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오랜만이구만.”
“백작님!”
프리아나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펼쳤다.
녀석에게 뭐라 안부인사라도 하려던 차에 별안간 일레느가 와락! 안겨 들었다.
“흐흑! 공자님!”
“…그래. 나 왔다.”
“흑흑…….”
이럴 땐 우는 게 낫다. 어찌 보면 나보다 일레느가 더 가족 같은 사이였을 테니까.
“흠흠.”
일레느의 등을 토닥여 주는데 옆에 선 여자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고, 공주님!”
프리아나는 그녈 보자마자 얼른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맹한 얼굴로 이글렌을 쳐다보는 하룬만 빼면.
“…이분은 누구신가?”
“하룬은 모르겠네. 대신 소개하지. 이분은 이글렌. 패륜아 갈렌을 대신하고 이 나랄 안정시켜 주실 여왕님이다.”
“오, 여왕님이라. 이것 참 귀하신 분이 오셨구만.”
하룬은 여왕이란 말에도 크게 놀라지 않은 듯 고갤 끄덕였다.
하기사 자이겔론드의 왕이 될 드워프였는데.
“오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이글렌 공… 여왕님!”
프리아나는 얼른 상황을 파악하곤 이글렌을 향해 고갤 숙였다.
이글렌은 그런 프리아나의 예의를 갖추는 모습에 만족스러우면서도 하룬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걸리는 눈치다.
“…이분은 누구죠?”
“아, 이 친구는… 하룬 론 말라크. 자이겔론드의 후계자였던 인물이지.”
“자, 자이겔론드의 후계자요?”
“음…. 여기서 말해도 되는 건가? 친우여?”
“뭐 여기까지 온 마당에 숨겨서 뭐하겠나. 이참에 다 알려 주자고.”
“으음,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이글렌은 하룬의 정체를 듣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자이겔론드라면 아이소테르에서도 함부로 못하는 드워프들의 왕국이니까.
거기 후계자가 이역만리 타지에 있다니.
“뭐, 뭐라구요? 이분이 자이겔론드 후계자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저도 놀랍군요.”
이슬린과 프리아나도 이를 듣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러고 보니 얘네들한테도 비밀로 했었지.’
혹여나 일이 커질 걸 염려해 브론즈 비어드란 가명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제 슬슬 말할 때도 됐지.
“역시… 그래서 망치질이 그토록 뛰어나셨던거군요!”
“허허! 뭐 내가 뛰어나긴 했지!”
하룬은 멋쩍은 듯 뒷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 이런 길도 있었군요!”
“오오…….”
뒤늦게 사절단 일행이 비밀 통로를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들에게까지 하룬의 정체를 알려서 좋을 건 없으니 다른 이들에게 적당히 눈치를 주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자. 잡담은 이쯤하고.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사절단 일행들과 저택에 농성하던 이들을 모아 두고 얘기했다.
“오늘부터 우리가 모시게 된 이글렌 여왕님이시다.”
“오오……!”
“그리고…….”
막상 모두를 모아 놓고 얘기하려니 괜히 민망해졌다.
따지고 보면 지구에서 산 나이까지 합하면 지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진다.
이 나이에 결혼이라.
“…오늘부터 전 이안 백작과 약혼을 맺은 사이입니다.”
“네?”
프리아나가 뜬금없는 이글렌의 발언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음…….”
이슬린도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대충 의도를 파악하곤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맹을 견고히 하기 위한 약혼일 뿐입니다. 그래야 앞으로의 계획이 더 수월해질 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제야 프리아나는 납득이 됐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이글렌 혼자라면 아무리 혈통빨이 있다 해도 갈렌에게 밀린다.
하지만 누군가, 적당한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 이글렌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것도 적당히 써먹고 버릴 만한 사이가 아닌 끊어질 수 없는 사이로 이어진다면?
“뭐 그런 거지.”
“그럼.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글렌을 따라온 사절단 일행 중 하나가 물었다.
“어쩌긴. 저놈들한테 보여 줘야지. 누가 이 왕국의 진짜 주인인지.”
*
저택에 들어온 후 저택을 둘러싼 놈들에게 서신을 한 장 보냈다.
서신의 전달자는 다름 아닌 프리아나.
허리춤에 검을 꽂은 채로 저택의 정문을 당당히 걸어 나갔다.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적들 중 누구도 프리아나에게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머릿수가 많긴 해도 다들 목숨은 하나니까.
그렇게 서신이 가고 다행히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회담에 응하겠다는군요.”
“다행이군.”
이렇게 죽치고 앉아 좋을 건 양측 모두에게 없다.
이쪽은 빨리 소테라가 제물의 의식에 모두 잠식돼 버리기 전에 나가야 하고, 저쪽은 죽치고 앉아 있어 봐야 돈만 천문학적으로 깨질 테니까.
얼마 후, 양측은 저택 앞 정원에 모여들었다.
모두 인근에 위치한 영지를 지키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크흠!”
회담 장소에 모여 앉은 귀족들은 괜한 허세를 부리려는 듯 목청껏 헛기침을 해 댔다.
그런 그들의 뒤엔 저마다 기사를 한 명씩 대동하고 있었다.
다들 기죽지 않으려 가슴팍을 활짝 내밀고 있긴 했지만 그닥 위협적이진 못했다.
난 프리아나에게 슬쩍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가 봤을 때 쟤네들 상태는 어떤 거 같나?’
프리아나의 두 눈에서 잠시 안광이 어른거렸다가 사라졌다.
‘다들 별 볼 일 없는 수준입니다. 높게 쳐 줘 봐야 랭크 4 정도겠군요.’
‘너가 봐도 그렇지?’
다행히 그리 크게 강한 자는 없어 보였다.
하기사 일개 영주가 프리아나만큼 강한 기사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대부분 그럴 바엔 적갑 기사단으로 가는 편이니까.
“국왕 시해자께서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 모르겠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하하!”
놈들은 에런골드를 죽인 자가 나라는 헛소릴 해 댔다.
이글렌에게 듣기론 나랑 이글렌이 합심해서 에런골드를 죽였다고 누명을 씌웠다던데.
이거 원 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다.
“항복이라도 하시려나 본데! 우리들이 아이소테르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방금 뭐라 그러셨죠?”
귀족들의 으름장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들을 다그쳤다.
“뭐야? 어디서… 어, 어엇…….”
느닷없이 내려쳐진 호통에 화를 내려던 녀석들이 말을 더듬었다.
동시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두 눈에 초점이 흔들렸다.
“이, 이글렌 공주님?”
“하, 하지만 공주님께선 이미 죽었다고…….”
“어딜 감히 그런 망발을 하는 겁니까!”
사절단 일행 중 하나가 귀족들에게 호통 쳤다.
귀족들도 아는 얼굴인지 아무런 대꾸도 못 한 채 다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읍…….”
이글렌의 등장에 회담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여기서부턴 기세를 몰아 세게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난 아무리 세게 나가도 나쁠 게 없다.
개망나니로 유명했던 놈이니까.
“그리고 이글렌 님은 이제 공주가 아니라 여왕님입니다. 당신네들이 충성을 맹세해야 할 여왕.”
“하, 하지만 갈렌 국왕 전하께서…….”
“지금 제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새끼를 왕으로 섬기겠다는 건가?”
“패, 패륜아라니! 그런 불손한……!”
“불손? 불손은 X미럴. 제 아비 죽인 놈 밑 닦아 주겠다고 날름거리는 게 불손한 거지.”
“이, 임페라 백작! 말이 심하잖소!”
“말이 심해? 흠… 그것 참 아쉽네. 그럼.”
스릉!
녀석들의 앞에서 냅다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푸른 오러를 사정없이 방출시켰다.
‘이 정도는 버티겠지.’
일단 저택에 오자마자 하룬한테 급히 수리를 맡겼다.
제대로 된 수리를 할 시간은 없어 적당히 크래프트 오러로 내구도만 끌어올린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놈들을 겁먹이기엔 충분했다.
“허억……!”
“어디 대전제 우승자가 심하게 굴면 얼마나 심해지는지 보여 줄까?”
“이, 이따위 대접으로 회담은 무슨! 난 이만 떠나겠소!”
귀족 한 놈이 도망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녀석을 향해 매섭게 눈빛을 쏘아 댔다.
“앉아라. X발롬아.”
“허윽…….”
그러자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양마냥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더 이상 헛짓거리는 그만두고, 여왕님의 밑에 들어오도록.”
“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뭐긴요. 제 약혼자로서 하는 말이죠.”
옆에 잠자코 있던 이글렌이 다정한 척 연기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갈렌 그 망할 녀석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까지 죽이려던 그때. 이분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거든요. 그때부터 다짐했습니다. 이분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이글렌은 정말 사랑에라도 빠진 것마냥 다정한 눈빛을 내비췄다.
‘이야. 연기 잘하네.’
속으론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는 한편,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여왕님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기에 한창인 이글렌과 눈을 마주치며 느글거리는 멘트를 던졌다.
이글렌은 얼마나 몰입을 한 건지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아, 아하하! 그…래요! 이런 충직한 모습에 반했달까…….”
연기에 몰입하며 곁눈질로 귀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 진짜일까요?”
“그런가 본데요? 하긴 두 사람 다 혼기가 찬 나이기도 하니…….”
다행히 귀족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믿는 듯한 눈치였다.
“…아무튼! 여왕님과 난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알겠어?”
“으음…….”
“그리고. 네놈들이 생각했을 때 갈렌 그 녀석한테 승산이 있다고 보나?”
“그치만 갈렌…은 선대 국왕께서 지명하신 후계자셨습니다! 아무리 이글렌… 여왕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놈이 선대 국왕 전하를 어떻게 죽였는지 아나?”
“그건…….”
귀족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 세상에 통신이 그리 발달한 것도 아니고.
이들도 갈렌에게서 온 교서만 듣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의 교서라면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갈렌은 흑마법을 익혔다.”
“뭐, 뭐요? 흑마법?”
왕국 연합법상 대역죄나 다름없는 흑마법.
그걸 익혔다는 건 그 즉시 왕국 전역을 적으로 돌리는 이야기밖에 안됐다.
‘하지만 상대가 왕족이라면 다르지.’
왕국 연합법은 국왕들의 힘에 의해 제정됐다.
그런 법의 처벌 대상이 다름 아닌 국왕이라면?
이때부터 애매해진다.
처벌을 하자니 연합에 균열을 야기할 테고, 안 하자니 연합법이 유명무실해진다.
소설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긴 한다.
‘적어도 지금 일어날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이야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겠지만, 소설에서 나온 왕국 연합의 대처는 간단했다.
‘그냥… 모른 척했지.’
그게 곪고 곪아 대전쟁이 터지고 만다.
어쨌건 그건 나중 일이고.
아마 갈렌을 상대로도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아이소테르에서 싸지른 똥은 아이소테르에서 해결해라.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건의 소용돌이는 커져만 갈 테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갈렌이 흑마법을 익혔다는 게!”
다들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반박은 안 했다.
갈렌의 망나니력이면 충분히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테니까.
“그래.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이들도 말이지.”
“그런…….”
난 귀족 녀석들에게 소테라에서 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그제야 녀석들은 자기네들이 큰 실수를 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소테라에 연락이 안 되던 거였군요……!”
“그래. 이대로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다간 소테라 전역이 갈렌의 흑마법에 제물이 되고 말 거다. 강한 자 건 약한 자 건 모두.”
“아…….”
“그,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자기네들이 어찌해야 할지 묻고 있었다.
난 씨익 웃으며 예전부터 좋아했던 영화의 명대사 한 마딜 던졌다.
“살려는 드릴게.”
“어엇…….”
“그러니 앞으로 여왕님께 충성을 맹세해라. 지 아비를 죽인 개만도 못한 패륜아 녀석이 아니라. 아이소테르의 진정한 왕, 이글렌 여왕님께 말이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회담 장소에 모여들었던 귀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글렌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나와 이글렌은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싱긋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