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인과를 벗어난 자?’
이건 뭔 뚱딴지 같은 소리래?
하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적어도 내겐 좀 다르게 느껴졌다.
인과를 벗어난 자.
이안이 들었다면 그저 헛소리로 치부하고 말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내겐 달랐다.
이안은 거지 백작으로 몰락해 악인이 되었어야 할 캐릭터다.
하지만 나로 인해 운명은 크게 뒤틀렸다.
거지 백작에서, 장래가 유망한 젊은 기사 백작으로.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일단 난 모르는 척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예의를 갖췄다.
슬쩍 곁눈질로 에런골드를 흘끗했다.
그러자 미동도 않는 차디찬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쳇.’
어떻게 안 건진 몰라도 녀석은 내가 처한 상황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여기에 와인과 와인잔이 있다.”
“…예?”
쪼르륵.
에런골드는 영문 모를 말과 함께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영롱한 붉은빛을 반짝이는 와인은 그대로 투명한 유리잔을 향해 파도치듯 휘몰아쳤다.
희뿌연 증기가 은은하게 유리잔을 타고 올라와 향긋한 과일향을 주위로 털어 냈다.
당연한 일이다.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고. 와인은 잔에 채워진다.
원인과 결과. 심플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끔. 와인이 아닌 ‘무언가’가 잔을 채울 때도 있더군.”
“…….”
에런골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말하듯 계속 빙빙 둘러말했다.
꿀꺽.
그리곤 와인잔에 반쯤 담겨 있던 와인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녀석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향긋한 와인의 향을 만끽했다.
“한 나라를 넘어 연합을 책임지는 이상. ‘무언가’를 함부로 취할 순 없지. 하지만.”
‘하지만?’
“가끔은 무심코 삼키게 되더군. 그게 독일지 약일지도 모르면서.”
꿀꺽!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방금 저 말로 녀석의 진의를 파악했다.
놈은 알고 있다.
내가 진짜 이안 임페라가 아니란 사실을.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시간이 알려 주겠지.”
“…….”
녀석과 나 사이엔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지금 녀석이 원하는 게 뭘까.
소설의 줄거리에 따르면 녀석은 왕국 연합을 집어삼키는 게 목표다.
오베론의 힘 앞에 세워진 거짓된 평화가 아닌, 거짓을 들추고 새롭게 세워진 진짜 평화.
아이러니하지만 이는 카잔 황제의 야망과 가장 비슷했다.
그리고 그 길을 위해 날 하나의 장기말로 쓰겠다는 거다.
‘제정신인가? 이놈?’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거다.
내가 진짜 이안 임페라가 아닌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살려 두겠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그러니 알아서 처신 잘해라.
“후후.”
“내 이야기가 재밌었나 보군.”
“그럴 리가요. 국왕 전하.”
그러자 에런골드의 입가에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대전제에서 아이소테르의 이름을 드높인 점. 주인으로서 높이 살 만한 공이지. 추후에 따로 상을 내리겠다.”
“예, 국왕 전하.”
“그럼. 이만 돌아가라, 이안 백작.”
“여부가 있겠습니까.”
난 녀석을 향해 고갤 한 번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이단 심문관한테 팔목 잘릴 일은 없겠군.’
심란하지만 한편으론 안심하며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후!”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알현실을 나오자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재상, 두아트리스가 말을 걸었다.
왕의 말이라면 죽으라 해도 죽을 녀석이지만 그렇기에 더 궁금한 듯했다.
아이소테르 전역에서 충성심이라면 둘째가 서러운 그인데도 비밀로 해야 할 이야기가 뭐였는지 말이다.
“축하해 주시더군요. 대전제에서 우승했으니까요.”
“그렇군요…….”
녀석은 알려 주지 않겠다는 내 말뜻을 이해하곤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상도 따로 챙겨 주신다던데. 뭘까요?”
화제를 돌리려 대충 꺼낸 이야기긴 했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긴 했다.
알현실의 저 음흉한 녀석이 준다는 상이라면 뭔가 크긴 할 것 같은데.
“아마… 상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흠! 뭔 그런 농담을.”
“후후. 농담일까요?”
왕이 보낸다는 사람이라면 지금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다.
슬슬 혼담이 오갈 젊은 백작한테 보내는 사람.
이글렌.
미안하지만 에런골드나 갈렌 같은 녀석과 같은 집안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일단 전하께서 전하실 말씀은 더 이상 없으실 듯하니, 대전제 우승자로서 하실 일을 마저 하셔야지요.”
“흠흠. 그래야지요.”
낯 뜨거운 이야기는 이쯤이면 됐다.
그렇게 난 재상을 따라 테라리움 한켠에 자리 잡은 발코니로 향했다.
탁 트인 전경은 테라리움 꼭대기에서 소테라의 전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고 있었다.
“와아아아!”
“이안! 이안!”
소테라를 가득 메운 인파의 환호성에 응하듯 손을 치켜들었다.
“와아아아!”
거지 백작이었던 내가 테라리움에서 인파들의 환호성을 받게 될 줄이야.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 방금 두아트리스가 한 말 때문인지 머릿속엔 한 여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쯤 잘 있겠지?’
제른 남작의 별장에서 쉬고 온다 했으니.
제른 남작이면 돈 꽤나 있는 녀석이라 별장 상태도 괜찮을 거다.
적당히 쉬다 오면…….
‘아니지. 내 알 바야? 그 여자가 잘 쉬든 말든.’
애써 이글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곤 소테라의 사람들의 환호성을 즐겼다.
*
대전제 우승자를 위한 잔치는 생각보다 서민적이었다.
격식 차리기 바쁜 귀족들만이 모인 사교 파티가 아닌, 모든 백성들을 위한 잔치.
그래서인지 소테라 중앙 광장에 끝도 없이 술과 고기를 늘어놓은 채로 파티가 시작됐다.
“정말 다행입니다! 백작님!”
“크흐흐. 그러게 말이다.”
호송 마차를 뒤따라오던 일행들도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처음엔 진짜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닌가 싶었다가 소테라의 상황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아들아!”
“아, 아버지.”
파티가 한창이던 와중에 에이먼이 달려와 날 와락!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겁니까?”
“으음. 별거 아니다. 테라리움 지하 감옥에 잠시 갇혀 있긴 했지만… 어젯밤부턴 풀려나 귀빈실에서 묵고 있었단다.”
갈렌 왕자한테 꽤나 시달렸던 모양인지 두 볼이 움푹 파여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대체 그 망할 왕자 녀석이 무슨 짓을…….”
“아하하! 아니다! 내 이렇게 멀쩡한 널 볼 수 있는데 그런 자잘한 것들까지 따져 무엇하겠느냐?”
“흐음…….”
에이먼은 걱정하는 아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다 괜찮다. 나도 오면서 들었단다. 소테라의 모든 이들이 내 아들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걸! 그런데도 불만을 가졌다간 창조신께서 노여워하실 거다.”
“…….”
“자. 그럼 이제 슬픈 이야긴 멈추자꾸나. 축제가 아니더냐?”
“…네. 아버지.”
에이먼은 내 손에 술 한잔을 가득 채워 주곤 고갤 끄덕였다.
비록 내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의 부성애만큼은 생판 남의 가슴마저 뭉클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버지도 한잔 받으시죠.”
“하하! 그래! 내 이런 날이 다 있구나! 내 아들 녀석이 따라 주는 술을 다 받고!”
에이먼은 따라 준 술을 기분 좋게 들이키곤 푸근한 미소를 지어 냈다.
“흐흐……. 아들이 따라준 술이라 그런지 정말 달구나.”
“술이 달긴요. 쓰지.”
“크흐흐! 그러냐?”
“오오……! 임페라 백작님!”
“으응?”
서로 기분 좋게 잔이 오가던 와중에 낯선 이들이 에이먼을 찾아왔다.
모두 귀족들이었다.
사교 파티 땐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들이 이제 와서 줄 한번 대 보겠다고 난리 치는 거다.
“아하하……. 대전제의 우승자께서도 계셨군요.”
“…….”
난 아무런 말없이 녀석들을 노려봤다.
갈렌 왕자의 행패에도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있던 놈들이 무슨…….
“하하. 아들아. 내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 재밌게 놀고 있거라.”
이를 대강 눈치챈 에이먼이 귀족들을 이끌고 자릴 피했다.
다들 나한테 말 한번 걸어 보려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에이먼 덕에 성사되진 못했다.
“흥. 역겨운 놈들.”
저런 놈들은 무시하고 술이나 마시는 게 낫다.
“다행히 국왕 전하의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귀족 녀석들을 째려보던 내게 이슬린이 다가와 말했다.
그런 녀석의 손에도 술잔이 붙들려 있었다.
벌써 몇 잔 마신 듯했지만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뭐. 그렇지.”
“다행이네요.”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당분간은.”
“당분간?”
“음… 말하자면 길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얘기했다간 끝도 없다.
어찌됐건 당분간 에런골드나 갈렌이 날 상대로 개짓거린 못할 테니까.
“으헤헤헤…….”
“으윽……! 이,이거 놓으십쇼!”
“으이구… 요 깜찍한 것……. 일루 와 바. 이 누나가…….”
저 멀리 술에 잔뜩 취한 이스바르트가 프리아나한테 엉겨 붙어 난리를 치고 있었다.
“하이고. 저거 술 먹이지 말라니까.”
“뭐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죠. 축제니까요.”
이슬린은 한 번 피식 웃곤 술잔에 입술을 적셨다.
“흥. 축제는 무슨.”
그렇게 서로 기분 좋게 잔이 오가며 대전제 우승자를 위한 밤이 저물어 갔다.
***
“…….”
테라리움 밖에선 대전제 우승자를 위한 축제가 한창이었다.
테라리움을 비롯한 아이소테르 전역이 에런골드의 것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테라리움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이런 자리에 에런골드가 나서서 좋을 것도 없어 그냥 그는 홀로 처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릅.
그는 와인으로 목을 적시면서도 앞으로 있을 미래를 그려 나갔다.
이안 임페라.
인과에서 벗어난 자.
과거에도 그런 이들이 없진 않았다.
오베론.
그리고 카잔 황제.
이들은 등장할 때마다 대륙 전역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절대로 가까이해서도, 살려 둬서도 안 될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게 맞는 걸까?
대륙에 몰고 올 피바람을 그가 원하는대로 이끌 순 없을까?
그게 가능만 하다면…….
“가능하다.”
왕국 연합의 거짓된 평화가 아닌 진짜 평화.
이안 임페라를 잘만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자신의 딸에게 묶어 놔 수족 부리듯 활용만 할 수 있다면.
“…아버지.”
“……?”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런골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걸걸하면서도 옅은 떨림이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
조금은 이질적인 목소리였지만 에런골드를 아버지라 부를 남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갈렌.”
“예, 접니다.”
지금은 늦은 밤이다.
벌건 대낮에도 자길 만나기 껄끄러워하는 게 갈렌 왕자다.
그런 그가 한밤중에 처소로 찾아 들어왔다.
수상함을 느끼고도 남았지만 에런골드는 수상함보단 다른 감정이 앞섰다.
혐오감.
잠자리에 들기 전 바퀴벌레라도 발견한 것마냥 에런골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 늦은 시간엔 무슨 일이지.”
“…밖에서 축제가 한창이라서요. 도무지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겠더군요.”
갈렌은 여전히 어딘가 상당히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차, 차라리 다 죽여 버리는 건 안 되겠습니까? 시, 시끄러운 벌레들 전부……! 아, 아니 제일 큰 벌레 한 놈만 죽이면 되겠군요……!”
반쯤 미쳐 버린 듯한 갈렌의 목소리에 에런골드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네 녀석이 기어코 미쳤군.”
“…미쳐? 내가?”
처소에 약하게 빛나는 촛불 하나가 갈렌 왕자의 인영을 밝혔다.
갈렌은 괴로운 듯 머릴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미친 건 네놈이지! 아들인 내가 아닌 개망나니 새끼를 두둔하고 나서다니!”
“…하.”
에런골드는 혐오감을 넘어 허탈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미쳐 버린 갈렌을 유폐시키고 이글렌을 후계자로 내세울 명분이 될 테니까.
차라리 그리하면…….
‘…윽?’
적갑 기사단을 부르려던 에런골드의 손이 멈췄다.
정확히는 움직이질 않았다.
사지가 굵은 나무뿌리에 엉킨 듯 꼼짝 못한 채로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에런골드는 서둘러 체내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젊었을 적 왕립 마탑의 힘과 그의 재능을 통해 마법 랭크 5까지 달성한 그였으니까.
분명 갈렌 왕자의 수작 따윈 견뎌 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독이었다.
울컥!
“커헉!”
마나를 끌어올리려 하자마자 폐 깊숙한 곳에서 끈적한 핏덩이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제야… 독이 먹히는군요…….”
“이, 이 쓰레기 같은 녀석이……!”
에런골드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내뿜었다.
하지만 이미 사지에 모든 힘을 잃은 그가 할 수 있는건 없었다.
“지금부터… 제일 큰 벌레를 잡을 겁니다.”
팔락.
희뿌연 인영 너머로 갈렌은 희고 고운 광택이 나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