 귀족들은 모두 이글렌의 편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가장 큰 세력.

아드로네이 후작만큼은 중립을 표했다.

아이소테르와 옛 카잔 영토의 접경지를 맡은 게 바로 아도르네이 후작가다.

병력 수만큼은 아이소테르의 귀족들 중 단연코 최다의 수를 자랑하는 영지.

이글렌이 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긴 했다.

거기에 돌아온 답은.

‘현재 접경지의 치안이 좋지 않아 함부로 병력을 돌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사실일 수도, 아니면 그저 잠시 뒤로 물러나 눈치를 보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도르네이 후작가는 이번 내전에 참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결 구도는 이글렌을 위시한 귀족들과 소테라 간의 싸움.

머릿수만 놓고 본다면 이쪽이 훨씬 우세했다.

문제는 머릿수만 많다는 거다.

소테라의 외성 앞에 전초 기지를 차려 놓긴 했지만, 외성 너머의 거대한 백색 거산.

테라리움을 공략할 방도가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

이글렌은 분한 듯 테라리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소테르를 굳건히 지켜 줄 것만 같았던 테라리움.

지금은 테라리움의 벽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전략 회의 시간입니다.”

“그래요.”

이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을 차려입었다.

은색 바탕에 금색 무늬를 덧댄 화려한 갑옷.

방어엔 그닥 효용성이 없어 보였지만 외형만큼은 우아함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전사가 아니라 지휘자다.

병사들에게 용기와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선 가끔은 실속보단 멋이 중요했다.

‘하룬한테 특별히 부탁한 보람이 있구만.’

며칠간 하룬과 그의 공방 사람들이 잠 줄여 가며 만든 여왕의 갑옷.

덕분에 돈깨나 깨지긴 했지만 오히려 돈 값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이글렌이 갑옷을 다 차려입자 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죠.”

“네, 이안 백작.”

이글렌은 내 손을 맞잡은 채로 전초기지의 한 막사로 향했다.

모두들 테라리움 앞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앉으세요.”

“예!”

귀족들은 이글렌의 명령에 따라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이글렌 혼자였다면 어떻게서든 기선제압 했을 놈들이 옆에 선 나랑 프리아나 덕분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녀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여, 여왕 전하. 연합의 다른 왕국들은…….”

귀족 한 놈이 버르장머리 없게 먼저 입을 열었다.

“쓰읍.”

“허윽…….”

그런 녀석에게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한 번 쏘아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오므렸다.

딱히 나쁜 의도를 갖고 한 얘기는 아니었을 거다.

그랬다간 목이 달아날 걸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저 두려운 거다.

카잔 제국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던 테라리움을 자기네들이 공략해야 한다는 현실이.

“…연합의 도움은 없습니다.”

“아…….”

이글렌의 말에 귀족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탁.

이글렌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이슬린이 숫자가 잔뜩 써 있는 종이를 한 장 가져왔다.

“지금 소테라를 지키고 있는 건 단순히 소테라의 병사들뿐만이 아닙니다.”

이슬린이 가져온 종이엔 소테라 내에 깔린 병사들과 구울들의 수가 적혀 있었다.

“현재 소테라의 외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는 천이 조금 넘습니다. 대신 곳곳에 깔린 구울들의 수까지 더하면 그 수가 몇 배는 늘어나겠죠.”

“으음…….”

“게다가 적갑 기사단 대부분이 갈렌의 편을 든 이상, 적 병력의 질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습니까?”

“농성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계속 외성 주위에 진을 치고 있기만 한다면…….”

“테라리움이 어떤 성인지 몰라서 하는 소립니까! 외부와 단절된 채로 몇 달은 거뜬히 버티는 성이란 말이요! 오래 끌고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귀족들은 벌써부터 서로 의견이 엇갈려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글렌이 크게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히끅.”

이글렌의 호통에 시끌시끌하던 막사 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프랫 자작. 당신의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 그렇습니까? 역시 단시간에…….”

“하지만 그 이유는 테라리움이 버틸 수 있어서가 아니에요. 아이소테르가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지금 소테라가 보이시나요?”

이글렌은 손가락으로 막사 밖 소테라의 하늘을 가리켰다.

검은 먹구름에 집어삼켜진 소테라는 음습한 기운이 풀풀 흘러넘쳤다.

귀족들 중엔 검은 먹구름을 보곤 오들오들 떨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건, 소테라에서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갈렌이 행한 건 ‘제물의 의식’. 영지 하날 집어삼켜 흑마법에 종속된 마물로 변이시키는 흉악한 흑마법입니다.”

꿀꺽!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결국 흑마법사가 행한 제물의 의식이 끝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건…….”

“집어삼킨 영토를 넘어서 다른 영토까지 집어삼키려 할 겁니다. 이미 종속시킨 마물들을 통해서.”

“허억…….”

귀족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글렌의 말에 귀 기울였다.

다른 영토를 집어삼킨다.

그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끔찍한 소리나 다름없었다.

‘개사기 스킬이지.’

만약 이안이 제대로 된 영지의 소유자였다면, 소설에서도 디아의 힘만으로 막기 역부족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안은 개망나니에 술과 도박만 아는 멍청이였고, 영지도 이미 다 몰락해 버린 뒤였다.

그에 반해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소테라는 사람들로 가득한 아이소테르의 수도.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의 수도 어마어마했고 심지어 적갑 기사단까지 갈렌의 손아귀에 있었다.

“…….”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제물의 의식이 끝나기 전, 소테라의 외성을 부수고 테라리움을 함락시키는 길 말고는.”

암울한 상황에 귀족들 사이엔 적막이 흘렀다.

그러던 중, 프랫 자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테라리움을 함락시킬 계획이십니까?”

“그건 내가 설명하지.”

그의 질문에 대신 대답한 건 나였다.

이글렌을 한 번 흘긋 보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먼저, 내일 새벽. 지금 보이는 소테라의 외성을 친다.”

“음…….”

“전 병력으로.”

“저, 전 병력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말에 프랫 자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테라리움을 무작정 공략하겠다는 건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별동대를 꾸려 기습을 가하시려는 건……?”

사실 그게 아니면 미친 소리나 다름없었다.

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서쪽을 친다.

그게 당연한 이치다.

‘그게 갈렌이 생각하고 있는 걸 테고.’

“아니. 별동대도 필요 없다. 그냥 전 병력을 내일 새벽에 한 방에 박아 버린다.”

“그, 그건 사실상 자살…….”

“그래. 그러니 별동대를 꾸리고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앗…….”

“그리고 그 생각은. 갈렌도 똑같이 하고 있을 거다.”

“그 말씀은……?”

난 귀족 녀석들에게 소테라의 지도를 보였다.

둥그렇게 난 소테라 외성 내부엔 드문드문 ‘X’표시가 쳐져 있었다.

이슬린과 그녀의 클랜원들이 눈알 빠져라 탐색한 끝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여기 표시한 게 적갑 기사단 녀석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위치다.”

“오…….”

“보다시피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상당히 분산되어 있지. 소테라 전역을 감시하기 위해서.”

프랫 자작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내일 우리가 소테라를 친다 하더라도, 이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음…….”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꽤나 지난 뒤겠지. 우린 그 전에 소테라의 외성을 뚫는다. 한 방에.”

“한 방에……?”

난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우린 송곳이 되는 거다. 단단한 벽돌에 자그맣지만 확실한 구멍을 뚫는 송곳.”

“오오…….”

“그게… 가능할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다른 귀족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난 녀석의 물음에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

“…….”

갈렌은 홀로 알현실의 왕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양옆엔 두 구의 시체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하나는 그저 백골만 남은 해골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울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아버지?”

“…….”

갈렌은 구울이 되어 버린 에런골드의 시신에 대고 물었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구울에게 자의식이란 건 없으니까.

그저 멍하니 공허한 시선으로 갈렌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갈렌은 오히려 그런 공허한 구울의 시선이 아비의 시선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크흐흐…….”

쿵쿵.

홀로 광기에 물든 채 알현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알현실의 문을 두드렸다.

“전하.”

“누구냐!”

“접니다. 칼로스.”

“…들어와라.”

육중한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아이소테르의 최강자. 적갑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가 문을 열어 젖혔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병력을 움직이는 편이…….”

“흥! 절대 그럴 수 없다! 이안 임페라 그 음흉한 놈이라면 분명 뒷구멍을 노리려 들 터! 절대 당할 순 없지!”

“하오나 병력이 너무 분산된 터라 외성을 막기엔…….”

“시끄럽다! 네놈이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게 대체 누구지? 난가? 아니면 밖의 저 반역자들인가!”

“…….”

칼로스는 아무런 말없이 갈렌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구울이 되어 버린 에런골드에게도 향했다.

‘전하…….’

“호오. 네놈도 아버지가 그리운 모양이군. 어떤가? 아들 된 자로서 아비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보내드리지도 못하고 곁에 두고 있다는 게!”

갈렌은 고약한 농담이라도 한 듯 혼자 킬킬댔다.

칼로스는 그런 그를 보고 이를 악 물었다.

“흐응? 내 농담이 재미없었나? 아니면… 혹시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전하.”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다른 이들을 생각한다면!”

빈트하겐 칼로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그의 검이 강하고 빠르다 하더라도, 갈렌에게 종속 되어 버린 가족들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으니까.

둥……. 둥……. 둥…….

알현실 밖에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갈렌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현실을 뛰쳐 왔다.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소테라의 정경.

“어디 와 봐라! 이 벌레만도 못한 놈들!”

그 끝에서 갈렌의 광기를 멈추기 위한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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