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영겁의 기사단.
과거 대륙을 집어삼킬 뻔한 제국이 가진 최강의 전력.
그들을 되돌리기 위해선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바로 나.
그것도 죽은 영겁의 기사단이 가졌던 ‘우로보로스의 눈물’을 써 가면서.
셸랑 데카드, 아니 크로드의 입장에선 다분히 화가 날 법한 상황이다.
“혀를 통째로 뽑아 주지.”
“크흐흐! 아직도 그 얘기야?”
그런데도 녀석은 용캐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랑 한 약속 때문인지 혀를 뽑아 내겠다니 뭐니 하고 있는걸 보면, 대단한 녀석인 건 맞지 싶다.
‘기사는 기사라니까.’
소설 속 최악의 악역이었던 건 맞지만,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그래서 더 정감 가는 놈이다.
저 녀석 입장에선 어떨지 모르겠다만.
“흥!”
쿵!
별안간 녀석이 크게 발을 한 번 굴렀다.
작은 울림과 함께 그 주위로 붉은 파장이 퍼져 나갔다.
지난번에도 한 번 경험해 본 바 있는 기술.
적의 체내에 이질적인 오러를 주입시켜 몸을 속박시킨다.
콰드득!
“으윽!”
아니나 다를까, 피할 틈도 없이 온몸이 얼어붙은 것마냥 옥죄여 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단단히 막힌 건 입.
‘이 새끼가…….’
빠아악!
동시에 놈의 권격이 턱주가릴 후려쳤다.
바위에 채인 것마냥 묵힌 건 타격이 머릴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무차별적인 난타.
몸뚱이가 뒤로 날아가기도 전에 반대쪽 주먹이 복부와 격돌했다.
퍼억! 퍽!
“와아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얻어터지는 상황이었지만 관중들은 그저 즐거웠다.
하기사 언제 보겠나.
랭크 6 수준의 기사가 상대를 후두려 패는 상황을.
단순히 주먹으로 두들기는데도 북 터지는 듯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퍼억!
가슴팍이 우묵해질 강한 발길질 한 방을 마지막으로 녀석의 공격이 멈췄다.
왈칵!
“그으윽…….”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붉은 피를 한 움큼 게워 냈다.
머리가 어질어질 할 정도로 아프긴 했지만, 한편으론 흥분됐다.
다른 놈도 아니고 크로드한테 이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살아 있다니.
“기권해라.”
“흐흐……. 기권? 왜?”
“…….”
왜냐는 물음에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본 실력을 발휘해 날 이긴다면 문제가 커지니까.
그래서 레니 베나트도 어디론가 보내 버린 거다. 죽인 건지 어떻게 한 건진 아직 모르겠다만.
지금 녀석에겐 과한 이목은 독이다.
본 실력을 발휘해 우승했다간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었다.
쿠드득……!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동시에 부러진 온몸의 뼈가 제자릴 맞추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우로보로스의 눈물.
대륙 전역을 기사단 하나로 집어삼키려는 걸 가능하게 한 고대인의 영약.
정체불명의 약빨로 꾸득꾸득 일어나는 캐릭터라.
이건 뭐 영락없는 삼류 악역이다.
“딱 죽기 직전까지만 제대로 붙어 보자고. 죽긴 싫으니까.”
“…그 말 후회하게 해 주마.”
쿵!
다시금 크로드가 발을 굴렀다.
동시에 주위로 퍼져 나가는 붉은 선과 같은 파장.
아깐 피할 새도 없었지만 방금 깨달았다.
이건 못 피한다. 시전과 동시에 주변 영역에 자신의 오러를 펼치는 거니까.
대기를 일순간에 물로 바꿔 버린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그런 거면 낫다. 숨이야 참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몸 안팎을 물 흐르듯 순환하는 마나를 막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흡!”
단전에 요동치는 마나을 강하게 끌어올렸다.
…팡!
온몸의 힘줄이 불룩 솟아오르며 얼음 깨뜨리듯 속박을 부숴 냈다.
덕분에 사지에 자유를 되찾긴 했다만 체내에 부담이 상당했다.
“호오.”
그 모습을 크로드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누군 죽을똥 말똥 하는데 거 참.
“어디까지 버티는지 한 번 보고 싶어지는군.”
“그래?”
“그럼.”
콰악!
적당히 줘 패는 걸론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녀석은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주먹이야 살살 맞으면 죽진 않겠지만 검은 다르다.
까딱했다간 그대로 몸이 두 동강 나 죽어 버릴 테니까.
어쩌면 녀석의 검에 두 동강만 나는 거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진 고기마냥 잘게 부스러질 수도 있으니.
…파앙!
흙바닥을 쥐어 짜내는 듯 녀석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도달한 녀석의 검이 사방에서 쇄도했다.
쾅! 콰쾅!
녀석과 내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귀가 먹먹해질 듯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손이 저릿거리고 가슴을 쥐어 짜내는 듯한 통증이 이어졌다.
서걱! 서걱!
파공성이 터져 나갈 때마다 생채기가 쌓여 갔다.
붉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영약의 힘으로 벌어진 상처 틈이 빠르게 메워졌다.
“후후.”
크로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드리웠다.
뒤이어 녀석의 주위로 퍼져 나가는 붉은 파장.
또다시 느껴지는 이질적인 오러에 단전이 뒤틀렸다.
그럼에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이 느껴질 때마다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내 간신히 검을 받아 냈다.
그럴수록 몸에 부담은 쌓여만 갔다.
나야 우로보로스의 눈물로 금방 회복됐지만, 문제는 내가 아닌 무기 쪽에 있었다.
까득!
결국 견디다 못한 용린검에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검이 부러지고 만다.
하는 수 없이 놈과 거리를 벌리려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다행히 놈도 무시할 만한 공격은 아니었는지 일 합을 받아 내곤 뒤로 물러났다.
“대단해.”
좀처럼 녀석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매번 차갑게 굳어 있던 녀석의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 참 고맙네.”
“하지만.”
크로드는 다시금 차디찬 눈빛을 내보였다.
이제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쿠구구구……!
녀석의 우악스런 양손이 검을 붙잡았다.
그 주위로 매섭게 소용돌이치는 붉은 오러.
저 자세는 예전에도 봤다.
일순간 산도 부숴 버릴 거대한 힘.
지금 들고 있는 검도 자그마한 검은 아니다.
기사들이 쓸 법한 평범한 장검.
하지만 파산검을 봐서 그런지 얇디얇은 세검처럼 느껴졌다.
‘힘은 비슷하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다.
쿠구구구……!
놈의 오러에 응하듯 이쪽도 오러를 끌어모았다.
잠시 여유가 생긴 덕에 몸 곳곳에 나 있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었다.
‘이거 경기 끝나면 며칠은 앓아눕겠구만.’
우로보로스의 눈물의 지속시간은 대략 10분.
이제 곧 있으면 끝난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자, 녀석의 검이 움직였다.
“죽어라.”
예전의 나였더라면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순간 크로드 녀석과 검을 섞었던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그건 죽기 전에나 떠오르는 거라 하니.
‘아직 죽긴 이르지.’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다.
지난 죽음처럼 허무하게 죽을 생각 따윈 없다.
막혀 있던 둑을 허물듯, 용린검에 내재되어 있던 오러를 폭발시켰다.
머릴 향해 내려치는 붉은 폭포.
거센 혈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한줄기 푸른빛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또 그 장난질인가?”
크로드는 이미 한 번 경험한 ‘개화’에 코웃음 쳤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그때완 비교도 안 될 거다.
편법으로나마 그때완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으니까.
“이번에도 손으로 막나 한번 보자고.”
“……?”
일순간 녀석의 미간이 요동쳤다.
푸른 오러가 터져 나오는 찰나의 순간,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될 거센 힘을 느낀 거다.
“이 자식이……!”
놈의 두 어깨가 불룩 부풀어 올랐다.
프리아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사들과 검을 섞어 가며 모아 온 힘.
거기엔 지금 상대하고 있는 크로드의 힘도 포함되어 있었다.
검술 랭크 5를 넘어선 강력한 한 방.
“한 번… 해 보자고……!”
콰과과과……!
두 오러의 격돌에 경기장이 요동쳤다.
산조차 부순다는 크로드의 일격.
거기에 용린검이 가진 극한의 한계치까지 끌어모은 개화가 서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마나 제한 수치를 초과했습니다. 방어 결계가 작동합니다.]
바아앙!
이만한 힘의 격돌이면 주변 파장만 해도 어마 무시해진다.
애먼 관중이야 다쳐도 어쩔 수 없다지만, 괜히 사절단이 휘말리기라도 했다간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쳐진 결계가 두 힘의 격돌을 상쇄시키기 위해 펼쳐졌다.
츠츠츠……!
섬광으로 가득했던 경기장의 빛이 차츰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허억……! 허억……!”
간신히 방금 격돌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채 서 있을 수 있었다.
츠츠…….
온몸이 피로 칠갑한 수준이다.
아마 영약이 없었다면 과다출혈로 기절하고도 남았을 정도다.
‘…영약 효과도 이제 끝이군.’
방금까지 아물던 상처가 이제 더 이상 치유되지 않았다.
거기에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가슴 근육이 찢어질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이게 우로보로스의 눈물이 가진 부작용.
단시간에 어마 무시한 힘을 갖게 해 주지만, 그만큼 후유증도 엄청났다.
‘그 힘은 독이다.’
“크흐흐! 독은 독이네. 더럽게 아픈 걸 보면.”
빠직!
개화를 끝마친 용린검에서 이 나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여기서 더 싸우면 용린검의 이름마냥 비늘 모양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 거다.
“여기서 끝나는 거면 좋으련만.”
부들거리는 고갤 간신히 치켜들었다.
그리고 내 시선의 끝엔, 멀쩡히 서 있는 검은 흑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젠장.”
역시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그걸’ 썼다 해도 그 짧은 시간 만에 이 정도까지 성장하다니……. 그분께서 흥미롭게 보고 계시는 이유가 있었군.”
“성장이라.”
말은 뭐 크로드 녀석이랑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처럼 말하는데.
멀쩡히 서 있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
역시 고작 1년 만에 저 녀석 정도로 성장하는 건 무리였나.
“그럼…….”
크로드는 검을 쥔 채로 내게 다가왔다.
아무런 살의도 없이 그저 승부를 끝내기 위한 무심한 발걸음.
반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희소식 하나가 있었다.
“저, 저자는 대체 누굽니까?”
별안간 소란스러워진 관중석. 정확히는 사절단들이 위치한 관중석이었다.
“방금까지 싸웠던 출전자 생김새랑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이런.”
크로드는 그제야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정중앙에 흠집이 크게 난 걸 보니 아무리 고대인의 유물이라 해도 제 역할을 기대하긴 글러 보였다.
“어이.”
“…….”
“내가 방금 괜찮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는데 말이야. 한 번 들어 볼래?”
“…….”
크로드의 미간이 다시금 요동쳤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녀석도 급한 건 마찬가지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수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건 둘째치고, 지금 저 얼굴론 그 잘난 우승 상품 받는 것도 어려울 테니까.
난 녀석에게 경기장의 둘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어때? 물론 이건 저번에 약속한 ‘도와주는 거’랑은 별개의 일이야.”
“그런 개 같은……!”
“싫음 관두고.”
“으윽…….”
크로드의 목에 핏줄이 불룩 솟았다.
하지만 지금 녀석의 입장에선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약속을 지킬 거란 보장은?”
“언제나 그랬듯 내 목숨이지.”
“…….”
크로드는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껏 잘 숨어 있던 심판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조심스레 나타났다.
“데, 데카드 선수? 무슨 일이라도…….”
챙강!
순간 크로드, 셸랑 데카드가 들고 있던 검이 산산조각 났다.
다른 이들은 못 봤겠지만 난 봤다. 녀석이 검지 손가락을 퉁겨 제 검을 부러뜨리는 걸.
“검이 부러졌다. 내 패배군.”
“예? 하, 하지만 검은 새로 마련해 드릴 수…….”
“기권이다.”
“기, 기권이요?”
크로드는 그렇게 짧게 대답하곤 뒤돌아섰다.
워낙 당당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에 심판도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기, 기권입니다! 셸랑 데카드 선수의 기권! 따라서 승자는 이안 임페라! 이안 임페라 백작입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대전제의 끝을 알리는 심판의 판결과 함께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