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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5화 (85/222)

85화

준결승전 다음 날.

앞으로 사흘 후면 결승전이다.

“흠.”

예상했던 대로 레니 베나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셸랑 데카드는 부전승.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녀석과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니, 제로에 가까웠다.

1차전까지만 해도 검술 랭크 5인 녀석과도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겨우 이겼으니까.

그런 녀석이 이번 대전제의 우승 후보, 레니 베나트를 이긴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레니 베나트. 그자는 어떻게 된 걸까요?”

프리아나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술 랭크 6이면 준 기사단장급이다.

그만하면 쉬이 습격당하는 것도 힘들 터.

그런 자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그저 실종됐다?

“일단 알아본 바론 위셀란 측에서도 계속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프로스트 랜드에선 뭐래?”

“프로스트 랜드 사절단도 모른다더군요.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십중팔구 무슨 일이 생긴 걸 거다.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제일 큰 문제가 하나 생긴다.

“누가 레니 베나트를 건드렸냐는 건데.”

정황상 가장 의심이 가는 건 레니 베나트가 상대하기로 했던 데카드 가문 출신의 기사.

정말로 그가 레니 베나트를 건드렸는 건, 적어도 그의 신변에 문제를 일으킬 만한 강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데카드 가문에 대해선 더 알아봤나?”

“네. 그게 좀 심각합니다.”

“흠……. 뭐가 나오긴 나왔나 보네.”

“확인해 본 바로는 위셀란 군도 외곽의 작은 섬을 영지로 하는 가문이더군요.”

“작은 섬이라.”

위셀란은 대륙에 위치한 영토와 수많은 군도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그렇다 보니 군도 끝자락엔 자그마한 섬 하날 영지로 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말이 귀족이지 사실상 동네 이장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영주 소집령에도 잘 응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셀란 측에서도 해로가 너무 험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구요.”

“그렇다는 건…….”

이슬린이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위장일 수 있다는 거죠.”

“하.”

어디 쓸 만한 인재가 새로 나타난 건가 했는데.

위장 가문이라는 건……?

“뒤가 구린 놈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군.”

“…네.”

“하이고…….”

이럼 새로운 인재 영입은 나가린데.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모든 일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 하는 법이다.

레니 베나트까지 제꼈으니 다음 상대는 하나밖에 안 남았다.

바로 나.

“오늘부터 밤을 세서라도 백작님을 지키겠습니다!”

프리아나가 주먹을 꽉 쥔 채 다짐했다.

녀석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다만서도.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될지 모르겠네.”

“아앗…….”

“상대는 레니 베나트를 아무런 낌새도 없이 보내 버린 녀석이다. 보통내기가 아닐 텐데. 가능하겠어?”

“…제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호위기사의 일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예?”

“죽으면 끝이야. 죽은 녀석을 기억해 준다니 뭐니 다 허울 좋은 개소리라고.”

“그럼…….”

“무조건 살길을 찾아야지. 정 안 되면 기권이라도 하든가.”

“으음…….”

“물론 정 안 되면 말이지.”

“…그렇다면?”

자릴 박차고 일어나 용린검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슬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내 방 주위로 방어 결계를 준비하도록.”

“네, 백작님.”

“이스바르트. 넌 기사단의 성지에 결계 술사가 더 있는지 확인해 봐라. 아무래도 대전제도 있고 하니 구경하러 온 결계 술사들도 꽤나 있겠지.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수준 높은 결계 술사를 불러라.”

“네! 백작님!”

둘에겐 이쯤 말하고 돌아서려다 혹시나 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결계술사와 계약하게 되면 한 가지 계약 사항을 추가해라. 외부의 침입이 한번이라도 발생했을 시 대금은 치룰 수 없다고.”

“헤헤.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좋아.”

“그럼 전…….”

프리아나는 자기한테 뭐 시킬 건 없나 은근히 바라는 눈치다.

“넌 검을 챙겨라.”

“검이요?”

“충전 좀 하러 가야지.”

“…아!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용린검에 새겨진 히든 스킬 하나.

‘개화.’

오러 소드를 맞부딪힐수록 힘이 강해지는 스킬.

그간 강화를 거듭한 덕에 용린검에 머금을 수 있는 양도 늘어났다.

‘거기에 이것까지 합하면.’

콰악.

품속에서 지난번 얻어 온 영약을 움켜쥐었다.

이 두 개가 같이 있다면 날 노리는 녀석쯤은 상대 할 수 있을 거다.

“가자고.”

“네!”

그때까진 일단 최대한 개화를 모아 둬야 한다.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그땐 기권해야지.’

내가 대전제에 참가한건 반드시 우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레서 드래곤의 마핵도 충분히 탐나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명성을 위해 온 것뿐.

이미 준우승까지 따 놓은 지금, 괜한 오기로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이왕 해 보긴 해 봐야지.”

개화의 완충까지는 아직 아슬아슬했다.

최적의 상대로 놈을 상대한다.

이를 위한 준비가 차츰 완성돼 가고 있었다.

* * *

“벌써 결승전이라는 건가?”

“네! 왕자님!”

“칫!”

갈렌은 혀를 차며 유리잔 가득 채워져 있던 와인을 홀짝였다.

“…퉷!”

레드 핀 와인.

임페라 백작령에서 얼마 전부터 새로 담가 파는 술이었다.

달짝지근한 맛에 도수도 낮아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유행이라던데.

맨날 고급진 술만 들고 살던 입이라 갈렌의 입맛엔 쓰레기 수준이었다.

“이딴 걸 술이라고 내어 오다니. 어이가 없구만. 안 그래?”

“죄, 죄송합니다! 왕자님!”

“크흐흐! 이래 가지곤 나중에 심문할 때 봐줄 수도 없겠어.”

“으윽…….”

에이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갈렌은 차기 국왕에 오를 왕자고 에이먼은 시골 영지의 백작이니까.

챙그랑!

갈렌은 신경질적으로 와인잔을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튀었지만 갈렌의 속은 좀체 진정되질 않았다.

‘그 망할 애송이 새끼. 이러다 진짜 대전제에서 우승하는 거 아니야?’

그랬다간 더 이상 갈렌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놈이 돼 버린다.

대전제는 왕국 연합 전원이 참석하는 대 축제니까.

그런 자리에서 우승한 녀석을 왕자랍시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노릇.

하지만 아직 모른다.

놈에게 시비를 걸 만한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계속해서 찾아! 놈이 ‘이단’이라는 증거를!”

“예! 왕자님!”

사흘 전.

갈렌은 불쑥 자기 휘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임페라 백작령을 쳐들어왔다.

정확히는 에이먼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시골짜기 영지.

갈렌 왕자가 이 머나먼 땅까지 올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전해진 서신 하나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에이먼 임페라의 저택으로 가라. 그곳에 이안 임페라를 몰락시킬 재료가 있을 것이다.]

출처도 불분명한 단 한 장의 편지.

왕자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처음엔 반신반의 했다.

‘대체 누가 그런 서신을 보낸 거지?’

하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이 움직였다.

철통같은 경비를 자랑하는 왕성에서 감쪽같이 서신 한 장만을 왕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으니까.

어쩌면 급부상한 이안 백작을 견제하고 싶은 다른 귀족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곳.

갈렌은 속는 척 그 편지를 믿기로 했다.

아니면 아닌 거고, 설령 맞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 큰 횡재는 없을 테니까.

‘크흐흐! 제대로 찾기만 한다면……. 이번에야 말로 아버지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옳았다는 걸 아버지에게 증명시키고야 말겠다.

그게 갈렌 왕자가 가진 생각이었다.

“하, 하오나……. 왕자 전하…….”

“뭐지? 설마 ‘이단 심문관’으로 온 내게 토라도 달겠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얌전히 입 닥치고 있으라구. 괜히 책잡힐 짓 하지 말고.”

“…….”

에이먼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앙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와, 왕자님! 찾았습니다!”

“응?”

드디어 기사 하나가 뭔갈 들고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엔 희고 고운 광택이 나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 * *

“으음…….”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용린검의 개화 직전까지 충전이 끝났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놨다.

그런데도 영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밤새 잠자릴 뒤척였다.

부욱. 부욱.

“어우 시끄러워.”

결승전 전날 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쓸 부엉이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게 들리는지.

“잠이 안 오십니까?”

방 문 앞에서 결계를 감시하던 이슬린이 고갤 빼꼼이 내밀었다.

“음……. 좀 그렇네.”

“그래도 주무셔야 합니다. 내일 있을 경기를 위해서라면.”

“걱정 마십시오! 백작님! 제가 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한! 그 누구도 백작님을 해할 순 없을 것입니다!”

프리아나의 호언장담에 헛웃음이 나왔다.

“니들은 안 자냐.”

“잠이야 죽으면 평생 잘 것 아닙니까! 이 프리아나 아르나가 반드시 목숨을 걸고…….”

“거 참. 목숨 거는 거 좋아하네.”

“후후.”

이스바르트는 전투 능력은 없어 그냥 자도록 내버려뒀다.

그래도 저 둘이 있으니 어이없이 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 그럼 시끄러우니까 문은 닫아 줘.”

“네! 백작님!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지시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그래. 그래.”

탁.

프리아나가 방문을 닫았다.

제법 견고해 보이는 문짝엔 침입을 알리는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채워져 있었다.

기사단의 성지로 놀러온 결계 술사한테 비싼 값을 치루고 설치한 결계였다.

그 외에도 설치한 건 많았다.

전격을 터뜨린다든지, 발을 얼려 버린다든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들어섰다간 그대로 가루가 돼 버릴 정도의 결계였다.

“그럼…….”

차분히 눈을 감고 잠에 들려 애썼다.

양이라도 세야 하나.

사실 한국 사람한테 양 세는 건 별 의미 없다던데.

시간이 조금 지나, 선잠에 들어간 순간.

…툭.

“응?”

별안간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소음.

분명 이 방에서 들리면 안 되는 이질적인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몸에 힘이랄 게 단 한 줌도 들어가질 않았으니까.

‘뭐, 뭐지?’

소릴 질러 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러다 칼로 푹 찔려서 죽는 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 할 때, 옆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기권해라.”

“으윽…….”

“기원하지 않으면 죽인다.”

‘누, 누구?’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주한 건 침대 옆에 서 있는 거대한 인영.

어두운 밤이었지만 눈이 익어 어렵사리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너, 너는…….”

“호오. 이 상황에서 목소리가 나오다니.”

꼿꼿하게 선 곧은 허리.

후줄근하지만 연륜이 묻어나는 가죽 갑옷.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셸랑 데카드. 본인이었다.

“크흐흐…….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시끄럽다. 얼른 기권하겠다 말해라. 그러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흐흐……. 그건 좀 별론데.”

여유 있는 척하면서도 주변 상황을 살폈다.

분명 결계에 룬 문양이 반짝이는 걸 보면 결계가 파훼된 건 아니다.

그렇다는 건…….

후웅…….

살짝 열어 둔 창문 틈새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하지만 검은 인영은 조금도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이 자식이? 사람을 호구 취급하네?

“…환영이구만. 밤에 유령 본다고 쫄 나이는 아니라서 말이야.”

“지금은 환영이겠지. 하지만 내일은 아닐 거다.”

“X이나 까잡숴. 결계 때문에 본체도 아니고 환영이나 보여 주는 주제에.”

“…….”

반짝.

잠시 말문이 막힌 녀석의 가슴팍이 반짝였다.

달빛에 비친 건 아닌 듯했다.

대체 뭘까 저건.

“…호오.”

순간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녀석에게서 느껴진 기시감들이 한꺼번에 퍼즐 맞춰지듯 들어맞기 시작했다.

“크흐흐! 그런 거였구만.”

“…뭐가 그렇다는 거지?”

“별건 아니야. 자세한 건 내일 알게 될 테니 걱정 말라구.”

“…….”

“그럼.”

탁!

간신히 움직이는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문 밖에 있던 이슬린과 프리아나가 벌컥 문을 열었다.

쾅!

“백작님!”

내 신호를 알아챈 그들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푸하!”

둘이 들어섬과 동시에 추욱 늘어져 있던 몸에 힘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환영도 사라졌다.

타다닷…….

창 밖에서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

아마 저 녀석이 환영을 보낸 작자일 거다.

결계 탓에 멀리서 마법을 쓸 순 없었던 모양이다.

“저, 저놈입니까? 내 이놈을 당장……!”

“됐다. 어차피 내일이면 볼 텐데.”

내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프리아나가 놀라 물었다.

“내일? 설마 셸랑 데카드 본인이었습니까?”

“아마도.”

내 대답에 프리아나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 더러운 놈이……! 기사란 이름을 달고 밤에 암습을 가하다니!”

“정확히는 가한 건 아니지. 그냥 인사 정도만 한 거니까.”

“으음…….”

“오늘은 이만 쉬자구. 저 녀석도 이쯤 했으면 들어가서 자야겠지.”

내 대답에 둘은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쩌겠는가.

피해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알겠습니다.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간밤에 불청객은 그렇게 물러났다.

더 이상 암습은 없겠지만, 프리아나는 밤새 불안한지 숙소 주변을 서성이며 날밤을 꼬박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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