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왈칵!
“읍…….”
속에서 핏물이 베어 나왔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이를 막아 냈다.
덕분에 입술이 붉게 물들긴 했지만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정도로 끝났다.
“으윽……!”
쿵!
황소만한 덩치의 기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력을 다 소진해 쓰러져 버린 거다.
이쪽도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다만 결국 쓰러진건 저쪽이다.
그렇다는 건…….
[경기 종료! 승자는 이안 임페라! 이안 임페라!]
“와아아아!”
“이안! 이안! 이안!”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외침과 함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웅크린 곰 피츠 라이트.’
꽤나 강한 녀석이었다.
아마 이대로 정진하기만 한다면, 차기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노려 볼 만했다.
‘이런 녀석이 소설에 안 나왔단 건가.’
어쩌면 나왔을지도 모른다.
부활한 카잔 제국의 후예들한테 죽는 적갑 기사단34번 정도로.
자세한건 모르겠다만 일단 하난 확실했다.
이 녀석에겐 재능이 있다.
거기에 지키고자 하는 무언가까지 곁들여진다면?
소설 속 프리아나에 버금가는 괴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해지는 데는 뭐든 필요한 법이지.’
그게 뭔지는 중요치 않다.
증오건 질투건, 누군가에게 품은 연심이건.
‘강해져라. 곰돌이 친구.’
“으윽…….”
쓰러져 있던 피츠의 눈꺼풀이 꿈틀댔다.
과연 곰 같은 놈이다. 방금 쓰러진 녀석이 벌써 정신을 차리다니.
“정신이 드나?”
“제, 제가 진 겁니까……?”
“그럼. 상대가 나잖아.”
“으으…….”
“그래도 잘 했다. 나도 위험할 뻔했어.”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일어나라구.”
난 쓰러진 피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쓰러진 채 내 빈 손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왜. 싫어? 준결승전까지 누워만 있을 건가?”
“아, 아닙니다.”
턱!
잠시 고민하던 녀석은 내 손을 맞잡았다.
“끄응…차!”
‘더럽게 무겁네.’
이건 뭐 진짜 곰도 아니고.
[아……! 승자가 패자에게 건내는 화해의 악수! 정말 멋지군요!]
“이안! 이안!”
“저 호위기사란 친구도 잘 싸우던데?”
“그러게 말이야! 2차전에서부터 이런 경기라니! 대단한데!”
“피츠! 피츠!”
난 피츠를 일으켜 세운 채로 관중을 둘러봤다.
‘약간은 쇼맨십도 필요한 법이지.’
피츠와 손을 맞잡은 채로 하늘 높이 추켜올렸다.
대전제는 축제다.
승자와 패자 모두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그런 의미였다.
“와아아아!”
“와……. 저게 내가 알던 그 망나니가 맞나?”
“그러게 말이야. 그거 다 헛소문 아니야?”
“그런가? 그렇다기엔 증언이 너무 많은데.”
“몰라. 아무렴 어때?”
“그렇긴 하지.”
* * *
“흐아!”
“고생하셨습니다! 백작님!”
경기가 끝나자마자 프리아나가 달려와 날 부축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후들거리던 다리가 풀렸다.
“크흐흐! 고생 좀 했지.”
“솔직히 처음 피츠의 경지를 봤을 땐 조금 걱정했습니다. 피츠 저 녀석.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졌더군요.”
“그래?”
“네. 내뿜는 오러의 크기 하며……. 마지막엔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좀 빡세긴 했어.”
“혹시 마지막에 무슨 대화라도 오간 겁니까?”
“음……. 들렸나?”
“아뇨. 환호성 소리가 너무 커서 못 들었습니다.”
“그럼 됐어. 그냥 조금 도발한 거지 뭐.”
“하하. 역시 그런 거였군요. 갑자기 한방에 모든 걸 쏟아부으려더니만.”
프리아나는 한 번 크게 웃곤 날 부축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반대쪽으로 빠져 나가는 피츠를 흘긋거렸다.
“왜. 간만에 친구끼리 한잔하려고?”
“흐흐. 그럴 만한 사이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심란하긴 할 거다.
한때 자신의 자리였던 왕가 호위기사 자리에 경쟁하던 녀석이 들어간 거니까.
“…준결승전은 내일 모레였나?”
“네. 아무래도 2차전부턴 부상이 많으니 내일 하루는 쉽니다.”
“그럼 오늘은 한잔해도 되겠군.”
“네? 대전제 도중에 술이라뇨! 그건 좀…….”
“크흐흐! 술 한잔했다고 졌을 거면 어차피 질 거 아니겠나? 축제고 하니 오늘 하루는 즐기자구.”
“으음…….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처음엔 좀 빼는가 싶었지만 계속 권하자 프리아나도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프리아나와 함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백작님!”
두 여성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스바르트, 이슬린. 왔구만.”
“축하드려요! 경기 중간부터 보긴 했지만……. 정말 멋졌어요!”
“후후. 그랬나?”
“…….”
제 일인양 방방 뛰는 이스바르트와는 달리 이슬린은 묵묵부답이었다.
“어땠지?”
“…대단하셨습니다.”
“그래?”
“…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
이슬린은 지금 상황이 좀 불편한 듯했다.
하기사 숨겨 왔던 베로니아란 성이 들키고 말았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이슬린.”
“네. 백작님.”
“이안 클랜의 소유주로서 명령하겠다.”
“…네?”
강제적으로라도 풀어질 기회를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쭈뼛거렸다.
그녀는 일처리는 똑 부러지면서, 자신에 관한 건 서툴러 보였다.
“지금 당장 이글렌 공주한테 가서 수다를 떨도록. 개중에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내게 보고하고.”
“…아.”
“그게 네 일이니까. 그렇지?”
“…네! 백작님!”
“크흐흐. 그래.”
그녀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이슬린은 이슬린이다.
베로니아 가문이건 뭐건 지금껏 날 위해 일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출신이 어디건 신경 쓰지 마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슬린도 이를 알아채곤 표정이 밝아졌다.
“자. 그럼 가 봐. 이글렌 공주도 자기네 가신이 져서 화가 나 있을 테니까. 옛 친구라도 만나 화 풀면 좋지 뭐.”
“네. 그럼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슬린은 그렇게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자릴 떴다.
남은 건 프리아나와 이스바르트, 그리나 나 셋뿐.
“어이.”
“네? 저 말씀이신가요?”
“술은 좀 할 줄 아나?”
“수, 술이요? 술은 잘 안 마셔 봐서…….”
“마셔 보긴 했다는 거 아냐?”
“그, 그렇죠.”
“가자구. 오늘은 내가 쏜다.”
이스바르트는 곤란한 듯 프리아나와 날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프리아나가 어깰 한 번 으쓱하고 말자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라 나섰다.
* * *
한층 날이 저물어 가는 늦은 저녁.
에이먼은 후줄근한 잠옷 차림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후후. 이안 녀석. 내 언젠간 이리 대성할 줄 알았지.”
에이먼의 하나뿐인 아들 이안 임페라.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속만 썩이는 망나니 아들이었던 철부지 아들.
그런 녀석이 벌써 홀로 대성해 백작위까지 받아 냈다.
“크읍…….”
그간의 힘들었던 나날들이 떠올랐는지 에이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보……. 이제 저세상 가서도 얼굴 붉힐 일은 없겠구려…….”
홀로 영지 하날 다스리며 개망나니 아들놈 때문에 속까지 썩이던 나날들.
이게 다 자기가 부족한 탓이라 여겼던 터라 마음고생도 심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호시탐탐 가문을 노리던 정적도 없어졌고, 아들 녀석도 매일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이젠 대전제까지 나가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기까지 하고 있고.
“이러다 대전제에서 우승까지 하는 건 아닌가 몰라? 흐흐!”
에이먼은 홀로 창문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상상까지 떠올렸다.
“쯧. 아니지. 아무리 이안이 성장했다 해도 대전제 우승까진 좀…….”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벌렁벌렁 거렸다.
“지금쯤 2차전이 끝났을 텐데…….”
1차전은 부전승이란 얘길 들었다.
이제 3번만 이기면 우승이긴 한데…….
아무래도 아들 녀석이 그런 위험천만한데 나서다 보니 걱정이 크긴 했다.
우웅…….
“어엇!”
에이먼의 품속에서 짧게 울리는 유리구슬 하나.
이안 일행이 가져간 통신용 마법구였다.
서둘러 마법구에 마나를 흘려 넣자 유리 표면 위로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났다.
[아아. 들리십니까.]
“이, 이안! 어떻게 됐느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하하. 다쳤으면 연락을 못 드렸겠죠.]
“으응……. 그렇긴 하다만……. 어째, 2차전은 잘 치렀느냐?”
[그럼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겼구요.]
“오오! 저, 정말이냐! 내가 알기론 상대가 아이소테르 왕가의 호위기사라 한 거 같은데!”
[좀 싸우긴 하더군요. 다만 아직 신입이라 상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크흐흐! 잘 했다! 잘 했어!”
에이먼은 당장이라도 이안의 볼에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마법구 위로 입술을 내밀었다.
[으! 뭐하시는 거예요!]
“흐하하! 그만큼 내 아들 녀석이 자랑스럽다는 거지!”
“저……. 백작님? 혹시 공자님 목소린가요?”
밖에서 먼지를 털어 내던 일레느가 마법구 목소릴 듣고 문을 두드렸다.
“그래! 일레느! 너도 와서 축하해 주거라! 이안이 2차전에서 이겼다는구나!”
“저, 정말요! 대단해요! 공자님!”
“이 녀석! 공자님이라니! 이제 어엿한 백작위까지 받은 아이한테!”
“아앗……. 죄송합니다. 저는 이게 입에 붙어서…….”
[흐흐. 공자님이라.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요.]
“푸흐흐……. 뭐 필요한 건 없느냐? 내 사람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마!”
[아뇨. 어차피 대전제 끝나면 갈 건데요. 뭐.]
“으음, 그렇긴 하지.”
그렇게 가족과 인사를 끝낸 이안이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대전제 끝나면 새로운 저택으로 옮기시는 건 어떤가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아버지랑 같이 안 있다 보니 마음이 허전해서요. 싫으시면 말구요.]
“음……. 싫은 건 아니다만…….”
에이먼 백작은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다.
분명 지금 이안이 머문 저택이 훨씬 좋긴 했다.
수도랑 더 가까우니 여러모로 업무 보기에도 편할 테고.
하지만 선대 가주 때부터 지내 온 저택을 버리기는 좀 망설여졌다.
[…자세한 건 나중에 가서 얘기하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이만 들어가세요.]
“…그래! 2차전은 잘 마무리했으니 푹 쉬고! 다음 준결승! 준비 잘 하거라! 혹시라도 다칠 것 같으면 얼른 그만두고! 제일 중요한 건 네 몸이다. 알겠느냐?”
[당연하죠. 이런 데서 죽으려고 고생한 건 아니니까요.]
“푸흐흐……. 그래. 그럼…….”
[그럼… 지직… 편히 주무…지지직!]
* * *
팟
“음?”
방금 마법구가 잠깐 고장 난 거 같았는데.
하지만 대화 흐름상 끊으려 하기도 했고, 위셀란에서 아이소테르까진 거리가 꽤 된다.
그만한 거릴 연결한 건데 소리가 좀 끊길 수도 있지.
“에이먼 백작님께선 여전하시군요.”
“그래. 아들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지.”
에이먼을 생각하려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실 에이먼은 나랑 피 한 방울 섞인 사이도 아니다.
피가 이어진 건 이안의 몸뚱이 뿐이지 머릿속 나, 이진수랑은 전혀 관계도 없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이런 개망나니 새끼도 품으려 한 아버지다.
그런 부성애를 보고도 가슴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나.
‘그동안 고생했으니 앞으론 호강시켜 줘야지.’
에이먼이 내 저택으로 오는 게 여러모로 편하긴 할 거다.
크라니그 산맥 너머에 홀로 지내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그나저나 일레느 양도 많이 컸군요. 제가 처음 봤을 땐 어린아이 같았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마법 통신구 너머로 본 일레느는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1년 새 키도 좀 큰 거 같고. 활기찬 건 변함없었지만.
아마 내 저택으로 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다.
지금은 이슬린이 저택 관리에 클랜 관리까지 오만 가지를 다 하고 있었다.
거기에 마법 수련까지 하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거다.
그럴 바엔 일레느랑 같이 나누면 도움이 되겠지.
“이스바르트는 본 적 없지? 아마 너랑 비슷한 나이 또래라 친하게…….”
“으에엑…….”
고갤 돌려보니 이스바르트가 반쯤 고장 나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독?”
“아니. 그냥 맥주 한 잔 마신 거야.”
“흐흐흐…….”
반쯤 풀린 동태 눈깔로 헤실거리는 이스바르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술에 쩔은 모습이었다.
이런 여자가 영겁의 기사단 두뇌가 될 여자였다니.
콰악!
“응?”
잔뜩 술에 취해있던 이스바르트가 내 어깰 붙잡았다.
그 모습에 프리아나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미친……!”
“흐흐흐…….”
“됐어. 취했으면 그럴 수 있지.”
뭐 이 정도 주사는 애교로 봐줄 수 있고.
여기서 이상한 짓만 안한다면야…….
“요, 요……. 귀여운 녀…….”
그간 다져온 수련의 결과였을까.
순간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그리고 매번 말하는 거지만,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리는 법이 없다.
“…우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