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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0화 (90/222)

90화

덜컹.

아이소테르로 향하는 마차는 조용했다.

승차감이 조용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하룬이 만들어 준 마차가 더 조용한 편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분위기.

마차 안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더 조용했다.

마차 안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잘 따라오고 있는 겁니까?”

“…네. 아직 혐의가 확정된 건 아니니 일행분들까지 거칠게 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뒤에 다른 이들과 같이 따라오고 있어요.”

“다행이군요.”

마차 안에는 나와 이글렌. 그리고 피츠.

이렇게 셋만이 앉아 있었다.

웅웅웅.

양손에 수갑처럼 채워진 봉인구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이걸 착용하고 난 이후로 마나가 모이질 않은 게 꽤나 귀찮은 아티팩트 같았다.

“괜한 짓은 삼가 주십쇼.”

맞은편에 앉은 피츠가 두 눈알이 빠져라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이 상태로 뭘 하겠냐.”

짜증 섞인 반항에도 피츠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임페라 백작?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게?”

“글쎄요. 어떤 것 같습니까?”

“…….”

되려 되묻는 대답에 이글렌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봐요. 전 지금 당신을 도우려 하고 있다구요. 만약 혐의가 없다면…….”

“이단 심문관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됐어요. 그럼.”

이글렌은 토라진 채 고갤 돌렸다.

다릴 꼰 채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강하겠죠? 저자들은?”

난 창 밖을 보고 있는 이글렌에게 물었다.

우리 둘의 시선 끝엔 마차 주윌 둘러싼 채 철통같은 호위를 유지하고 있는 적갑 기사단에게 쏠려 있었다.

“네. 아무리 대전제에서 우승한 당신이라 해도 질 겁니다.”

“음……. 일대일로 싸워도 그럴까요?”

“…하! 지금 저들을 상대로 이기고 도망이라도 가겠다 이거예요?”

“그건 불가능하겠죠. 게다가 그랬다간 제 혐의를 인정하는 꼴이 될 테고.”

“…그 말은 흑마법에 손을 댄 건 아니라는 거네요?”

“아까 구속구를 채울 때 보셨잖습니까. 제 랭크.”

“…….”

사실 랭크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방금 구속구를 채울 때 보긴 봤을 거다.

내가 가진 랭크는 ‘마법’과 ‘검술’ 랭크뿐이란 걸.

“그리고 갈렌 왕자님이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잘 아실 테고.”

“…….”

이글렌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대체 왜 그게 임페라 백작가 저택에 있는 건데요?”

“그거라면… 네크로노미콘 말씀이시겠군요.”

“잘 알고 있네요.”

“하지만 있는 것뿐이지, 쓴 건 아니잖아요? 악마의 마법서야 꼭 흑마법을 배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겠죠? 제 왼손을 멀쩡히 남겨 둔 걸 보면.”

난 구속구에 봉인된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행히 멀쩡히 붙어 있긴 했다. 이게 얼마까지 갈진 모르겠다만.

“…하아.”

이글렌은 한숨을 푹 내쉬곤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내 양손을 봉인하고 있던 구속구를 열어젖혔다.

철컥!

“고, 공주님!”

이를 본 피츠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글렌은 귀찮다는 듯 봉인구를 풀어 버리곤 바닥에 내팽개쳤다.

“됐어요. 이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 붙잡아다가 괴롭히는 거. 옛날부터 싫었으니까.”

“하오나…….”

“…감사합니다. 공주님.”

“흥.”

이글렌은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본 채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크흠.”

이 여자를 믿어도 될까?

소설 속 이글렌이 갈렌 왕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건 안다.

하지만 결국엔 이 여자도 에런골드의 딸이고 갈렌 왕자의 동생이다.

그런 작자를 함부로 믿어도 될까?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글렌은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진짜 악인이라면 피츠를 제압하고 공주를 인질로 삼아 도망갈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본국으로 갔다간 높은 확률로 블랭크가 되버릴 테니까.

그럼에도 이 여잔 날 믿어줬다.

“…절 믿어 주셨으니 사실대로 말씀 드리죠.”

“…정말요?”

침울해 있던 이글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시다시피 네크로노미콘의 존재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지만 존재를 아는 것과 쓰는 건 엄연히 다르죠.”

“그럼 왜 불태워 버리지 않았죠? 그런 악마의 마법서를 내버려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악마의 마법서는 어디까지나 악마들의 것입니다. 그런 걸 함부로 불태워버렸다간 악마들의 미움을 사겠죠.”

“그런…가요?”

“그럴 거 같더라구요.”

“흠……. 그럼 그 악마의 마법서가 왜 임페라 백작가의 저택에 있었던 거죠?”

“아마 선대 가주님, 그러니까 쥬베른 임페라 백작님이 구한 것일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임페라 백작령은 잘나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덕분에 영지에 웬만한 사고가 터져도 선대 가주님의 힘으로 해결이 가능했죠.”

“음…….”

“예를 들면 흑마법사들이 악마의 마법서로 악마를 소환하려던 걸 저지한다거나. 뭐 그런 거죠.”

“그럼 그때 쥬베른 백작이 구한 걸 거다. 이 말인가요?”

“네. 그분도 저와 같은 이유에서 네크로노미콘을 파괴하는 걸 꺼려 하셨을 테고요.”

“으음…….”

이글렌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검지 손가락으로 지긋히 눌렀다.

“그럼 제가 전하께 잘 말씀 드려 볼게요. 이안 백작은 흑마법에 손을 댄 게 아니라 그저…….”

“그건 순전히 국왕 전하의 마음에 달렸죠.”

“…….”

상당히 날이 서 있는 발언이었다.

‘어차피 이단 심문은 다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 나는 거 아니냐.’

그게 내 말의 속뜻이었다.

이글렌도 왕족이니 그걸 모를 리는 더더욱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나머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네요.”

“뭐. 그렇죠.”

그렇게 다시금 마차 안엔 적막이 맴돌았다.

어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아직 이걸론 피곤해하기도 이르다.

위셀란에서 아이소테르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만 꼬박 닷새는 걸린다.

그렇다는 건.

‘갈렌한테 죽기 전에 어색해서 죽겠네.’

***

“백작님은 괜찮으시겠죠?”

“이글렌 공주님이라면… 아마 백작님께 심한 짓은 안 하실 겁니다.”

조용히 연행돼 가는 이안을 따라 그의 일행들도 뒤를 따라왔다.

아직은 혐의가 인정된 게 아니라 셋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아이소테르 사절단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일까요? 이안 백작님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게…….”

이스바르트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도 잘 알았다.

이안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설령 그가 흑마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백작님…….’

이스바르트는 말씀하게 아문 얼굴의 흉터를 매만졌다.

모든 귀족들이 그녀를 괴롭혀도 이안만큼은 달랐다.

그런 그가 악인이라니.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백작님이 흑마법에 손을 댔을 거라고?”

“잘… 모르겠어요. 실은 백작님이 워낙……. 신기하신 면이 많잖아요?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고. 가끔은 엄청 대단하신 악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불경한 생각은 접어 두십시오.”

“아앗……. 죄송합니다.”

“그리고 백작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쉽게 강해지는 길을 선택하실 그런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죄송해요…….”

셋이 흑마법사에게 가진 인식은 사뭇 달랐다.

프리아나에겐 반드시 제거돼야 할 절대적인 악.

이슬린에겐 조금 질이 나쁜 마법.

이스바르트에겐 마법 랭크나 흑마법 랭크나 그게 그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 셋 모두 한 가지 마음은 같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안 백작을 따른다.

그게 셋이 가진 하나의 생각이었다.

***

“후후후!”

갈렌은 힘찬 발걸음으로 대전을 거닐었다.

그토록 에런골드가 애지중지하던 이안 임페라 녀석의 비행을 파헤쳤으니까.

단순한 비행 정도가 아니다.

왕국 연합법 상 대죄에 해당하는 흑마법이라니.

이제 그 잘난 에런골드도 인정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자신이 틀렸다고. 이안 임페라를 밀어 줘선 안 됐을 거라고.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

자신의 아들 갈렌이 옳았다고 인정해 주기를 원했다.

“전하!”

대전의 문을 활짝 연 채 제 아비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대전의 가장 높다란 자리엔 에런골드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찰거머리 같은 재상, 두아트리스도 있었다.

재상은 갈렌 왕자를 보자마자 뜨악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 오, 오셨군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그 망할 망나니 녀석의 추악한 가면을 벗겨 내고야 말았는데! 직접 보고를 드려야……!”

“보고는 이미 받았다.”

“아앗……. 그, 그러셨군요! 후후,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 망나니 녀석의 본 모습이 실은 역겨운 흑마법사일 줄이야…….”

“…….”

갈렌은 혼자 신나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아트리스 재상의 침울한 표정 변화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미 이글렌에게 말해 놨습니다! 당장 이단 심문관으로서 녀석을 잡아 오라고! 조금이라도 반항 했다간 가차 없이 블랭크로…….”

“쓸데없는 짓을 했군.”

“…예?”

에런골드의 말에 갈렌 왕자는 제 귀를 의심했다.

쓸데없는 짓?

왕국 연합의 적인 흑마법사를 찾아냈는데, 쓸데없는 짓?

“그, 그게 무슨…….”

“…이번 대전제의 우승자가 누군지 아느냐.”

“예? 그건… 놈의 저택을 수색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

“이안 임페라 백작. 그가 이번 대전제의 우승자다.”

갈렌은 심장이 철렁했다.

기어코 그 망나니 새끼가 우승을 하고야 말았구나.

그렇다는 건…….

“대전제의 우승자가 사실은 흑마법사였다는 소릴 하고 있는 거다. 네놈은.”

“하, 하오나… 놈이 진짜 흑마법사라면…….”

“…….”

에런골드는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옆에서 보다 못한 두아트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이미 그자가 아이소테르의 이름을 달고 대전제에 나온 이상, 그런 자를 출전시킨 왕국의 체면에도 큰 손상이 될 것입니다.”

“으윽…….”

“게다가 확인해 본 바론 이안 임페라 백작은 흑마법 랭크를 보유조차 하지 않았다더군요. 보고에서 나온 악마의 마법서는 그가 아닌 쥬베른 임페라 백작이 구한 걸로 알려져 있구요.”

“…….”

방금까지만 해도 득의양양했던 갈렌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노인지 설움인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라 갈렌의 몸이 옅게 떨렸다.

“저, 전하…….”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비를 올려다봤다.

그건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저 벌레 한 마릴 내려다보는 듯 혐오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으, 으윽……!”

갈렌은 그 길로 곧장 대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뒤로 두아트리스와 에런골드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임페라 백작가 저택에서 구한 악마의 마법서는 어찌할까요?”

“…금서 보고에 보관해라.”

“예. 전하.”

“…허억! …허억!”

대전을 빠져나온 갈렌은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몇 번을 마주해도 에런골드의 눈빛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그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해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지금처럼 차디찬 시선만 내보일 뿐.

“대체… 대체 왜……!”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뻐한다던데, 어쩜 저리도 자신의 자식에게 매정할까.

저 괴물이 정말로 아버지란 게 맞는 걸까?

그저 날 억누르기 위한 족쇄일 뿐인 게 아닐까?

“…….”

까득!

갈렌 왕자의 이가는 소리가 왕궁 복도에 쓸쓸히 울려 퍼졌다.

그런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건드려선 안 될 금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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