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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9화 (89/222)

89화

“흐아!”

폐막식이 끝나고 곧장 숙소로 되돌아왔다.

일단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끄응…….”

“몸 상태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뭐… 죽을 맛이긴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네.”

“다행이군요.”

“그럼…….”

임페라 백작령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려 했지만 이슬린이 안 보였다.

‘하긴. 방금 갔는데 벌써 알아냈으면 그게 이상하지.’

이스바르트도 이슬린을 따라갔는지 숙소가 횅했다.

그럼 지금은 ‘약속’을 지킬 때다.

달칵.

“오…….”

대전제 우승 상품으로 받아온 자그마한 상자.

그 안을 열자 푸른 보석처럼 생긴 마핵이 반짝였다.

아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못 봤다.

레서 드래곤의 마핵.

이거면 용린검을 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능까지 곱절은 늘릴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스스로 의지를 갖는 에고 소드까지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고 소드가 어디 아무나 만드는 건 아니다만, 내겐 충분한 재료와 뛰어난 장인, 하룬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 이걸 하룬한테 가져가서 부탁만 하면 된다는 건데.

‘아깝네.’

“…백작님? 저도 한 번 구경해 봐도 되겠습니까?”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프리아나가 말을 걸었다.

“음? 아, 그래.”

뭐 보기야 지금 실컷 봐 둬야지.

“오… 영롱한 빛깔하며 느껴지는 마나량까지……! 역시 레서 드래곤의 마핵은 다르군요!”

“뭐. 그렇긴 하지.”

레서 드래곤이 드래곤의 아종이긴 하지만 강력한 몬스터인 건 매한가지다.

홀로 영지 하나 박살 내고도 남을 강력한 몬스터.

그런 녀석에게서 구할 수 있는 마핵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럼… 이걸로 백작님의 검을 강화시키실 겁니까? 아니면…….”

“그건 말이야.”

난 프리아나의 손에 들려 있던 마핵을 다시 낚아챘다.

그리곤 창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우웅!

크게 난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조, 조심하십시오! 백작님! 그러다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거센 바람에 프리아나는 되려 지가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응? 아. 괜찮아.”

창 밖을 보자 폐막식이 끝난 경기장이 보였다.

이제 보름 정도 자잘한 거리 공연이나 여흥거리가 열릴 거다.

그래서 그런지 기사단의 성지 주변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음…….’

북적이는 인파를 살펴보다 수상쩍은 놈 하나가 눈에 밟혔다.

다들 신나게 놀기 바쁜데 홀로 회색 후드를 꾹 눌러쓴 채 숙소 쪽을 노려보는 한 남자.

정확히는 숙소에 있는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런 녀석을 향해 마핵을 흔들어 보였다.

“배, 백작님?”

“자, 그럼…….”

순간 수상쩍은 기운을 느꼈는지 프리아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숙소 밖에 있는 수상쩍은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쐐액!

그대로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이 망할 X 같은 XX가!“

이어서 창 밖에서 뭔가 심한 욕소리가 들려왔지만 인파에 묻혀 금세 사그라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지만 화낼 여유는 없어 보였다.

“크흐흐! 누가 주워 가기 전에 얼른 찾으러 가야 할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샌가 수상쩍은 녀석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백작님! 대체 그게 무슨!”

“응? 아, 이게 약속이었거든.”

“…네?”

프리아나는 여전히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게 검 좀 써 본 사람이라면 마검과 일반 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다 알고 있다.

거기에 마핵의 수준이 높을수록 마검의 수준도 높아지는 건 당연한 상식.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검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창 밖에 버린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미친놈도 이런 짓은 안 한다.

“어제 결승전에서 맞붙은 셸랑 데카드라는 기사. 그게 크로드인 건 알지?”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담 셸랑 데카드가 가명인 것도 알겠고.”

“음…….”

“그럼 우승 해 봤자 수여식 때 들키는 건 시간문제란 것도 알겠지.”

“아……!”

프리아나는 그제야 이해 됐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정체를 숨겨 주던 고대인의 유물도 박살 난 마당에 녀석의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 녀석이 우승이라도 했다간 어떻게 될까?

우승 상품은 단상에서 소속 국가의 대표가 주기로 되어 있다.

일단은 셸랑 데카드란 이름이 위셀란에 속해 있으니 위셀란의 왕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우승 상품은커녕 곧바로 붙잡혀 극형에 처해지고 말 거다.

그래서 나랑 약속을 하나 했다.

‘여기서 얌전히 져 줘라. 그럼 레서 드래곤의 마핵은 넘겨주겠다.’

그럼 서로 윈윈이다.

난 대전제 우승자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고, 놈은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얻게 되니까.

‘영겁의 기사단을 깨우는 데 한 발짝 다가서게 되겠지만……. 뭐 거기에 들어갈 재료가 한두 개도 아니고.’

레서 드래곤의 마핵은 어디까지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히는 드래곤 하트마냥 어마어마한 마나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 간장 종지 정도다.

세숫대야에 물을 퍼 담을 걸 간장종이로 하는 격이지만..

그릇 자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니까.

에고 소드가 좀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레서 드래곤의 마핵으로 검을 강화하는 건 좀 낭비다.

‘최고급 스테이크에 금박지 뿌리는 느낌이지.’

뭐 보기 좋은 게 맛도 좋다고 스테이크에 금 뿌려 먹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스테이크가 더 맛있어지진 않는다.

차라리 그걸로 스테이크 한 덩어리 더 썰고 말지.

“스테이크라.”

꼬르륵!

요 며칠간 몸을 좀 썼더니 고기가 땡겼다.

“일단 밥이나 먹자고.”

“아… 네.”

프리아나는 밥 얘기에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아직 마핵이 아까운 듯했지만 맛있는 거 먹다 보면 금세 잊을 거다.

*

기사단의 성지에서도 귀족들만 출입 가능한 고급 레스토랑.

시간이 이른데다 귀족만 출입 가능해서 레스토랑은 한적했다.

덕분에 레스토랑이 가진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한쪽 벽이 통 유리로 장식된 벽 너머론 해안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반짝이는 모래사장까지 더해지자 한 폭의 그림이 자리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문제란 거지.”

위셀란은 해상도시다.

덕분에 소나 돼지 같은 가축 고기가 드물었다.

대신 생선이나 어패류는 많았다.

“어,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접객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번 대전제의 우승자이자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한 이안 임페라 백작.

이안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딱히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다만, 아직 성격이 개차판으로 정평 나 있는 소문까진 어쩔 수 없나 보다.

“메뉴는 이게 단가?”

“예, 예……! 백작님!”

하지만 아무리 메뉴판을 들여다봐도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육즙 가득한 고긴데.”

“그…럼 씨 서펜트 고기는 어떻습니까?”

“씨 서펜트?”

그러고 보니 메뉴판 맨 뒤에 별도로 첨부된 자그마한 책자가 눈에 띄었다.

“아! 평소엔 잘 나오지 않습니다만. 대전제 기간에 한해 대접해 드리는 특별 메뉴입니다.”

“호오…….”

“네. 매년 이맘때 앞서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로 씨 서펜트 사냥을 나선답니다. 덕분에 위셀란에서 대전제가 열릴 땐 다들 씨 서펜트 고길 맛보고 가시죠.”

“흠.”

그러고 보니 씨 서펜트는 지구의 다섯 번째 대격변이 열리고 난 이후부터 나타난 몬스터이기도 했다.

‘신기하단 말이지. 왜 여기 몬스터랑 지구에 나타난 몬스터랑 겹치는 게 많은 거지?’

사실 대격변 이후 지구와 여긴 비슷한 게 많았다.

탑과 던전이라든가, 몬스터들이라든가.

랭크 시스템과 발할라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맥락이었다.

가설은 뭐 여러 가지 세울 수 있다.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대격변 이후 지구의 모습을 본떠 소설을 쓴 걸수도 있고.

아니면…….

‘가설이야 뭐 끝도 없지.’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씨 서펜트가 꽤나 맛있는 놈이란 거다.

‘일곱 번째 대격변부턴 독 때문에 맛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녀석. 독은 없나?”

“물론입니다! 고기의 육질 또한 마흔 번째에서 쉰 번째 뼈대 고기만 써서 아주 부드럽고 일품이죠.”

“음… 그럼 난 마흔 두 번째 뼈대에 붙은 놈으로 하지.”

“하하하… 씨 서펜트 고기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접객원은 자그마한 종이에 뭐라 끄적이더니 금세 자릴 비웠다.

“제건 주문 안 받는 겁니까?”

프리아나는 내 주문만 받고 자리를 비운 게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씨 서펜트 본 적 없나?”

“음……. 어렸을 때 책에서 보긴 했습니다. 바닷뱀처럼 생긴 몬스터 아닙니까?”

“그럼 크기는 잘 모르겠네. 씨 서펜트 허리가 아마 이 탁자 정도로 굵을 거야.”

“예?”

프리아나는 둥그런 원형 탁자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름만 2미터쯤 되니 놀랄 만했다.

“다 먹을 수 있겠지?”

“후후, 그럼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접객원은 큼지막한 접시에 씨 서펜트 고기를 지고 왔다.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았지만 2미터 가까이 되는 둥그런 고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소고기 비슷하면서도 닭고기 향이 나는 신기한 고기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쇼.”

접객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채 자릴 비워 줬다.

난 익숙한 솜씨로 고기 중앙에 자리 잡은 뼈대를 발라냈다.

그리곤 한입 크기로 썰어 입 안에 가져갔다.

“음……!”

한입 베어 문 난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독?”

“…그리운 맛이구만.”

“아……. 예전에도 먹어 본 적 있으신가 보군요.”

“음……. 뭐 그런 거지.”

사실 이안의 기억 속을 들여다본 바론 바다에 와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씨 서펜트도 처음 먹는 거다. 이안의 입으론.

그럼에도 뭔가 익숙한 맛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맛도 똑같네. 거 참.’

잡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려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고기 앞에서 딴생각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음! 이거 맛있는데요?”

“그럼. 누가 시킨 건데.”

“후후.”

다행히 프리아나의 입에도 맞는지 씨 서펜트 고기에 연신 칼질을 해 댔다.

그렇게 서로 배가 뽈록 튀어나올 때까지 먹고 나서야 프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 에이먼 백작님께 별일은 없겠죠?”

“아마 없을 거야. 아마.”

찜찜한 답변에 프리아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황상 별 일 없진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괜한 스트레스 받는 것 말고는.

“이슬린이 곧 알아 올 테니 그때까지…….”

“백작님!”

이슬린과 이스바르트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양반은 못 되는구만 얘네들도.’

“어, 좀 알아봤나?”

“그, 그게……!”

이스바르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는지 숨 고르느라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

이슬린을 흘긋 쳐다보니 그녀도 안색이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에이먼 백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그게… 대전제가 한창인 와중에 갈렌 왕자가 휘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임페라 백작령을 방문했다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흠…….”

대충 예상은 했던 일이다.

내게 개짓거릴 하려는 놈은 갈렌 왕자 말곤 딱히 없으니.

“무슨 이유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결과는 압니다.”

“결과?”

“임페라 백작가 저택의 보고에서… 책 한 권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책……?”

순간 기억 저 편에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책.

그것도 갈렌 왕자가 날 조지려고 찾은 책.

그럼 딱 하나 있다.

본디 이안 임페라. 망나니 거지 백작이 사용했어야 할 아티팩트.

사용 시 대상의 흑마법 랭크를 5로 고정시키는 사기적인 성능을 갖고 있지만, 시전자의 영혼을 취하는 악마의 마법사.

네크로노미콘.

“이런 ㅆ…….”

“이안 임페라 백작!”

한적한 레스토랑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와락! 몰려 들어왔다.

붉은 갑주와 안면갑으로 치장한 기사.

아이소테르 최강의 전력.

적갑 기사단.

이번 대전제의 사절단에 동행한 적갑 기사단원들이었다.

그중엔 익숙한 얼굴이 둘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아리따운 여인과 그에 상반되듯 우악스럽게 생긴 남성.

이글렌 공주와 그녀의 호위 기사 피츠 라이트였다.

둘은 나와 짧게나마 안면을 터서 그런지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나 이글렌 쪽이 더.

하지만 이글렌은 착잡한 얼굴로 본인의 할 일을 다 했다.

“이안 임페라 백작. 그게 사실입니까? 당신이 흑마법을 연구하려 했다는 게?”

“…하.”

이건 외통수다.

누군가 파 놓은 지독한 외통수.

이글렌의 물음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는 않으시는군요.”

이글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어 갔다.

“나 이글렌 아이소테르 페레도르. 이단 심문관의 신분으로 이안 임페라 백작의 신변을 구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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