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6화 (86/222)

86화

“와아아아!”

확실히 결승답다.

환호성 크기부터가 남다른 걸 보면.

[드디어 대전제의 마지막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과연 승리의 신께선 누굴 향해 미소를 지어 주실까요?]

[제가 봤을 땐 이안 백작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을까 싶군요. 싸움이란 이 기세가 중요한 거거든요. 기세하니 또 제가 기사단에 속했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그때…….]

아무래도 결승이다 보니 따로 기사단 출신의 해설자까지 따로 준비 되어 있었다.

혼자 주절주절 뭐라 떠드는 건가 싶긴 하지만, 경기에 해설이 빠지면 섭하니까.

“백작님, 꼭 몸 조심하셔야 합니다.”

프리아나는 붉게 충혈 된 두 눈으로 날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샜는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가 없다.

차기 기사단장쯤 될 놈이면 그런 건가.

“흐흐. 괜찮아. 죽기야 하겠어?”

“으음……. 보통 죽기 전에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만… 백작님께서 하니 뭔가 달리 들리긴 하는군요.”

“푸흐흐.”

너스레를 떨자 프리아나도 걱정이 좀 가신 듯 표정이 풀렸다.

“백작님…….”

이스바르트는 여전히 걱정되는 눈치다.

“…….”

그에 반해 이슬린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고.

“넌 걱정 안 되냐?”

“걱정보단 믿음이죠.”

“믿음?”

“백작님이면 무사하실 거라는 믿음.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요.”

어느새 언변에 꿀을 발랐는지.

아첨 같지만 그래도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흐흐. 승리할 거란 믿음이 아니라 무사할 거란 믿음이구만.”

“그건 아직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 그럼. 갔다 오마.”

일행들을 한 번 슥 훑어보곤 경기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 임페라 백작이 먼저 등장합니다!]

“와아아아아!”

내 등장에 관중석에서 폭발하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새삼스레 내 인기가 체감될 정도다.

“후후. 좋구만.”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난 인기 요소가 많았다.

곱상한 외모에 준수한 실력.

거기에 과거 개망나니였다는 이력도 한몫했다.

개망나니가 개과천선했다는 스토리는 어디에서나 먹히니까.

[아! 이안 임페라 백작의 상대! 셸랑 데카드도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셸랑 데카드 기사. 이 기사도 절대 무시하면 안 되는 기사입니다. 멘디스 위즈덤을 가볍게 제압했을 당시만 해도…….]

“와, 와아아…….”

내가 등장했을 때와는 달리 데카드의 등장엔 반응이 묘했다.

그도 그럴게 지금껏 대전제를 봐 온 사람이라면 알 거다.

그에게선 묘한 기시감이 흐른다는 걸.

‘아마 이번 대전제를 관리하는 위셀란에서도 알고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사절단들이 위치한 객석 쪽이 웅성거렸다.

저들 모두 생각하는 게 다를 거다.

누군가는 데카드를 재야에서 등장한 영입 1순위 인재쯤으로. 누군가는 혹시 모를 연합의 적으로.

하지만 난 안다.

이 녀석이 뭐하는 놈인지.

“경기 시작에 앞서 다시 한번 규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심판은 매 경기마다 룰에 대해 설명해 줬다.

몇 번 듣지도 않은 나도 상당히 지겨운데, 본인은 얼마나 지겨울까.

“가지고 계신 영약이나 아티팩트는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아, 영약은 아니고. 차를 조금 담아 왔는데 괜찮나?”

“차요?”

“여기.”

그러면서 영겁의 기사단 품에서 얻은 영약을 보여 줬다.

이를 본 심판이 고갤 갸웃했다.

차라면 보통 큰 병에 담아 올 법한데, 코딱지만 한 유리병에 담아 왔으니 이상하게 보일 법했다.

“승리의 부적 같은 거지. 경기 전에 한 모금 마시면 긴장이 풀리더라구.”

“으음. 차라면 뭐. 한 번 맛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별로 없으니 조금만 마시라구.”

난 영약 병을 따 심판의 손등에 한 방울 뿌려 줬다.

살짝 께름칙해하던 심판은 어깰 으쓱하곤 이를 핥아 먹었다.

“음……. 향이 독특하군요.”

“흐흐. 그렇지?”

심판은 눈살을 한 번 찌푸리는 것 말고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이 영약은 단전이 있는 사람한테만 먹힌다.

단전이 없으면 그냥 조금 씁쓸한 물일 뿐이다.

‘묵은 지 18년이나 됐지만.’

대전쟁 때 나온 영약이니 유통기한은 좀 넘었지 싶다.

“…….”

영약을 흘긋 본 데카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왜. 너도 한입 줘?”

“필요 없다.”

“흐흐. 그래, 그럼.”

우리의 신경전을 보던 심판이 이번엔 셸랑 데카드를 체크했다.

“셸랑 데카드 기사.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는 더 이상 없습니까?”

“그렇다.”

“그럼 가볍게 확인만 좀 하겠습니다.”

심판은 둥그런 원판 같은 아티팩트를 가져와 나와 데카드의 몸 주위를 훑었다.

삐빅.

“음?”

내 몸을 훑던 아티팩트가 허리춤에서 반응을 보였다.

“뭔가 가지고 계신 게 있습니까?”

“…아!”

깜빡하고 통신용 마법구가 있는 걸 말 안 했다.

“깜빡했구만.”

“…규정상 경고에 해당합니다. 다른 게 있으면 또 말씀해 주시죠.”

“미안, 미안.”

“그럼…….”

심판은 통신용 마법구를 다시 받아 가려 했다.

“아, 미안하지만 꼭 연락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말이야.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될까?”

“파손 시 저희 쪽에선 배상해 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내 건 내가 잘 간수해야지.”

“알겠습니다. 백작님.”

다시 통신용 마법구를 허리춤에 고이 모셔 뒀다.

다음은 데카드다.

데카드의 몸 주위를 훑던 그때.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 반짝거리던 그거다.

“…아티팩트는 따로 감지되지 않는군요. 협조해 주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지.’

녀석의 목에 걸린 목걸이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단순한 장식용 목걸이면 저렇게 된다. 딱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럼. 두 분 모두 무사하시길 빕니다.”

데엥~!

심판이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결승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이안! 이안! 이안!”

확실히 상대보단 내게 이목이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럼 그만큼 보답해 줘야겠지?”

아까 심판에게서 허락 받은 영약을 다시 꺼내 들었다.

데카드는 이를 보고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건…….”

“흐흐! 아까 말했듯이 그냥 차야.”

뿌득!

데카드의 이 가는 소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내게도 들려왔다.

“그 힘은 독이다.”

“독이야 쓰기에 따라 약도 되고 그런 거지.”

“…….”

“아. 그건 그렇고.”

아까 넣어 뒀던 통신용 마법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마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웅.

짧게 울리는 진동음.

이는 나한테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우웅.

소리가 나는 건 셸랑 데카드.

나와 마주선 기사 녀석이었다.

“오랜만이야? 크로드.”

“…X팔.”

셸랑 데카드, 아니 크로드가 짧게 욕짓거릴 내뱉었다.

“흐흐! 그럴 것 같았다니까.”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크로드였다.

하기사 처음부터 이상했다.

붉게 물든 오러가 흔한 것도 아니고.

크로드 씩이나 되는 강자가 어디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이번 대전제의 우승 상품으로 걸린 ‘레서 드래곤의 마핵’.

그건 진짜 드래곤 하트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재료다.

하지만 레서 드래곤도 어쨋건 드래곤의 아종.

녀석들이 꿈꾸는 기사단의 유물 복원 계획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 대전제에 잠입한 거다.

어려울 건 없다.

고대인의 유물을 쓰는 영겁의 기사단이라면, 대전제 관리관들의 눈을 피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니까.

외모쯤이야 고대인의 유물로 바꾸는 건 일도 아니고.

방금 저 녀석의 품 안에 있던 통신용 마법구는 탐지되지도 않았다.

얼굴을 바꿀 때 쓴 고대인의 유물마냥, 몸에 숨긴 아티팩트들의 감지를 피할 고대인의 유물도 있었던 거겠지.

‘그래. 셸랑 데카드.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더라니만.’

이제야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크로드가 왕국 연합에 잠입할 당시, 그가 잠시 쓰고 있던 가명 중에 하나가 데카드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가명을 써서 기억이 안 나긴 했지만, 이제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모르겠네.”

“이 망할 풋내기 자식이……!”

크로드는 내가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예상이라도 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크로드 입장에서 이번 대전제의 상품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내겐 단 한 번 찬스가 있다.

크로드 찬스.

그걸 여기서 쓰면 끝이다.

‘져 달라고 한 번 말만 하면 말이지.’

그래서 어젯밤 내게 찾아온 거다.

정체를 숨긴 채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기권이나 하라고.

미안하지만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면 나도 못 참는다.

“…그래서. 지금 원하는 게 그건가? 이번 대전제에서 져 달라는 거?”

“음…….”

그래도 되긴 하지만 살짝 아쉽다.

영겁의 기사단이 가지고 있던 영약.

거기에 지금 내 랭크라면……?

“흐흐.”

스릉!

져 달라는 말 대신 허리춤의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어제까지 잔뜩 충전해 놓은 덕에 용린검은 벌써부터 폭발을 원하는 폭탄마냥 뜨끈거렸다.

“일단 한 번 해보고?”

“…하!”

크로드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치곤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파산검은 아니란 게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점이었다.

“봐 달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혀를 뽑아 주마.”

“크흐흐! 한 번 해 봐야겠네! 내가 혀가 더 빠를지, 아니면 네 칼이 더 빠를지.”

크로드의 장검에서 붉은 오러가 터져 나왔다.

산조차도 날려 버리는 파산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비하면 살짝 덜하긴 했다.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

자주 쓰는 검이 아님에도 녀석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레니 베나트도 그렇게 죽인 건가?”

“내가 거기에 대답할 이유라도 있나?”

“뭐, 없긴 하지.”

벌컥!

난 그대로 한 걸음 물러서 영약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넣었다.

첫 한 방울은 그저 씁쓸한 차 한 모금 맛이었다.

하지만 영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용암을 삼키듯 목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는 전신으로 퍼져 온몸이 폭발하듯 끓어올랐다.

“크흐흐! 이거 죽이는데!”

“흥! 그래 봤자 본체가 바뀌는 건 아니지.”

“본체? 으흐흐! 그렇긴 하지!”

온몸이 붉게 타오르는 건 단순히 기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양팔의 힘줄이 붉게 솟아오르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게 바로 위셀란을 하루아침에 함락시킨 힘.

우로보로스의 눈물.

위셀란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당시에도 위셀란 근위 기사단장의 랭크는 7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영겁의 기사단 앞에선 무력했다.

일순간 단전을 확장시켜 힘을 극대화시키는 힘!

콰아아아……!

용린검 주위로 푸른 오러가 용솟음치듯 터져 나왔다.

이제 곧 과부하가 걸린다.

아무리 하룬이 만든 검이라 해도 개화 직전 상태론 오래 못 버틸 테니까.

“후으읍!”

한 번 크게 호흡을 들이마신 채 터져 나오는 마나에 집중했다.

검술 랭크 5에 우로보로스의 눈물까지 합쳐진 힘.

과거 마신 아쉬타르를 상대할 당시엔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다.

하지만.

이젠 어렴풋이나마 예전 힘의 편린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콰아악!

용린검을 휘두르자 대기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묵직한 떨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에 질세라 크로드의 검도 이를 향해 쇄도했다.

붉은 파도와 푸른 파도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콰아앙!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결승전이 한창인 모래바닥이 진동했다.

부옇게 일어난 갈색빛 안개가 우리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와아아아!”

대전쟁 당시엔 꽤나 자주 나왔을 싸움이지만.

지금은 18년째 이어져 온 평화의 시대다.

대전제라 해도 랭크6 이상은 잘 나오지 않던 게 그간의 관례.

흔히 볼 수 없는 싸움에 관중들의 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건 서로의 경지를 가늠하기 위한 일 합.

아직은 개화를 쓸 단계가 아니다.

꾸드득……!

용린검이 괴로운 듯 요란한 소릴 내뱉었다.

“좀만 더 버텨 봐라.”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검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멎어 들었다.

“…하!”

크로드는 첫 합이 오가고 나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씩 웃기만 했는데도 왜인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왔다.

“적당히 봐줄 필요는 없다 이 소리군.”

거기에 말까지 더해지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깝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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