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공주님!”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
얼굴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한 어린 여자아이가 이글렌 공주를 불렀다.
이번 대전제 사절단에 이글렌 공주를 보필하러 같이 온 시녀였다.
덕분에 따로 설치된 간이 숙소에서 곤히 자고 있던 공주가 눈을 떴다.
“으응……. 벌써 출발 할 시간이야?”
“아뇨! 왕성에서 전언이 와서요! 오랜 여행 일정으로 힘드실 테니 잠시 쉬는 게 어떠냐고 하네요!”
“응? 쉬었다 오라고?”
“네!”
시녀는 신이 난 듯 얼굴에 꽃이 폈다.
사실 이글렌 공주에겐 조금 덜 할지 몰라도 어린 시녀의 입장에서 이번 여행길은 고되기 그지없었다.
각종 허드렛일하며 시녀들은 모포 하나 없이 딱딱한 마차 좌석에 앉아 따라왔다.
게다가 잠자리도 일반 병사들과 같이 모포 하나만 덜렁 주는 게 끝이었다.
“이 근방에 제른 남작의 별장이 있다고 해서요. 피곤하시면 거기서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그럼 이안 백작은 어쩌고?”
“네? 그야… 적갑 기사단분들이 데리고 가겠죠.”
“흠…….”
이글렌도 구미가 당기긴 했다.
아무리 공주라 극진히 보살핀다 해도 머나먼 타지에서의 귀향길은 힘들기 마련이다.
하루쯤 푹신한 침대에서 눈 좀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굳이?”
아이소테르의 왕성 테라리움까진 앞으로 이틀이면 도착한다.
그런데 굳이 제른 남작의 별장에서 쉴 필요가…….
“…전하께서 내리신 전언이야?”
“네! 아무래도 전하께서도 공주님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혈한.
그게 에런골드란 건 딸인 이글렌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건데.
“…알겠어. 전하께서 내리신 말씀인데 거절할 순 없지.”
이글렌은 하는 수 없이 전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갑 기사단을 뒤로하고, 다른 사절단 일행들은 근처 제른 남작의 별장으로 향했다.
“흠냐…….”
사절단 일행이 떠나가는 와중에도 이안은 마차 안에서 곤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뭣하러 죄수한테 마차 자리까지 내어주나 싶겠지만, 사실 마차보단 감옥에 가까웠다.
‘별 일 없으면 좋을…….’
이글렌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차 싶었다.
지금 그녀는 이단 심문관의 신분이고 이안은 흑마법을 배운 혐의를 가진 남자다.
그런 자를 두둔 할 이유도 없고 두둔해서 좋을 것도 없다.
“…흥.”
그렇게 이글렌은 멀어지는 적갑 기사단과 이안을 뒤로하고 마차에 몸을 실었다.
***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적갑 기사단 한 명이 무뚝뚝한 말투로 날 깨웠다.
양손이 묶인 채로 모포 깔린 마차 좌석에서 눈을 떴다.
“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날이 밝자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수 입장이라면 밤낮 가리지 않고 곧장 달려갔겠지만, 일단은 혐의만 있을 뿐 죄가 확정되진 않았다.
게다가 사절단 일행과 함께하는 터라 잠도 꼬박꼬박 재워 주고 밥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저 멀리 뒤에선 졸졸 따라오는 프리아나와 일행들이 보였다.
“저 친구들은 잘 따라오고 있나?”
“규정상 다른 일행들과 사담은 불가능합니다.”
“에잉. 매정하구만.”
“…….”
실없는 소리를 해 봤지만 적갑 기사단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오로지 국왕의 명에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적갑 기사단.
사흘간 한솥밥 먹었으면 살갑게 대해 줄 만한데 녀석들은 행동거지에 바뀐 낌새랄 게 없었다.
“쯧.”
“그리고 오늘부턴 저희 적갑 기사단원들과 이동합니다.”
“응?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나?”
“…….”
무슨 소린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매일 마차 건너편에 앉아 날 감시하던 이글렌 공주와 피츠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람이 좀 비는군.”
“사절단 일행분들은 제른 남작의 별장에서 여독을 푸실 예정입니다.”
“난 계속 가고?”
“네.”
“그래? 가는 길에 말동무는 있어서 덜 심심했었는데. 아쉽게 됐구만. 그쪽이 대신 해 줄 순 없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너스레에도 적갑 기사단 녀석은 짧게 목례를 하곤 대열로 돌아갔다.
섭섭하긴 하다만 뭐 어쩌겠나.
난 곧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는 몸이고, 저 녀석은 왕국의 충직스런 기사단인데.
“하.”
덜그럭.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텅 빈 마차에 홀로 앉아 창밖에 고갤 내밀었다.
옆에선 말에 탄 적갑 기사단원들이 빙 둘러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제 좀 죄수 호송하는 분위기다.
아마 이틀 정도 있으면 아이소테르의 왕성, 테라리움에 도착할 것이다.
그럼 날 어찌할지 처분이 내려질 테고…….
“…가만있어 보자.”
앞으로 이틀이면 내 생사가 결정된다.
그렇다는 건……?
‘이틀이면 도착할 텐데 굳이 쉬었다 간다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공주의 상태가 심각한 거면 이해하겠는데, 당장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난 창 밖에 선 기사단원 하나에게 물었다.
죄다 붉은 갑옷에 안면갑까지 쓰고 있어서 아까 날 깨운 그 기사인지는 모르겠다.
“공주님한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가?”
“…….”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않나?”
“…아닙니다. 왕성에서 공주님이 피로하실 걸 염려해 새로이 내려온 전언이었습니다.”
“흠. 그럼 다행이군.”
공주가 어디 다친 건 아닌 듯했다.
‘잠깐. 그럼 더 이상한데. 왜 멀쩡한 공주를 굳이 쉬라고 한 거지?’
새로이 생긴 의문을 물어보려다 말았다.
물어봐야 알려 주지도 않을 테고.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하지만 이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카맣게 잊혀졌다.
테라리움에 도착하자마자 믿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
“와아아아!”
“뭐, 뭐야?”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
그 안에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은 왕성 테라리움.
소테라의 경계를 나누는 커다란 외성 너머로 힘찬 환호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호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
이안 임페라였다.
“이안! 이안!”
덜컥.
지금껏 힘차게 달려오던 마차가 소테라의 외성 앞에서 멈춰 섰다.
덕분에 외성 너머로 내 이름이 얼마나 크게 울려 퍼지는지 체감이 될 정도였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마차를 굳게 닫고 있던 문이 열렸다.
“백작님.”
“음?”
“그간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
철컥!
문을 열어젖힌 적갑 기사단 녀석이 두 손을 묶고 있던 봉인구를 풀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에 녀석이 사정 설명을 마저 늘어놓기 시작했다.
“방금 전 왕성에서 전언이 내려왔습니다. 이안 임페라 백작님의 흑마법 관련 혐의는 잠시 보류하고, 당분간 대전제 우승자로서 예우를 갖추라 하셨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에런골드는 잠시 동안이나마 내 편을 들어줄 생각인 듯했다.
물론 좋게만 볼 건 아니었다.
‘혐의가 없는 게 아니라 보류한다라.’
그 말인즉 언제든 싹을 잘라 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지독한 녀석이야 아주. 봐주려면 그냥 봐줄 것이지.’
일단은 살았다.
이대로 꼼짝없이 왕성에 끌려가 손목이 날아가나 싶었는데.
“그럼.”
적갑 기사단 녀석은 그렇게 짧게 대답하곤 마차 문을 닫았다.
우웅…….
거기에 더해 마차 주위를 감싸고 있던 반투명한 막도 사라졌다.
아까완 달리 선선한 바람도 느껴지는 게 날 구속하려던 결계가 사라진 듯했다.
“와아아아!”
외성을 넘자 테라리움을 주위로 가득 메워진 군중이 나타났다.
대전제는 대륙 전역이 참가하는 축제다.
그리고 난 거기서 우승했다.
어쩌면 갈렌 왕자의 개짓거리만 없었어도 당연히 누렸어야 할 찬사.
그렇기에 당연했지만, 한편으론 똥 싸고 밑 안 닦은 것마냥 찜찜했다.
“흠…….”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꿍 해 있을 수만은 없다.
날 조지려는 놈이 있다면, 다시는 조질 수 없도록 내 입지를 굳건히 해야 한다.
난 창 밖으로 몸을 반쯤 빼내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아!”
“저 사람이 그 우승자인가 봐!”
“이안! 이안!”
소테라의 사람들은 당당히 외성을 뚫고 입성하는 일행의 모습에 환호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죄수와 죄수 호송인 사이 관계였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영광스런 우승자와 그를 호위하는 기사단의 무리였다.
소테라의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노인네까지.
모두가 대전제에서 명성을 떨친 우승자를 향해 축복을 내려 주고 있었다.
“하하, 그래요. 내가 그 우승잡니다.”
에런골드의 의중은 잠시 제쳐 두자.
승자의 여유를 누리는 와중에 하얀 천옷을 걸친 아이들이 꽃을 한 아름 따 안고 다가왔다.
아이들은 천천히 달리는 마차를 향해 향긋한 꽃잎을 뿌려 주며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배, 백작님…….”
개중에 한 소녀가 직접 만든 듯한 꽃목걸이를 내게 건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렵게 만들었는지 손엔 울긋불긋 꽃물이 물들어 있었다.
난 싱긋 웃으며 아이가 건넨 꽃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고맙구나.”
“헤헤. 고마워요!”
아이는 자기 선물을 받아 준 게 고마운 듯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소테라를 가득 메우던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도 더욱 커져갔다.
다 망해가던 시골짝 망나니 공자 녀석의 개과천선 스토리.
다소 뻔하지만 또 그만큼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없다.
“이안! 이안!”
‘좀 찜찜하긴 하다만… 그래도 좋긴 좋군.’
사람들의 환호를 만끽하며 마차는 천천히 소테라의 거릴 지나쳤다.
그 끝엔 소테라의 웅크린 백색 거산.
테라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꿀꺽.
과연 에런골드는 무슨 생각일까.
그렇게 긴장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마차는 백색 거산의 입을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이제 좀 조용하네.”
테라리움은 왕성이다 보니 출입 제한이 엄격했다.
그러다보니 테라리움 내에서 일하는 이들 말고는 없었기에 바깥과는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주변 상황에 방금까지 있던 일들이 꿈인 것만 같았다.
덜컥.
조용히 테라리움 내부를 거닐던 마차가 멈춰 섰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 합니다.”
“아. 그래.”
적갑 기사단원들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이들의 안내를 따라 향한 곳은 테라리움 정중앙에 위치한 큼지막한 계단.
그리고 이 계단의 끝엔.
테라리움의 주인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에런골드 2세.’
아이소테르의 국왕.
지난번 사교 파티 때 잠깐 보긴 했지만, 그땐 어디까지나 살짝 얼굴만 비춘 것에 불과했다.
이 계단의 끝에 위치한건 왕의 알현실.
알현실에서 왕을 맞이하는 건 여간 있기 힘든 일이었다.
“올라가시죠.”
“응? 나 혼자 가나?”
“예. 국왕 전하의 전언이었습니다.”
“흠.”
이건 뭐 가시 방석이 따로 없다.
가뜩이나 대하기 껄끄러운 놈인데 독대라니.
하지만 한편으론 제대로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도 머리 좋기론 둘째가 서러운 녀석이었으니까.
대체 뭔 생각으로 날 이토록 비호하는지도 궁금했다.
정말 귀족들 간 분란을 야기하기 위해 날 추켜세우는 걸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본 내용 그대로 지레짐작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크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수록 저 멀리 알현실의 문이 가까워졌다.
“오셨습니까. 이안 임페라 백작이시여.”
“…….”
알현실의 문 앞엔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긴 했지만 눈에 총기가 남다른 남자였다.
‘누구지?’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이 나라의 재상. 두아트리스이옵니다.”
“아. 그렇구만…요.”
나도 모르게 반말을 하려다 급히 존대로 바꿨다.
아무리 백작이라 해도 재상 앞에선 흔하디흔한 귀족이니까.
다소 예의 없는 언행이었지만 재상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들어서시지요.”
“으음. 국왕…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그럼.”
두아트리스는 내 말에 싱긋 웃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그그극……!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알현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알현실엔 인기척이랄 게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하께선 백작과 단둘이만 있길 원하셨습니다.”
“단둘이?”
“예.”
기분 나쁜 소리가 아닐 수가 없다.
국왕 녀석이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한편으론 의아했다.
정말로 굳게 믿는 심복이 아닌 이상 독대는 위험한 짓이다.
만에 하나 앙심이라도 품고 사달이라도 났다간 엄청난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지가 원한다는데.
“그럼…….”
난 재상을 뒤로 하고 알현실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알현실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에런골드 2세.
동시에 그의 입에선 내 귀를 의심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또 보게 되는군. 이안 임페라. 인과를 벗어난 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