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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6화 (96/222)

96화

“…….”

이글렌 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뭔 헛소리냐 화를 낼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녀는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갈렌과 달리 이글렌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 나와 손을 잡는 것.

그것만이 나뿐만 아니라 이글렌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악취미로군.”

“…시끄러.”

“크크크…….”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크로드가 조소를 흘렸다.

이미 통신용 마법구를 통해 대강 상황파악을 끝낸 그였다.

갈렌 왕자가 패륜을 저질렀고, 더불어 그의 여동생 이글렌까지 제거하려 했다는 걸.

아마 다른 황제의 잔당 녀석들에게도 벌써 소문이 쫙 돌았을 거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그걸 알려 줘야 하나?”

“싫으면 관둬.”

“…현 국왕이 계속 자릴 지킨다면, 연합에 균열을 만들기는 더 쉬워지겠지.”

“…….”

나로선 그닥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가 됐건 크로드는 결국 영겁의 기사단 소속.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이글렌을 처리해 버린다면 갈렌이 제 자릴 지키게 되고 만다.

“하지만.”

녀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기사단에 조금 더 ‘우호’적인 녀석이 자릴 차지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이야기지.”

“…그렇군.”

녀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다.

그걸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걸 보면 이 녀석도…….

“그래서 지켜보기로 했다. 이 망할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다행이네.”

크로드는 손에 묻은 피를 훌훌 털어 냈다.

두 손에 잔뜩 물든 핏덩이에 비해 녀석의 몸엔 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안면갑 생김새를 보아하니 여기 온 적갑 기사단 중 제일 센 놈 같은데.

그런 놈을 상처 하나 없이 처치하다니.

“그럼. 잘 마무리 해 보라고.”

“…고맙다.”

서로 필요에 의해 도와준 거긴 했지만 녀석의 도움으로 이글렌 공주가 살아남았다.

고마워해야 할 건 고마워해야 했다.

내 감사 인사에 녀석은 한 번 코웃음 치곤 등을 돌렸다.

“…다음번엔 어떻게 만날지 궁금해지는군.”

“칼이나 겨누지 말라고.”

“후후.”

그리곤 녀석은 금세 자릴 비웠다.

크로드 찬스를 써 버려서 아까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다.

녀석 입장에선 앓던 이 하나가 빠진 느낌이겠지.

“…이안 백작.”

“…네.”

이글렌은 겨우 진정된 마음을 추슬렀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전 물건 같은 게 아닙니다.”

“…당연하죠.”

“아무리 온 세상이 절 그렇게 대한다 하더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세요.”

“네.”

“…….”

이글렌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곤 결심을 굳게 다진 듯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모두. 일어나세요.”

“고, 공주님…….”

적갑 기사단의 등장에 벌벌 떨고 있던 사절단 일행.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서로의 구속구를 풀어 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갑 기사단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할 뻔했지만 그리 만만히 볼 자들은 아니었다.

다들 왕국에서 힘깨나 쓰는 관료들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사절단에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모두들 혼란스러울 테지만 현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고, 공주님…….”

“제 오라비 갈렌 왕자의 손에 국왕 전하께서 살해 당하셨습니다.”

“그런…….”

“이는 명백한 대역죄입니다. 아무리 그가 아버지의 후계자라 할지라도.”

“…….”

이글렌의 결연한 말투에 사절단 일행들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아무리 갈렌이 차기 국왕에 오를 자라 해도 이건 도를 넘어섰다.

왕국에서 일하던 관료들이라면 누구보다도 그의 만행을 잘 알 터.

“그러므로 오늘부터 나 이글렌 공주는 이 자리에서 선포합니다.”

이글렌은 쓰러진 피츠의 검을 주워들었다.

카앙!

그리곤 검을 바닥에 세게 꽂아 넣었다.

“제 아버지, 에런골드 2세를 무참히 살해하고! 소테라를 강제 점거한 갈렌에게 대역죄를 물어 몰아내고야 말 겁니다!”

“…….”

“오늘부터 나. 이글렌 공주. 아니, 이글렌 여왕의 이름으로 묻겠습니다. 아이소테르를 짓밟은 패륜아 갈렌을 몰아내는 데 함께하시겠습니까?”

“…네!”

“여왕님을 위해!”

“…와아아아!”

몇 안 되는 수의 인원이었지만 이들 주위에 맴돈 열기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이글렌은 숨이 끊어진 피츠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편히 쉬시길. 아이소테르의 기사여.”

“…….”

피츠에게 감사 인사를 마친 이글렌이 날 바라봤다.

“이안 백작.”

“네. 여왕님.”

“당신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행이군요. 차이는 건 아닐까 했는데.”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동맹을 위해서예요. 그러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네. 그럼.”

이글렌은 좀처럼 볼 수 없던 매서운 눈빛을 내뿜었다.

겉모습과는 달리 강인한 여자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금세 마음을 다잡을 줄이야.

“이제부터 아이소테르의 여왕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이글렌은 사절단 일행과 날 두고 앞으로의 계략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패륜아 갈렌을 향한 이글렌의 반격의 첫 걸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아직도 마음을 못 정하신 겁니까.”

“…….”

빛 한 점 겨우 들어오는 차디찬 감옥.

그 안에서 한 남자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넝마쪽이나 다름없는 차림새였지만 허릴 꼿꼿이 세운 채 곧은 자세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엔 그와 비슷한 차림새의 남자 십수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들은 한눈에 봐도 검에 길을 둔 자들 같았다.

“…이건 반역이다!”

죄수들 중 하나가 밖에 선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붉은 적색 갑옷과 안면갑을 입은 기사.

철창 안에 갇힌 이들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자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소테라의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테라리움 밖엔 흑마법의 영향으로 구울이 된 자들이 돌아다녔다.

새로운 국왕 갈렌에게 반기를 든 적갑 기사단원들은 모두 수감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적갑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던 자도 철창 속 죄수 신세가 돼 버렸다.

“반역?”

“그래! 이 더러운 배신자들! 아이소테르를 배신하고도 무사…….”

“반역이 뭐지?”

“뭐, 뭐라고?”

“반역은 기사된 자가 전하께 칼을 들이민 게 반역 아닌가?”

“그런 궤변은 집어치워라! 그 망할 패륜아가 전하께 무슨 짓을 했는지 네놈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이소테르의 적법한 후계자는 갈렌 전하셨다. 그러니…….”

“그만.”

가부좌를 틀고 있던 남자가 마침내 눈을 떴다.

“…….”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철창 밖을 지키고 있던 적갑 기사단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그극……!

팔뚝만 한 굵기의 쇠창살이 그의 손길에 엿가락처럼 구부러졌다.

그가 마음만 먹어도 이깟 감옥쯤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못 정했을 뿐.

드디어 마음을 정한 기사단장은 천천히 창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스릉!

잔뜩 겁먹은 적갑 기사단은 검을 뽑아 들었다.

“아, 아무리 단장님이라 할지라도 왕국 전역을 상대 하실 순 없을 겁니다. 그건 알고 계시겠죠?”

겁먹은 말투였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이미 그는 너무나도 잃을 게 많았다.

왕실 마탑에 속한 아내와 기사 학교 수료 중인 아들까지.

“…….”

이미 모두가 갈렌의 손아귀에 들어선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그게 결국 그의 마음을 다잡았다.

“…가자. 새로운 국왕 전하를 뵈러.”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의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단장을 지지하던 기사들이었다.

“다, 단장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

하지만 단장은 침묵했다.

“크흐흐! 단장님께서 돌아오신 이상, 너희들 모두…….”

“저자들에겐 손대지 마라.”

“예? 하지만…….”

“저들도 곧 길을 정할 것이다. 적갑 기사단이 충성을 맹세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알겠습니다. 단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기사단장의 말에 그들도 살의를 거뒀다.

“단장님!”

철창에 갇힌 부하들의 외침에도 기사단장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적갑 기사단은 생각했다.

아이소테르에서 가장 강한 자.

뿐만 아니라 대륙 전역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

빈트하겐 칼로스.

검술 랭크 7의 괴물이 합류한 이상 갈렌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

“에이먼 백작님… 흑흑…….”

에이먼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일레느는 아버질 잃은 것보다 더 슬프게 울었다.

어찌 보면 이안보다 더 슬퍼한다고 봐야 하나.

전쟁 고아였던 그녀를 자식처럼 보살펴 줬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울고 싶을 땐 우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프리아나는 구슬피 우는 일레느를 달랬다.

그러는 한편 그의 시선은 새로운 임페라 백작가의 저택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많군요.”

옆에 선 이슬린이 한마디 거들었다.

옛 임페라 백작가 저택에서 일레느를 빼 오는 건 성공했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가 싶었지만, 이안의 명령은 달랐다.

도망치는 게 아닌 농성을 하라는 것.

덕분에 저택 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 어디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거라! 곤죽으로 만들어 줄 테니!”

하지만 병사들은 저택을 둘러싼 울타리 너머로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하룬이 심심풀이 삼아 만든 골렘들이 백작령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르륵…….

“저, 저게 뭐여?”

“뭔 놈의 골렘이 저렇게 많아…….”

게다가 이들에겐 딱히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도 없었다.

그저 갈렌이 전 귀족들에게 뿌린 교서 때문에 왔을 뿐.

‘선대 국왕 에런골드 2세가 이안 임페라에게 시해당했다. 이에 협조한 전 공주 이글렌은 처형했으나 아직 이안 임페라에겐 처벌이 미치지 못했다. 만약 국왕 시해자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

그게 교서가 가진 내용이었다.

모여든 병사들은 다양했다.

갈렌의 교서에 한 숟갈 하겠다고 온 귀족들이 저마다 가진 사병들을 몰고 왔다.

이른바 오합지졸.

괜히 나섰다가 사병을 잃었다간 본인들만 손해였다.

게다가 상대는 하룬이 만든 골렘뿐만 아니라 프리아나도 있었다.

지난번 대전제의 우승자.

실력이라면 대부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자였다.

울타리 너머 귀족들은 속이 탔다.

이들도 바보는 아니다.

갈렌이 미친 개망나니인 건 그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글렌이 죽어 버렸다면 아이소테르를 이끌 자는 갈렌 말고는 없다.

울타리 너머 굳건히 자릴 지키고 선 임페라의 가신들을 보고 귀족들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요?”

“끄응…….”

“프랫 자작님께서 결정해 주시죠!”

“뭐, 뭐요? 내가 왜 그걸…….”

“그야…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으시잖습니까?”

“여기서 나이 얘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병력 수로 따지면 할로스 자작이 더…….”

“크흠! 병력 수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는 거요?”

“으음…….”

머릿수를 이만큼이나 끌고 왔는데도 딱히 이렇다 할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치고 앉아 있는 게 나을지도…….

“역시 쳐들어오진 않는군요.”

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시간을 낭비하는 그때, 프리아나는 다시금 이안의 계책에 감탄했다.

이대로 숨어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귀족들의 움직임이 미적지근했다.

“물론 놈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내빼라 하셨지만요.”

“그렇죠.”

사실 이미 저택엔 뒤로 빠져나갈 비상 통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저택의 전 주인인 베네르 백작이 마련해 놓은 길이었다.

“과연 이 구도가 얼마나 갈지…….”

프리아나라면 지금 저택을 둘러싼 이들 대부분은 손쉽게 베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지켜 가며 저들 모두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그도 결국 사람이기에 언젠간 지치기 마련이니까.

‘얼른 오십시오, 백작님.’

우웅.

이슬린의 품 안에 마법구가 작게 울음소릴 냈다.

“…비밀 통로 쪽에 접근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설마 비밀 통로를 눈치챈 건가?

하지만 울타리 밖 귀족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후후.”

프리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온 자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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