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8화 (88/222)

88화

대전제 결승전이 끝났다.

하지만 준우승자인 셸랑 데카드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우승자인 나도 정신을 잃었다.

솔직히 우로보로스의 눈물 후유증도 있고, 상대도 크로드였으니 일주일은 기절해 있을 줄 알았는데.

대전제 일정을 위해서인지 위셀란의 신관이란 신관은 죄다 모여 내게 회복 마법을 퍼부어 줬다.

덕분에 꼬박 반나절만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도 없이 대전제를 마무리할 수도 없을 노릇이라 대전제 일정도 하루 늘어났다.

소설에서도 결승전에선 부상이 많은 터라 이런 식으로 하루, 이틀 정도는 늘리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새로이 추가된 대전제의 마지막 날.

회복 마법을 퍼붓긴 했다만 후유증까지 온전히 치유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덕분에 아파 죽을똥 말똥 하는 몸을 이끌고 대전제 폐막식에 참가했다.

수많은 인파로 가득한 대전제 결투장.

어제까지 있었던 경기들로 인해 평평했던 경기장 흙바닥은 협곡 수준으로 갈라지고 난리가 나 있었다.

위셀란의 궁정 마법사들이라면 금방 원상복구시킬 테지만, 대체로 대전제 이후엔 일부러 망가진 경기장을 내버려두는 편이다.

그래야 결투의 신이 흡족해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난장판이 된 경기장 주위엔 이번 대전제의 우승자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들로 가득했다.

경기장 안팎을 가득 메운 인파를 위해서인지 사절단이 위치해 있던 관중석엔 높다란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 저기서 우승자에게 우승 상품과 수여식이 진행되는 듯했다.

“경축 드립니다. 백작님.”

“어으윽…….”

함께 자리한 프리아나가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쁜 듯 말을 걸어왔다.

간신히 서 있는 데만 신경 쓰느라 대답도 못 할 판국인데.

녀석은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고로 대전제란 젊은 기사들에게 있어선 최고로 영광스런 자리다.

그런 자릴 다시 마주하는 거니 프리아나가 가슴 벅차하는 건 당연했다.

“후후. 전 우승자와 현 우승자라. 아이소테르에 밝은 미래를 기대해도 되겠군요.”

우리 일행 옆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소테르의 사절단으로 온 이글렌 공주였다.

방금까지 폐막식 예행연습에 한창이다 이제 끝났는지 조금 시간이 비는 듯했다.

“공주님!”

“긴장 풀어요. 프리아나. 이번 폐막식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니까요.”

“으음…….”

이글렌은 어색해하는 프리아나에게 싱긋 미소 짓곤 고갤 돌렸다.

“우승 축하해요. 이안 백작.”

그러면서 내게 대뜸 축하 인사를 건넸다.

평소라면 적당히 맞장구 쳐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온몸의 근육이 불로 지진 듯 아파 죽겠는데 예의니 뭐니 따질 게 뭐가 있나.

솔직히 그냥 좀 저리 갔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으으…….”

“아 참! 내 정신 좀 봐. 결승전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그런 분을 귀찮게 해선 안 될 일이죠.”

‘알면 좀 가라.’

“어으으…….”

“그럼. 이따 뵙죠.”

“으…….”

대충 고개 한 번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글렌도 그리 꽉 막힌 녀석은 아닌지라 적당히 그러려니 하고 물러갔다.

‘하. 귀찮아.’

에런골드나 갈렌 왕자랑 사이가 어떻건 간에 난 아이소테르 소속이다.

그러니 우승 상품과 수여식은 아이소테르에서 사절단으로 내려온 이글렌이 직접 진행한다.

대충 후딱 진행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중띤 동네 투기장도 아니고 대전제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지.

“그나저나 백작님.”

“…….”

대답 대신 프리아나를 흘긋 쳐다봤다.

녀석도 대충 알아들었는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만……. 한 가지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뭇 진지한 녀석의 말투에 괜히 가슴이 찔려 왔다.

어제 대회에서 난 금지된 약물을 쓴 수준이 아니다.

엮이는 것만으로 극형에 처해도 아무 말할 수 없는 게 바로 영겁의 기사단.

난 그런 놈들이 쓰던 영약, 우로보로스의 눈물을 몰래 복용했다.

심지어 그 영약 때문에 위셀란이 함락당했는데도.

양심상 못 할 짓이긴 했다.

“…뭐, 뭐지?”

힘겹게 입을 열자 프리아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힘드실 텐데 고개만 끄덕이셔도 됩니다.”

“으응…….”

그리곤 녀석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내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어제 상대하셨던 셸랑 데카드. 그자가 설마 제가 예상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까?”

“…….”

난 녀석의 질문에 고갤 끄덕였다.

쾌검의 기사 크로드.

프리아나라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녀석과 검을 섞어 봤기에 녀석이 쓰는 기술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역시……! 그럼 백작님께선 벌써 그런 녀석과 맞붙으실 정도로 강해지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그냥… 거래를 좀 했다.”

“오… 그런 자와 거래라니……. 대체 어떤 거래를……?”

“나중에… 알려 주마…….”

“…아! 죄송합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터라. 그럼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다행히 우로보로스의 눈물에 대해서까진 잘 모르는 듯했다.

나중에 적당히 둘러대면 될 듯싶다.

이기고 싶은 간절함이 날 강하게 했다든가…….

아마 프리아나면 믿을 거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고.

“어윽…….”

고작 몇 마디 한 걸로 폐가 찢어질 것 같다.

크로드가 괜히 독이라 한 게 아니었나.

[…이어서 대전제 폐막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또 누가 말 걸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폐막식이 시작됐다.

개회식 때처럼 자질구레한 식이 이어지는 동안 내 몸에 짬짬이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그렇게 폐막식이 중간 정도 진행되자 꼼짝 못하던 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후……. 이제 좀 살겠네.”

“백작님! 여기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군요.”

뒤늦게 폐막식에 이슬린과 이스바르트도 자리했다.

이제 말도 잘 나오겠다 이슬린에게 물었다.

“혹시 에이먼……. 아니, 아버지한테는 연락했나?”

“아, 그게… 기사단의 성지에 사람이 너무 몰려서 그런지 통신용 마법구가 먹통이더군요.”

“흠, 그렇단 말이지.”

이상할 건 없다.

지난번 연락했을 때도 거리 때문인지 통신 끝자락에 노이즈가 꼈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똥 싸고 안 닦은 것마냥 찜찜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만. 우승 소식 알려서 나쁠 건 없으니 계속 연락해 봐.”

“네, 백작님.”

“저기… 백작님?”

“뭐지? 이스바르트.”

이슬린과의 대화에 이스바르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지만… 말씀 중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이상한 점?”

“그게… 실은 엔델로 광산을 비우는 게 마음에 걸려 통신용 마법구로 매일 아침마다 보고를 받고 있었어요.”

“음. 그래.”

과연 이스바르트답다고 해야 하나. 머나먼 위셀란까지 왔는데도 일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니.

“…잠깐. 매일 아침?”

“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문제없이 엔델로 광산에 사람들이랑 연락을 했는데…….”

“…잡음 같은 건 없었나?”

“거리가 좀 있어서 잡음은 있었지만 연락이 아예 안 되진 않았어요.”

“이런.”

엔델로 광산.

베네르 백작의 수중에 있던 영토였지만 녀석의 영지를 고스란히 빨아먹은 뒤론 줄곧 내게 쏠쏠한 수익을 가져다주던 사업장이다.

여기서 문제는 엔델로 광산이나 임페라 백작령이나 기사단의 성지까지 거리는 거기서 거기라는 건데.

엔델로 광산 쪽과 문제없이 통신을 했다면, 임페라 백작령도 그래야 할 터.

그렇다는 건…….

“임페라 백작령에 무슨 일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지금 당장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눈치 빠른 이슬린이 얼른 자리를 떴다.

그녀의 정보력이라면 알아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문제는 이게 괜한 기우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건데.’

기우라면 문제없겠지만 반대의 경우엔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둬야 한다.

어쩌면 에이먼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이번 대전제의 우승자! 이안 임페라 백작입니다!]

“와아아아아!”

“칫.”

하필이면 이런 때에 문제가 생기다니.

‘재수가 없으려니 원…….’

“괜찮으시겠습니까?”

“별수 있나. 무슨 일인지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렇긴 하죠.”

일단은 잠자코 단상 위로 올라갔다.

프리아나가 부축해주려 일어섰지만 고갤 가로저었다.

이 자린 명예로운 자리다.

시골 촌뜨기 망나니 공자가 어엿한 백작으로 거듭나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남에게 부축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아잇. X팔. 뭔 놈의 계단이 이리 많아.’

회복 마법을 퍼부은 탓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 악물고 참았다.

“오오……!”

“걸음걸이 하나하나부터 저토록 진중할 줄이야!”

“아무래도 그가 가진 소문들은 그저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그저 힘들어서 천천히 올라가는 중이었지만 관중들에겐 조금 다르게 보였나 보다.

마침내 단상 끝에 올라서자 미리 올라와 있던 이글렌 공주가 보였다.

“축하합니다. 아이소테르의 가신, 이안 임페라 백작.”

“감사합니다.”

“후후.”

이글렌은 싱긋 미소 지으며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팬던트를 목에 걸어줬다.

금빛으로 반짝이는게 꽤나 비싸 보였다.

‘진짜 우승 상품에 비하면 헐값이나 다름 없지만.’

이어서 푹신한 쿠션 위에 올려진 작은 상자가 이글렌 공주의 손에 들렸다.

달칵.

걸쇠를 풀어내자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큼지막한 마핵이 빛을 내뿜었다.

저게 바로 레서 드래곤의 마핵.

“연합의 이름으로 위대한 기사의 승리를 축복합니다.”

난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우승 상품을 받아 들었다.

“이안! 이안! 이안!”

단상 아래로 내다보이는 대전제 경기장.

거기엔 경기장 안팎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이안 임페라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이안! 이안! 이안!”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만세!”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는지 원.

‘그나저나. 에이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십중팔구 갈렌 왕자가 꼬장 부리고 있는 걸 텐데.’

관중들의 환호에 기분 좋으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를 알아챘는지 이글렌이 작게 귓가에 속삭였다.

“영광스런 자리일 텐데. 왠지 모르게 근심 있어 보이는군요.”

“으음…….”

이글렌 공주는 마냥 기뻐 보이지만은 않은 내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난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이글렌 공주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같은 핏줄인데도 오빠랑 동생 성격 차이가 이 정도라니.

“왜, 왜 그러시죠? 제 얼굴에 뭐라도 뭍었…….”

“음. 별거 아닙니다.”

“흐흠…….”

이글렌은 볼을 붉힌 채 얼굴을 살살 털어 냈다.

뭐 어쩌겠나.

이제 난 왕국 연합에게서 인정받은 기사다.

아무리 갈렌 왕자라도 대전제 우승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