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4화 (84/222)

84화

“하……. X팔.”

“죄, 죄송해요! 백작님! 차라리 제 목숨으로 화가 풀리신다면……!”

“너가 죽으면 어제 일이 없어지나?”

“아앗…….”

“앞으로 넌 술 금지다.”

“네에…….”

이래서 술을 잘 안 마신다는 거였나.

이스바르트가 한바탕 거하게 쏟아 낸 덕에 외출복 하날 못 쓰게 됐다.

일단은 위셀란에서 빨아 준다곤 했다만, 깨끗하게 빨릴진 모르겠다.

여벌로 가져온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외출복까진 여벌이 필요 없을 것 같았는데.

이슬린이 챙겨 준 덕에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닐 일은 없었다.

뭐 내일 경기라 어디 싸돌아다니긴 애매하지만.

“이제 남은 건 4명뿐이군요.”

침대에 누워 따분해하는 와중에 이슬린이 들어섰다.

역시나 그녀의 손엔 남은 출전자들에 대해 분석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어젯밤 이글렌 공주를 만난 덕분인지 예전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래. 차라리 웃는 게 싫으면 저게 낫지.’

이슬린이 일레느처럼 헤실거린다라.

그건 또 그것대로 이상할 것 같다.

“내일이 준결승전이고, 마지막 날 결승하고 끝. 맞지?”

“네.”

“음…….”

이슬린이 건넨 종이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공주와 이슬린이 무슨 얘길 나눴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남의 사생활을 엿듣는 게 좀 껄끄러웠다.

“이글렌 공주님과는 즐겁게 보내다 왔습니다.”

“아. 그래?”

먼저 묻긴 좀 그랬는데 마침 이슬린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더군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흥미로웠던 건…….”

“흥미로웠던 거?”

“공주님께서 백작님을 눈여겨보시더군요.”

“…뭐? 날?”

설마 반했나?

그럼 좀 곤란한데.

에런골드나 갈렌이 있는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니.

그런 끔찍한 짓은 절대 사양이다.

“네. 백작님 덕분에 갈렌 왕자님께 한 달간 ‘침묵의 금제’가 내려졌다며 좋아하시더군요.”

“뭐? 침묵의 금제? 크하핫! 그것 참 쌤통이네!”

침묵의 금제는 에런골드 앞에서 단 한마디도 못하게 입도 뻥끗 못하는 처벌이다.

소설에서도 몇 번 나왔다.

다른 신하들로 가득한 자리에서까지 말 한마디 못하고 삐질거리던 모습이.

“흐흐! 머저리 같은 놈. 아예 혀를 뽑아 버려야 돼, 그런 놈은.”

내 말에 이슬린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보아하니 갈렌 왕자 놈. 이슬린한테도 미운털 단단히 박혀 있는 거 같다.

무슨 일 있었나?

“…예상하셨다시피 공주님과는 같은 마탑에서 공부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갈렌 왕자도요.”

“호오.”

무슨 독심술이라도 있는지 이슬린은 술술 옛날이야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베로니아 방계 출신이긴 해도 운 좋게 적성에 맞았는지 마탑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마탑에서 마법 랭크 4까지 올리긴 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군.”

“…네.”

분명 멀쩡히 마탑에 다니는데 나올 이유는 없다.

아마 이글렌 공주와 친하다는 이유로 갈렌 왕자가 괴롭힌 거겠지. 그러다 괴롭힘을 못 버티고 나와 버린 거고.

“뭐 갈렌 그 새끼면 몰라도 이글렌 공주랑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얼굴이나 비추자고.”

“네. 백작님.”

“자. 그럼…….”

옛날이야긴 이쯤이면 됐고.

내일 있을 준결승부터 준비해야 했다.

-2차전 통과 인원-

[이안 임페라 - 아이소테르]

[가리온 - 위셀란]

[레니 베나트 - 프로스트 랜드]

[셸랑 데카드 - 위셀란]

“이 넷이군.”

이 중 준결승전에서 맞붙게 될 상대는 가리온.

이자에겐 성이 없다.

가문도 뭣도 없는 평민, 어쩌면 노예 출신일 경우 이렇게 이름만 덜렁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용병 출신이라고 했지?”

가리온은 위셀란 출신이긴 했지만, 정확히는 섬기는 귀족 하나 없는 용병이다.

대신 상위 랭크 보유자이다 보니 어중띤 용병은 아니다.

위셀란 근방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가리온 용병 클랜의 주인.

아마 대전제에서 활약하면 그만큼 몸값이 오를 테니 그걸 노리고 온 걸 거다.

태어난 곳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일단 주 영역이 위셀란이다 보니 소속만 여기로 둔 듯했다.

사용하는 무기는 중검과 단검.

일반적인 기사들과는 좀 달라 상대하기 귀찮은 녀석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녀석. 랭크 6은 아니란 거지.”

검술 랭크 6이란 소문이 좀 마음에 걸렸는데, 지난번 준결승에서 붙을 수도 있는 놈이라 눈여겨보면서 알았다.

이 가리온이란 자는 절대 랭크 6은 아니다.

그렇다는 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라는 거다.

‘진짜 잘하면 이기겠는데?’

가리온이 상대라면 준결승에서도 영약을 아낄 수 있다.

그렇다면 결승 때 약빨로 잘 비벼 보면 이길 수 있을지도…….

‘아니야. 괜한 기대 했다가 지면 상심이 큰 법이니까. 일단 진정부터 하자구.’

가리온은 이쯤이면 됐고.

다음은 저쪽 준결승에서 누가 이길지가 관건이었다.

‘누가 이길질 모르겠으니 원.’

강력한 우승 후보 레니 베나트.

랭크 6의 강자답게 경기도 본힘을 발휘하기보단 적당히 상대를 굴복 시키는 선에서 끝냈다.

문제는 셸랑 데카드다.

겨우겨우 1차전이나 이긴 줄 알았는데 2차전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를 꺾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레니 베나트가 이기겠지만…….

“쯧. 여기서 머리 싸매고 있는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계속 알아만 봐.”

“네. 백작님.”

“그럼 이쯤하고……. 프리아나!”

“네! 백작님!”

“심심하지?”

“흐흐흐! 당연하죠! 몸이 근질근질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럼 가볍게 몸이나 좀 풀자구.”

“네!”

* * *

“뭐야?”

준결승전 당일 아침.

별안간 일정이 변경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래라면 나와 가리온의 결투는 뒷순번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나와 가리온의 결투가 앞 순번으로 당겨졌다.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일정 변경을 알리러 온 관리관이 고갤 숙여 사죄를 올렸다.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관리관에게 뭐라 하긴 애매했다.

애초에 이건 관리관 잘못이 아니다.

“죄송하면 이유라도 좀 알려 주시지?”

“그게…….”

“설마 백작 나으리한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개만 숙인 걸로 넘어갈거라 생각한 건가?”

“아, 아닙니다! 다만…….”

“흥.”

관리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뭐 어차피 2경기밖에 없는 거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그게 그거지만…….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지.

“실은……. 레니 베나트 기사님이 사라졌습니다.”

“뭐?”

레니 베나트가 사라져? 대체 왜?

“오늘 새벽부터 갑자기 보이질 않고 계십니다. 그러다 보니 이게……. 일단 뒷순번으로 미루고 대처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 그렇다는 건 어쩌면 이대로 쭉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군.”

“…예.”

“흠……. 일단 알았다.”

“네. 백작 각하. 다시 한 번 거듭 사죄를…….”

“알았으니까 돌아가 봐.”

“네…….”

관리관은 착잡한 얼굴로 고갤 푹 숙인 채 돌아갔다.

“흠…….”

일단은 알겠다 했지만. 이건 꽤나 심각한 사안이다.

출전자가 사전 예고도 없이.

대전제 일정이 한창인 와중에 사라졌다? 그것도 사실상 가장 강한 우승 후보가?

어쩌면 급한 일이 있어 본국으로 되돌아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언질은 있었을 텐데.

‘게다가 지금 시점의 프로스트 랜드라면……. 레샤 드래곤의 마핵이 분명 필요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면 2차전이 끝나고 기분 전환 겸 술 한잔했다가 못 일어나는 걸…….

“그럴 리는 없겠지.”

“으음……. 어쩌실 겁니까? 백작님?”

“…뭐 어쩌겠어. 일단 내 경기부터 잘 마무리해야지.”

“그렇군요.”

최악의 경우엔 레니 베나트 없이 셸랑 데카드의 부전승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럼 더더욱 그 녀석의 실력이 오리무중 돼 버리는 건데.

하는 수 없이 경기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가리온과의 결투가 시작될 때까지 레니 베나트는 등장하지 않았다.

* * *

대전제 준결승전.

사실상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기사단장 같은 괴물 놈들은 없지만, 쟁쟁한 기사들 사이에서 제법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는 거니까.

‘실은 결투랄 것도 한 번뿐이었지만.’

뭐 그걸 따져도 잘하긴 잘한 거다.

피츠 라이트 정도면 출전자 운만 좋았어도 충분히 우승 가능한 경지였으니까.

이번 대전제가 상품 때문에 조금 급이 높은 편이긴 했다.

“형님! 꼭 이기십쇼!”

“가리온 클랜 파이팅!”

“크하핫! 그래! 내 반드시 우승해 주마!”

준결승전 상대는 가리온.

따로 섬기는 귀족은 없지만 용병 클랜 하날 이끄는 녀석이라 관중석에선 가리온의 부하 녀석들이 한창 응원에 나서는 중이었다.

“자, 그럼…….”

피츠와의 경기 때처럼 심판의 자잘한 설명이 뒤따랐다.

그동안 난 녀석과 마주선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후후! 아이소테르의 백작님이라셨나? 괜한 힘 빼지 마시고 기권하는 게 어떠슈?”

“흠.”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대뜸 도발부터 나서는 가리온.

검술 랭크 6에 버금가는 실력자다 보니 타국의 귀족쯤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안다.

이놈은 랭크 6 따위가 아니다.

“그럼. 부디 무탈하시길.”

심판은 혹여나 경기에 휘말릴까 서둘러 경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마자 가리온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힘을 뽐내기 시작했다.

바앙!

거센 풍랑과 함께 터져 나오는 푸른 오러.

확실히 지금껏 만나온 랭크 5들보단 확연히 강해 보이는 경지다.

겉으로만 봤을 땐 크로드와 비슷한 수준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숱하게 검을 봐 온 내겐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웅웅웅…….

오러 소드의 반대편 손에서 얇게 진동하는 단도까지.

몰랐으면 쫄았을 텐데 알고 나니 웃음만 나왔다.

“후후.”

“…하! 상위 랭크의 오러를 보니 정신이 나가셨나 봅니다? 괜히 다치지 말고…….”

“옘병. 상위 랭크는 무슨.”

“예, 엠병?”

“그딴 건 나도 한다.”

파아앗!

별안간 터져 나오는 벼락과도 같은 섬광.

산조차 집어삼킬 듯한 매서운 기세의 오러에 대지가 요동쳤다.

쿠구구구……!

“허억!”

“저, 저게 뭐야?”

“백작이 저렇게나 센 녀석이었어?”

“와아아아!”

흉흉한 기세의 오러를 본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하지만 어느 정도 랭크 좀 높다 싶은 녀석들은 알 거다.

이건 그저 눈속임뿐이란 걸.

“오러 소드에 라이트닝 볼트, 윈드 커터랑……. 뭐 그 외에도 이것저것 섞었지.”

“으읏……!”

이건 마법과 검술 랭크가 한데 섞인 콤비네이션.

검술 랭크 6부턴 주변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흉흉한 기세가 터져 나온다.

난 단순히 그걸 마법으로 재현한 것뿐이다.

그럼 검을 맞부딪히기 전까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게 진짜 랭크 6의 경지인지, 아님 그저 사기꾼인지.

가리온이 갖고 있던 랭크 6이라는 소문.

그건 그저 눈속임을 통해 얻어 낸 헛소문이었다.

‘그래서 검술 랭크 6이란 소문이 돈 것이고.’

결국 전부 허세였던 것이다.

그 원천은 단도에 깃든 마법이나, 뭐 그런 거겠지.

“흥! 그렇다고 뭐가 바뀔 것 같습니까!”

“그래. 바뀔 건 없지.”

“갑니다!”

“그래. 가라.”

가리온이 양손에 든 검을 쥐고 달려들려던 그때.

난 바닥에 결계 마법 하날 펼쳤다.

“디스펠.”

푸확!

그 위로 가리온이 발을 내딛자마자 녀석의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빠르게 사그라 들었다.

“으읏!?”

가리온이 당황함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그때.

무지막지한 발길질이 녀석의 턱주가릴 가격했다.

뻐어어억!

“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가리온은 그대로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어?”

[겨,경기 종료! 승자는 이안 임페라!]

“와아아아!”

소설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는 놈들을 많이 봤다.

거대한 벽에 마주하자 하는 수 없이 다른 랭크를 올리려 고군분투하는 녀석들.

가리온이란 녀석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리고 이런 케이스는 대개.

‘여기까지지.’

벽이란 건 한가로이 다른 데 한눈파는 놈들에겐 함부로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뭐 보아하니 마법 랭크 4쯤 되는 것 같은데.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애매한 재능은 독이나 다름없지.’

검술만 놓고 보면 차라리 피츠 라이트가 더 강했다.

대진운만 좋았더라면 결승까지 갔었으리라.

“구르륵…….”

기절한 가리온이 입에서 흰 거품을 토해 냈다.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해도 죽진 않았을 거다.

조만간 정신 차리겠지.

어느 의미로 정신을 차릴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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