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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5화 (95/222)

95화

소테라가 제물의 의식에 집어삼켜진 건 늦은 밤.

덕분에 아이소테르 전역에 이 소식이 퍼져 나가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두두두두……!

근처 마구간에서 급하게 말을 빌려 타곤 곧장 제른 남작의 별장으로 내달렸다.

갈렌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글렌 공주의 죽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는 막아야 했다.

어느덧 달빛이 사그라들고 붉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갈렌의 개짓거릴 막기 위한 계책은 모두 끝났다.

남은 건 운에 맡기는 것뿐.

‘제발 늦지 않았길.’

***

엄밀히 말하자면 호위기사는 적갑 기사단에 들어서기 전 거쳐 가는 단계에 불과했다.

장래가 유망한 기사가 적갑 기사단에 들어서기에 앞서 경험을 쌓는 목적이 컸으니까.

이는 피츠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승산이랄 게 없는 싸움.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콰아앙!

피츠의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 적갑 기사에게 내려쳤다.

“으읏……!”

그의 검을 받아 낸 기사가 침음을 흘렸다.

분명 신출내기 기사 녀석이 분명한데도 피츠의 검에서 느껴지는 힘은 상당했다.

하지만 상대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와 합을 받아 낸 사이 다른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서걱!

“으윽!”

가까스로 검을 튕겨 내 이를 막아 보려 했지만 피츠의 허벅지 쪽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고작 호위기사 상대로도 질질 끌 생각인가?”

하멜의 잔뜩 날 선 말에 적갑 기사들의 눈빛에 독기가 맴돌았다.

“공주님! 이틈에 도망…….”

“어딜.”

저만치 떨어져 있던 하멜의 인영이 순식간에 피츠의 앞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곤 사정없이 상대의 하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커헉!”

내장이 터질 것만 같은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콰직!

그 순간, 이글렌 공주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흙벽이 솟아났다.

이글렌 공주도 어렸을 적 마법깨나 익혀 본 마법 랭크 보유자였다.

갑작스레 솟아난 흙벽에 먼지가 자욱이 일어났다.

“이런 망할……!”

하멜이 검을 휘둘러 흙먼지를 걷어 내긴 했지만 이미 이글렌은 도망쳐 버린 뒤였다.

“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서둘러 공주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하멜의 다리를 피츠가 강하게 움켜쥐었다.

“보낼 수… 없습니다……!”

“…짜증 나는군.”

콰드득……!

“크아악!”

그런 그의 손을 하멜이 짓밟자 바위 부스러지듯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피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하멜은 다른 적갑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목격자는 남아 있어선 안 된다. 모두 처리해라. 처리가 끝나는 대로 공주 찾는 데 합류하도록.”

“예!”

“그럼 난 공주를 찾으러 가지.”

이번 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주를 죽이는 것.

다른 적갑 기사단에게 맡길 순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못 미덥지.’

만에 하나 마지막에 가서 이글렌 공주에게 동정심이라도 가졌다간 다 끝이다.

그럴 바엔 하멜의 손으로 직접 처치하는 게 나았다.

“킁킁.”

나머진 부하 녀석들한테 맡기고, 하멜은 허공에 흩어진 공주의 체취를 파악했다.

아무리 흔적을 지우려 해도 어려운 게 이 체취다.

더군다나 평생을 곱게 대접 받으며 살던 왕족이라면 체내에 특유의 체취가 풀풀 풍길 정도였다.

“이쪽이군.”

발자국이 반대 방향으로 나 있긴 했지만 이건 눈속임이다.

‘영리하구만.’

도망치던 와중에도 눈속임용 흔적을 깔고 가다니.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글렌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허억……! 허억……!”

이글렌은 계속해서 마법을 퍼부어 자신의 흔적을 지워 내려 애썼다.

그녀가 달려 들어간 곳은 울창한 숲.

가짜 발자국도 만들어 보고, 달려온 길에 풀을 자라나게도 해 봤다.

하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자가 벌써 쫓아오고 있다는 건…….’

피츠도 아마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흐흑…….”

도망치는 그녀의 눈망울이 점차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론 모두 죽는다.

고작해야 마법 랭크 4인 그녀로선 적갑 기사단의 조장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쐐액!

“꺄악!”

계속해서 도망치던 그녀의 뒤로 단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또렷한 오러를 머금은 단검은 그대로 이글렌의 한쪽 다릴 꿰뚫었다.

“으윽……!”

꿰뚫린 다리에서 피가 울컥였다.

절뚝거리며 도망쳐 봤지만 속도는 계속해서 느려지고 있었다.

“이글렌 공주! 의미 없는 저항은 그만하시오!”

“이익…….”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도저히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후! 드디어 찾았네.”

애석하게도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수풀을 거치고 붉은 갑주와 안면갑을 쓴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글렌은 다리가 꿰뚫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콰드득!

그녀가 손을 휘젓자 주변 나무뿌리들이 하멜의 몸을 휘감았다.

“이런 걸로 뭐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멜은 거미줄이라도 붙은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뿌리를 뜯어 내곤 다가왔다.

콰앙!

뒤이어 흙벽이 솟아나 그를 덮쳤지만 과자 부스러지듯 박살 나 버렸다.

계속해서 그녀가 사용할 줄 아는 모든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하멜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자.”

“으윽…….”

더 이상 쥐어 짜낼 마법도 마나도 없었다.

스릉!

하멜은 자신의 임무를 끝내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오러를 풀풀 풍기는 그의 검이라면 단 일 합만으로 두 동강 나고 말 거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개인적인 원한은 없습니다. 그럼.”

쐐액!

이글렌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최후를 기다리던 그때.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적막한 숲 한가운데 울려 퍼졌다.

“…으윽?”

이글렌은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분명 자신의 몸을 두 동강 냈어야 할 검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하멜과 이글렌 사이엔 웬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푸석푸석한 흑발을 흩날린 채 이글렌보다 거대해 보이는 대검으로 하멜의 검을 막아 낸 한 남자.

“…이글렌 공주. 맞나.”

“누, 누구……?”

“맞냐고 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남자가 뭐하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마, 맞습니다.”

“…이 망할 개자식이 이깟 심부름 따위에 날……!”

“지금 뭐하는 거지?”

하멜은 느닷없이 등장한 불청객에게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하.”

“하? 지금 한숨 내쉰 건가?”

적갑 기사단의 조장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다니?

그건 두려움에 내뱉는 한숨이 아니었다.

그저 귀찮아 죽겠다는 투가 풀풀 풍기는 한숨이었다.

“귀찮으니 긴 말은 하지 않겠다.”

“하! 뭐 이런 정신 나간 녀석이……!”

“오늘 넌 여기서 죽는다.”

“그게 뭔 개…….”

하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려던 그때.

상대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오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허억……! 허억……!”

피츠의 얇은 가죽 갑옷이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미 목숨이 끊어졌어도 이상할 것 없는 출혈량이다.

하지만 그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채로 검을 붙들었다.

이미 한 손은 하멜에게 박살 나 버린 터라 남은 한 손으로 겨우 쥘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 정신 나간 녀석이……!”

그런 피츠의 주위엔 적갑 기사단원들의 시체가 쌓여 가고 있었다.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검에 베이면서도 피츠는 악착같이 적갑 기사단의 수를 줄이고 있었다.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작해야 실전 경험도 없는 풋내기 수준의 호위기사.

그런 녀석한테 적갑 기사단원들이 당하다니.

그것도 일대일이 아닌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어서……! 들어와라……! 네놈들을 없애야 공주님께서…….”

…파앙!

순간 정신을 잃을 뻔한 피츠는 부러진 손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갈겼다.

손과 뺨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피츠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자식이!”

부러진 오른쪽 손을 노리고 피츠의 사각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이제 막을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푸걱!

녀석의 검이 피츠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끄윽…….”

“이제 그만… 끄악!”

승리를 확신하던 그때, 피츠의 검이 녀석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갑주와 안면갑 사이에 난 작은 틈으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남은 적은 단둘.

하지만 이제 피츠에게도 한계가 왔다.

억지로라도 떠 왔던 눈꺼풀이 집채만 한 바위라도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공주님…….’

쿠웅!

육중한 피츠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드디어 끝난 건가?”

“이 망할 자식! 혼자서 적갑 기사단 몇을 처치한 거야?”

“…그래도 끝은 내주고 가자고.”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남은 두 녀석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저항해 보려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얼른 이놈들을 처치하고 공주님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카앙……. 카앙…….

오감이 모두 쇠약해져 날카로운 금속음마저 둔탁하게 들려왔다.

금속음?

어째서?

더 이상 적갑 기사들과 검을 부딪힐 사람은 없을 텐데?

“…커헉!”

쓰러진 피츠의 눈앞에 남아 있던 적갑 기사 둘이 고개를 처박았다.

녀석들의 안면갑 입 부근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힐.”

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회복 마법.

하지만 피츠는 잘 알고 있었다.

회복 마법 정도로 회복 될 수준은 이미 옛적에 넘어섰다는 걸.

누군진 모르겠지만 헛수고다.

마치 내가 공주님을 구하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아니.”

“…….”

“네가 공주의 운명을 바꿨다.”

“…….”

“그러니 편히 가도 된다.”

“…고맙소.”

마지막 한 마딜 끝으로 피츠의 입가에서 마지막 한 줌의 숨이 새어 나왔다.

***

“X발.”

회복 마법을 퍼부어 봤지만 피츠를 살릴 순 없었다.

이미 옛적에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처였다.

오로지 이글렌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더러운 놈들.”

방금 쓰러트린 적갑 기사단 둘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왕국을 수호한다는 놈들이 고작 하는 짓거리가 겨우 이거라니.

“이, 이안 백작?”

한쪽 다리를 꽁꽁 동여맨 이글렌 공주가 별장으로 되돌아왔다.

이글렌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마주했다.

“…피츠!”

그러다 쓰러진 피츠를 보곤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숨이 끊어진 뒤였다.

“…처리한 건가?”

난 크로드에게 물었다.

“그래.”

그러자 녀석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안면갑을 집어 던졌다.

거기엔 미처 안면갑을 벗지 못한 기사 하나의 머리통이 들어 있었다.

“이걸로 약속은 끝이겠네.”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크로드는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를뿐더러 딱히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내가 지금껏 아끼고 아껴 오던 크로드 찬스가 사라져 기쁘기만 할 뿐.

이글렌이 생존을 위해 꺼낸 카드는 크로드였다.

분명 이글렌을 죽이기 위해서 적갑 기사단 내에서도 강한 자를 골라 왔을 게 뻔했다.

그런 녀석을 상대라면 나나 프리아나론 부족할지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지금 구해야 할 건 이글렌만이 아니었다.

영지에 숨어 있을 일레느와 하룬도 구해야 했다.

때문에 인원을 둘로 나눴다.

이슬린과 이스바르트는 일레느를 구하러, 프리아나는 하룬을 구하러.

그리고 난 크로드를 이곳 제른 남작의 별장으로 불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반쪽짜리 성공이었지만.

“피츠! 제발… 정신 차려 줘요…….”

이글렌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쉬운 길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 바친 기사.

그의 죽음은 이글렌에게도 큰 슬픔이었다.

“…….”

그녀에겐 잠시 애도의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이글렌 공주.”

“흑흑…….”

“저와 혼약을 맺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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