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쿠구구…….
“어으……. 머리야…….”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땅이 막 흔들리는 것 같다.
“으음. 어지럽군요. 이상한 소리도 나는 것 같고.”
“…너도?”
“…백작님도 그러십니까?”
숙취로 헛소릴 같이 들을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저, 저기 좀 보십쇼!”
“응?”
축제의 열기에 한껏 취해 있던 취객 하나가 하늘을 가리켰다.
환하게 소테라를 비추던 달빛이 검은 먹구름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먹구름이…….”
비라도 오려는 거라 생각한 잔치꾼들은 주섬주섬 머릴 덮을 보자길 챙겼다.
“백작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는 게…….”
“저, 저건……!”
하지만 난 다른 취객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야 저건 그냥 먹구름이 아니니까.
먹구름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땅에서 솟구쳐 올라가는 게 아니니까.
그것도 테라리움의 지붕을 뚫고 터져 나오는건 더더욱 아니다.
“설마……!”
“백작님? 대체 저게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해진 내 안색에 다른 이들의 반응도 심각해졌다.
한껏 달아오른 축제 와중에 이게 무슨 분위기 깨는 짓인가 싶겠지만, 이건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당장 짐 싸라. 소테라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당장!”
“아앗! 네, 네! 백작님!”
“에잉… 백작님두 차암……. 한창 재밌게 놀고…….”
퍽!
프리아나의 손날이 술에 취한 이스바르트의 뒷덜미를 가격했다.
곧바로 정신을 잃은 그녈 프리아나가 들쳐 업었다.
…콰아아앗!
그 순간 하늘을 가득 메우던 검은 먹구름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으악!”
갑작스레 쏟아진 검은 먹구름에 파티가 한창이던 광장이 아비규환에 빠지고 말았다.
“케헹!”
제일 먼저 광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들개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 엄마……!”
그다음은 어린아이.
“으윽……! 누, 눈이……!”
그다음부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끔찍한 광경에 프리아나가 얼어붙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지만 아직 이르다.
이다음부터가 지옥의 시작이니까.
“크르르……!”
먼저 쓰러진 순서대로 추욱 늘어졌던 녀석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들의 눈동자는 흰자 하나 없이 모두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벌써 이런 짓을……!”
난 잠시나마 마음을 놓았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지금 이건 다름 아닌 ‘제물의 의식’.
악마의 마법서를 통해 흑마법을 배울 경우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소설 속 세상엔 수많은 악마의 마법서들이 나온다.
개중에 지금 이 시점에 테라리움이 가지고 있을 만한 악마의 마법서는 없다.
하지만 갑자기 생겼다는 건……!
“네크로노미콘!”
그리고 그걸 쓸 미친놈은 소테라에 딱 둘 있다.
원래 줄거리대로라면 썼을 이안 임페라.
나머지 하난.
갈렌 왕자.
“이 미친놈이 기어코 사고를 내는구나.”
아마 녀석이 악마의 마법서를 쓴 이유는 하나일 거다.
지 아버지 에런골드 2세를 죽이기 위해.
사실 소설에서도 에런골드 2세는 갈렌 왕자에게 죽는다.
사사건건 아들을 구박하는 걸 넘어서 혐오하던 에런골드.
그러다 결국 폭발한 갈렌의 손에 에런골드는 죽고 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7,8년은 지나야 일어났어야 했을 일.
벌써 일어날 일도,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었다.
“크르르륵!”
제물의 의식에 잠식된 들개 한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아직 멀쩡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라아악!”
“으악!”
퍼억!
“크륵!”
한 남자에게 달려든 들개를 발길질로 걷어찼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들개의 갈비뼈 부근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하지만 온몸을 뒤덮기 시작한 검은 기운이 스며들자 부러졌던 갈비뼈 부근이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셔서 감사……. 커헉!”
“젠장……!”
방금 애써 구한 녀석도 검은 기운에 잠식당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녀석도 들개 녀석들처럼 검은 기운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미 소테라는 손 쓸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크르륵……!”
“프리아나! 그건 내버려두고 빨리 튀어!”
“네, 네!”
프리아나는 이스바르트를 들쳐 업은 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으음…….”
차라리 이스바르트가 기절해 있는 편이 나았다.
정신을 차렸다간 저놈들과 똑같이 미쳐 버리고 말 테니까.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콰아앗!
수많은 인파로 아수라장이 된 소테라 광장.
그 가운데 얼음으로 만들어진 길 하나가 열렸다.
다행히 이슬린은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슬린이 만들어 준 길 덕에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어렵사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죠! 백작님!”
“…누군가 제물의 의식을 사용했다.”
“제물의 의식이요?”
프리아나는 아직 그게 뭔지 감조차 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슬린은 알고 있었다.
“제, 제물의 의식이라면 설마……?”
“…그래. 누군가 악마의 마법서를 썼다는 소리지. 그것도 꽤나 성능 좋은 녀석으로.”
“…갈렌 왕자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미친 놈.”
제물의 의식.
원래 소설 줄거리대로라면, 지금쯤 이안이 썼을지도 모를 아티팩트다.
시전자의 영혼을 대가로 흑마법 랭크를 영구적으로 5로 고정시키는 아티팩트.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대상이 영지 하날 관리하고 있을 경우 문제가 커진다.
그런 경우엔 대개 자기 영지를 가지고 ‘제물의 의식’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제물의 의식이 성공할 경우 해당 영지는 모두 제물화가 진행된다.
랭크가 낮은 이는 구울로.
랭크가 높은 경우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데스나이트나 벤시로.
소설 속 이안의 경우엔 좀 얘기가 달랐다.
임페라 백작령이 워낙 깡촌인데다 저택에 있을 사람이라곤 일레나 하나 뿐.
덕분에 일레느 하나만 유령으로 전락해 저택을 떠돌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일개 영지가 아닌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
여기서 제물의 의식이 펼쳐진다면…….
“크르르륵!”
“으읏!”
구울로 전락해 버린 사람 하나가 프리아나에게 달려들었다.
이스바르트를 들쳐 업고 있었던 터라 할 수 있는 거라곤 발길질뿐.
그마저도 녀석은 구울을 걷어차려다 멈칫했다.
“이, 이 분들 공격해도 되는 겁니까?”
“…….”
제물의 의식으로 구울이 된 경우는 그냥 구울이 된 경우랑은 좀 다르다.
어디까지나 검은 기운에 잠식된 것뿐 제물의 의식만 해제되면 문제없어진다.
하지만 그게 지금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지.’
“어쩌죠? 백작님?”
“…적당히 걷어차기만 해라.”
“…네!”
퍼억!
“크라악!”
프리아나의 발길질에 걷어채인 구울의 몸이 붕 솟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죽었겠지만 구울이니 죽진 않을 거다.
“가자.”
그런데 뭔가 하나를 빼먹은 것 같은데…….
“에이먼!”
“아들아!”
“…휴.”
다행히 뒤늦게나마 이변을 알아챈 에이먼이 헐레벌떡 뒤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뱃살을 출렁거리며 뛰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긴 해도 마법 랭크 4엔 도달한 사람이다.
제물의 의식은 랭크가 낮을수록 잠식이 빠르다.
에이먼이면 아마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오세요!”
“그, 그래!”
“이대로 남문으로 빠져나갈 겁니다!”
촤아악!
이슬린은 인파가 밀려오는 구간마다 얼음 장벽을 세워 가며 길을 터줬다.
덕분에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길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크르륵!”
“비켜!”
퍼어억! 퍼억!
프리아나는 등에 사람 하나를 업고도 붕붕 뛰어가며 구울들을 걷어찼다.
축구공마냥 훅훅 나가떨어지는 게 걱정이 될 법도 한데 녀석의 발길질엔 거침이 없었다.
“이대로 빠져나간 다음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그건 나가고 나서 생각하자고!”
“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리길 수 분.
마침내 소테라의 남쪽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테라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거기까집니다.”
“…이런.”
남쪽 문엔 이미 십수 명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붉은 갑주에 안면갑으로 꽁꽁 싸맨 기사단.
적갑 기사단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의 붉은 갑주는 검은 밤빛에 잠식돼 적갈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벌써 잠식된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적갑 기사단은 최소 랭크 5 이상의 실력자들.
벌써 제물의 의식에 집어삼켜졌을 리는 없다.
“왜 길을 막는 거지?”
“왕자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오늘 밤. 그 누구도 소테라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미친놈들.”
“적갑 기사단이여! 지금 저 검은 먹구름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대로 소테라에 있다간 모두 당하고 말 겁니다!”
프리아나는 남문을 가로막은 녀석들에게 목 놓아 외쳤다.
하지만 검붉은 안면갑 너머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게 바로 적갑 기사단.
왕의 명령이라면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녀석들.
말 그대로 자의식이란 게 거세된 놈들이다.
“괜한데 힘 빼지 마라. 어차피 들을 놈들도 아니다.”
“그, 그런……!”
“저길 보라고.”
“…허억!”
방금까지 급히 달려오다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문 주위로 그득그득 쌓인 시체들.
이미 남문으로 탈출하려던 자들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기사된 자로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겁니까!”
“돌아가십시오. 불응하시겠다면 처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미친놈들이……!”
프리아나의 목덜미에 핏대가 불룩 솟았다.
대화가 통할 놈들이 아니다.
강행돌파만이 답이다.
하지만.
절그럭.
“젠장.”
허리춤에 손을 얹자 쇳조각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용린검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미 크로드와의 결투로 용린검은 한계를 넘어 버렸다.
이 상태론 단 일 합만으로 검이 산산조각 나고 말 거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프리아나와 이슬린뿐.
“으윽…….”
이슬린이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남문까지 길을 뚫느라 너무 많은 마나를 소모한 탓이었다.
이대론 이슬린도 검은 기운에 제물의 의식에 당하고 만다.
“이슬린.”
“…네. 백작님.”
“이스바르트를 부탁한다. 프리아나, 싸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내 말에 프리아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이슬린은 그런 그에게 이스바르트를 건네받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응하시겠다는 거군요. 처분하겠습니다.”
스릉!
수십에 달하는 적갑 기사단원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전원 랭크 5이상의 강자.
난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용린검을 검집째 들곤 자셀 잡았다.
…파앗!
따로 수신호도 없이 수십의 적갑 기사단원이 둘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나, 다른 한 무리는 프리아나를 향해 있었다.
파아앗!
검집째로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오러 소드를 내뿜을 때와는 달리 빈약하기 그지없는 오러가 터져 나왔다.
이걸로 어찌어찌 버티다 검만 뺏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콰아아앙!
“…커헉!”
첫 합부터 무지막지한 녀석이 나왔다.
단 일 합을 섞은 것만으로 내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방금 그걸로 알았다.
이놈은 랭크 6이다.
“크으윽……!”
“저도 대전제 우승자분을 죽이고 싶진 않습니다. 이만 물러나십시오.”
“크하하……! 죽이고 싶지 않다고? 네놈이 생각이란 걸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만……!”
“…제가 실언을 했군요.”
콰과과과……!
놈의 검에서 느껴지는 오러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만한 강자가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기사단이라.
끔찍하다.
“크으윽……!”
놈의 검압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던 그때.
다른 적갑 기사단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둥글게 에워싸고 달려드는 무수한 검.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그대로 몸에 바람구멍이 나나 싶었던 그때.
부웅……!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으응?”
갑자기 힘이 샘솟거나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몸이 바람에 휘날릴 정도로 가벼워졌을 뿐이었다.
거기엔 프리아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엇……!”
그리고 그때.
“…놈을 막아라!”
설마 이슬린?
이제 더 이상 마나가 남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스바르트를 품에 안은 이슬린도 하늘로 떠오른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 일행 중 단 하나.
오직 에이먼만이 땅바닥에 손을 얹은 채 주문을 외고 있었다.
눈이 반쯤 검은 기운에 잠식된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버텨 냈다.
“지금 무슨 짓을……!”
“흐흐흐, 아들아.”
“…자, 잠깐! 멈춰!”
“…꼭 살거라.”
후우웅!
순간 하늘로 솟구쳐 오른 몸이 외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점점 멀어지는 에이먼의 몸이 적갑 기사단원들의 검에 꿰뚫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녀석들이 고갤 돌리는 순간.
…퍼어어엉!
에이먼의 몸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꽃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