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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4화 (94/222)

94화

“…X발!”

“백작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나도 안다.

방금 그걸로 에이먼은 죽었다.

자신 체내에 남은 모든 마나를 끌어올려 사용한 폭발 마법.

그걸 사용하고도 나중 가서 살아 있길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이미 죽어 버린 그를 위해 애도할 시간 따윈 없었다.

‘꼭 살거라.’

에이먼이 자신의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면서 내뱉은 유언.

그건 아들을 향한 아비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하지만 에이먼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이미 내 아버진 옛날 옛적에 첫 번째 대격변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일까?

“…기분 참 뭣 같군.”

상상 이상으로 더러운 기분이었다.

“…일어나서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에이먼의 희생으로 소테라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얼마 못 가 추격대가 붙을 거다.

고작해야 소테라의 외성 너머로 내던져진 게 전부니 추격대도 곧 따라올 터.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에이먼의 마지막 유언.

꼭 살아남아라.

하지만 상대가 갈렌 왕자, 아니 이젠 갈렌 왕이 된 이상.

이 대륙 전역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생각났다. 딱 하나. 살아남을 방도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소테라의 지금 상황을 생각했을 때, 에런골드는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 자연스레 차기 국왕 자리는 갈렌 왕자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소테라에 저따위 개짓거릴 한 이상, 왕국 연합의 비난을 피할 순 없을 터.

그런 그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은 누굴까.

“지금 당장 제른 남작의 별장으로 간다.”

“제른 남작의 별장이라면……?”

“이틀 전. 사절단 일행이 빠진 걸 알고 있겠지.”

“네. 국왕 전하께서 잠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흥. 국왕이 그랬다고?”

맞긴 할 거다. 대신 에런골드가 아닌 현 국왕 갈렌 그 개자식이겠지만.

이글렌을 잠시 빼돌린 후 왕위를 찬탈한다.

그리곤 이글렌은 따로 수하를 시켜 제거한다.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들면 그만이다.

이미 왕위를 찬탈한 이상 맹목적으로 따를 적갑 기사단이 있으니까.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아이소테르 왕위 찬탈 전쟁.

갈렌 왕자와 이글렌 공주를 내세운 치열한 내전.

그 빌어먹을 전쟁이 결국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둘러라. 이글렌 공주가 죽어 버리면 내전이고 뭐고 다 죽는다.”

“네! 백작님!”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일레느는 어떻게 됐을까.

하룬은 또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글렌 공주의 생사였다.

사실 그녀의 생존 가능성도 희박했다.

이미 에런골드마저 죽여 버린 마당에 이글렌 공주쯤이야 일도 아닐 테고.

머리 자체가 나쁜 놈은 아니라 사전 준비도 다 끝마쳐 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저세상으로 가 버린 뒤일지도.

‘재수 없는 생각은 말자. 어쨌건 살려면 이글렌 공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최악의 상황을 애써 무시하곤 제른 남작의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이른 아침.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글렌은 슬슬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제른 남작의 별장에 머무른 지 어언 사흘째다.

지금쯤이면 이안 백작도 소테라에 도착해 처분이 내려졌을 텐데.

어째서인지 소테라로부터 연락 한 통 오질 않고 있었다.

‘솔직히 굳이 쉴 필요도 없었는데.’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해서 좋을 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제른 남작의 별장에 머무른 거다.

별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타일에 고풍스런 가구들까지.

테라리움에서 공주로 살던 그녀임에도 딱히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딱 하나.

따분함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슬슬 가는 게 어때?”

“아잉~ 공주님! 좀만 더 쉬었다 가요~ 언제 또 성 밖에 나와 보겠어요?”

시녀는 공주의 말에 콧소리까지 섞어 가며 앙탈을 부렸다.

공주의 시녀는 일반 귀족집 시녀들과는 좀 격이 달랐다.

귀족 집 영애들의 교양을 배우기 위한 일종의 커리큘럼에 가까웠다.

때문에 공주의 시녀도 테라리움으로 오기 전까진 계속 영지 내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그러다 테라리움에 와선 내내 왕성에 갇혀 있었고.

그런 그녀이다 보니 이런 으리으리한 별장에서 노는 게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 로제야. 사흘이면 충분히 쉰 거 아니니?”

“힝… 그래두요…….”

주근깨가 자글자글한 이 어린 소녀는 고작해야 열 살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인데 고생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려니 이글렌은 괜히 안쓰러워졌다.

“…그래. 하루만 더 있다 가자구.”

“정말요? 와! 공주님! 최고예요!”

“그래. 그래.”

뭐가 그리 기쁜지 방방 뛰는 그녀의 모습에 이글렌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갈렌보다 로제가 더 가족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녀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로제 같았으리라.

똑똑.

“…공주님.”

묵직한 중저음의 음색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 피츠. 들어오세요.”

“예.”

피츠가 들어오자 로제는 얼른 이글렌의 등 뒤로 숨었다.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로제는 우악스럽게 생긴 피츠를 무서워했다.

특히나 오늘은 뭔가 심각해 보이는 피츠의 낯빛 때문인지 더욱 그랬다.

피츠는 그런 어린 소녈 애써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공주님. 잠시 후 적갑 기사단이 이곳으로 온다고 합니다.”

“네? 적갑 기사단이요? 갑자기 왜…….”

“그게……. 전언으로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요?”

적갑 기사단이 아무런 사정 설명도 없이 자길 만나러 온다.

그건 분명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소테르의 공주다.

그녀 또한 적갑 기사단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

그리 꿀릴 건 없어 보였다.

쿠르르…….

피츠가 말하기 무섭게 창 밖에서 마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분들이겠죠?”

“…네.”

피츠는 적갑 기사단의 당도가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다.

“괜찮아요. 별일 있기야 하겠어요?”

“…그렇겠죠?”

“네. 그럼 어서 내려가서 손님 맞을 준비부터 해 주세요. 저도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니.”

“예. 공주님.”

피츠는 짧게 고갤 숙이곤 방을 나갔다.

“공주님… 저 아저씨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으음… 그건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란다?”

“흐응…….”

“자, 노는 건 이쯤하면 됐고. 이제 내려…….”

“꺄아악!”

별안간 들려오는 비명 소리.

그 시작은 다름 아닌 별장의 1층에서였다.

“이게 무슨……!”

이글렌은 서둘러 채비를 갖추곤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런 그녀가 마주한 건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고, 공주님……!”

사절단 일행들에게 억지로 봉인구를 채워 넣고 있는 적갑 기사단원들.

공주를 따라 대전제에 나선 사절단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범죄자를 대하듯 불손한 행동에 이글렌이 크게 소리쳤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아, 이글렌 공주.”

별장에 당도한 적갑 기사단 중 독특하게 생긴 안면갑을 쓴 녀석이 공주에게 다가갔다.

“부디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용서? 지금 이따위 짓을 하고도……!”

“그리고 앞으로 지을 결례도.”

“……?”

후웅!

이글렌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려던 찰나, 녀석의 검이 크게 호를 그었다.

가냘픈 여인의 허리쯤은 일 합에 두 동강 낼 무지막지한 검격.

…카앙!

하지만 다행히 이는 이글렌의 호위기사, 피츠의 검에 가로막혔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냐! 감히 적갑 기사단의 이름을 내건 채로 이따위…….”

“그게 무슨 소리지? 설마 우리가 적갑 기사단이 아닌 그저 사기꾼이라 생각하는 건가?”

피츠의 일갈에 돌아온 건 무미건조한 답변이었다.

“그게 무슨……?”

“적갑 기사단 제3조장, 하멜 시스. 왕가 호위기사라면 몇 번 마주쳤을 텐데.”

피츠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멜 시스라면 분명 적갑 기사단의 조장으로 그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적갑 기사단의 조장답게 무지막지하게 강한 녀석이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적갑 기사단이 공주님을 해하려 한 겁니까! 이건 대역죄입니다!”

“대역죄라. 그건 아니지.”

하멜은 품속에서 종이 하날 꺼내 들었다.

그리곤 이글렌과 피츠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왕이 내린 교서였다.

“어젯밤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전 국왕 에런골드 2세께서 승하하셨다.”

“뭐, 뭣이?”

“뭐라구요?”

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하멜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서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범인은 이안 임페라 백작. 그는 대전제 우승자란 타이틀을 빌미로 전 국왕 전하를 독대할 기회를 얻어 냈다. 그리곤 독이 든 술을 이용해 그분을 살해했다.”

이글렌은 말도 안 되는 내용에 소리 질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믿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명백한 대역죄이며 이에 동조한 자로 이글렌 공주가 있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

“…….”

“그러니 대역죄인에 준하는 처벌이 그녀에게 또한 내려질 것이며, 만약 저항 할 경우 즉시 사살하는 것을 허한다.”

충격 그 자체인 교서의 내용. 거기에 하멜은 마지막으로 한 마딜 덧붙였다.

“이상 현 국왕이자 아이소테르의 적법한 37대 국왕. 갈렌 국왕 전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 생각하십니까!”

피츠는 목에 핏대를 솟아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멜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대답했다.

“말이 될지 안 될지 생각하는 건 내 권한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

“그리고.”

하멜은 천천히 피츠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장쯤 되면……. 슬슬 눈치라는 게 보이거든. 어느 줄이 썩은 줄이고, 어느 줄이 튼튼한 밧줄인지.”

“…….”

하멜은 검만 다루고 산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능구렁이 같은 놈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갈렌의 농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이글렌을 죽여 버린다면 적갑 기사단은 어쩔 수 없이 갈렌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게 왕가를 호위하는 기사단이니까.

이 일이 성공만 한다면, 하멜은 조장이 아니라 차기 기사단장까지도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 젊은 기사여. 자네도 줄을 고를 눈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하멜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단검을 꺼내 피츠에게 내밀었다.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게 기사 아니겠나?”

“…….”

파앙!

피츠는 지체 없이 하멜의 손을 뿌리쳤다.

안면갑 너머로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이었군.”

“적갑 기사단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벼락같은 일갈이 피츠의 입에서 나왔다.

“쯧.”

스릉!

피츠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응하듯 별장을 가득 메운 적갑 기사단원들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고작해야 검술 랭크 5인 녀석이 적갑 기사단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게다가 이건 대역죄야. 현 국왕님의 명령을 어기다니. 한순간의 치기로 인생을 망치고 싶은 건가?”

“…….”

“용기와 자만을 헷갈리지 말라구. 젊은 기사.”

하멜이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를 움직이지 못했다.

“…공주님.”

피츠는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뜨곤 공주를 불렀다.

“괜찮아요. 피츠.”

이글렌은 이미 상황 파악을 끝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글렌은 죽는다.

그게 그녀의 운명이다.

‘뭣 같은 인생이네.’

평생을 아비와 오라비 사이에 끼어 눈치만 보다 결국 미친 오라비 때문에 죽는다.

서글프지만 차라리 낫다.

지금 여기서 그녀 하나만 죽으면 다 해결될 문제니까.

로제도 나름 귀족 가문의 영애니 함부로 죽이진 않을 테고, 피츠도 장래가 유망한 기사니 말만 잘 따라 준다면 함부로 죽이진 않을 거다.

오늘 여기선 이글렌 하나만 죽으면 된다.

“국왕 전하의 명령이 뭐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네? 그게 무슨…….”

“공주님을 지키는 검이 되어라.”

“…….”

“진짜 국왕 전하의 마지막 명령.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잠깐……!”

이글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츠의 몸이 적갑 기사단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런 그의 검에선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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