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셸랑 데카드와 멘디스 위즈덤의 경기.
그 결착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턱주가리에 꽂힌 주먹 한 방.
겨우 그걸로 검술 랭크 5의 강자가 꺾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검술 랭크5가 그 정도로 어이없게 질 정도라면 꽤나 강한 녀석임은 틀림없다.
이는 1차전을 본 프리아나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셸랑 데카드란 녀석. 1차전에서도 그랬나?”
“아닙니다. 오히려 멘디스에 한참 뒤쳐지는 자와도 십수 합만에 겨우 이겼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담 본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데…….”
“대체 어디 있던 자일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실력을 숨기는 건 다들 한다.
앞으로 있을 경기에서 괜한 정보를 누설할 수도 있으니까.
당장 2차전 첫 번째 경기 후 이어진 레니 베나트와 가리온도 실력을 최대한 숨긴 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멘디스가 붉은 오러로 추악한 마음이니 뭐니 개소리만 안 지껄였어도 데카드는 적당히 봐주다가 이겼을 거다.
문제는.
‘그만한 녀석의 정체도 모른다라.’
그게 제일 문제였다.
“일단 내 경기부터 집중하자구.”
“네, 백작님.”
어느새 내 순번이 돌아왔다.
“피츠 라이트. 그 친구는 저처럼 빠른 공격보단 묵직한 한 방 한 방을 노리는 편입니다. 가능한 검을 섞기보단 장기전을 노리시면…….”
“음. 지난번에 한 번 봐서 대충 알 것 같구만.”
“예? 한 번 보셨다구요? 언제 그런…….”
“길 가다 한 번 본 거지 뭐.”
“으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친구라니. 둘이 꽤나 친했나 봐? 기사 학교 수석이랑 차석이 친하긴 어려울 텐데.”
“하하하……. 애증의 관계 같은 거죠.”
“그렇구만.”
둘 사이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을 가능성이 크다.
한 명은 수석 졸업에 왕가 호위기사였던 자.
한 명은 차석 졸업에 현 왕가 호위기사인 자.
그래도 같이 피똥 싸며 기사 학교를 졸업한 사이니 미운 정도 단단히 들었던 모양이다.
“너가 볼 때 승산은 어떤 것 같나?”
“후후. 당연히 백작님이죠.”
“왜지?”
“백작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푸흐흐… 그렇긴 하지.”
“그럼. 모쪼록 몸조심하십쇼.”
“당연하지. 축제 도중에 죽으려고 여기까지 버틴 줄 알아?”
“아무렴요.”
그렇게 프리아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곤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와아아아!!!”
“와우.”
객석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경기장에서 마주하니 관중들의 박력이 남달랐다.
확실히 왕국 연합이 개최하는 축제, 대전제다웠다.
[말씀 드리는 순가안! 아이소테르의 떠오르는 샛별! 이안 임페라 백작이 등장했습니다!]
“이안! 이안! 이안!”
‘백작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되나?’
살짝 꼰대가 된 듯했지만 매번 절절매던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이름을 불러 대니 기분이 묘했다.
하기사 난 아이소테르의 귀족.
위셀란에선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백작 이름을 언제 함부로 불러 보겠냐며 실컷 연호해 대는 것도 있을 거다.
“뭐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그간 망나니 짓거리에 뜬금없는 영웅담이 버무려져 호사가들 사이에선 꽤나 인기 있는 축에 속했다.
어찌어찌 운 좋게 황금 은행 습격도 막고 랭크도 적당히 올린 그런 젊은 귀족.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아직 부족했다.
그저 운이 아닌 진짜 실력으로 이 자리에 왔다는 걸 알려야 했다.
‘이건 가능한 아끼자고.’
품속에 영약이 담긴 유리병을 매만졌다.
내가 가진 영약은 단 한 병.
가능한 결승전까지 아껴야 랭크 6을 상대로도 비벼 볼 만하겠지.
“이안! 이안!”
“한번 보여 줘라! 아이소테르의 술주정뱅이!”
거슬리는 응원이 들려왔다.
“술주정뱅이?”
“읏…….”
관중에서 멋모르고 씨불이는 녀석을 째려봤다.
“나, 나 쳐다본 건가?”
“에이! 저기서 니가 한 말을 들었다고? 말도 안 되지!”
“그, 그렇지? 후! 십년감수했네.”
미안하지만 다 들린다.
‘너 얼굴 기억했다.’
녀석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하자 놈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에 맞서는! 아이소테르의 왕가 호위기사! 피츠 라이트!]
“와아아아!”
나에 비하면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피츠도 관중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제니스 기사 학교 차석에 새로이 들어온 아이소테르 왕가 호위기사.
아마 프리아나나 정도 되는 훈훈한 외모였다면 인기가 더 많았을 거다.
피츠 라이트는 훈훈하다기보단 뭔가…….
“우오오옷!”
피츠는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환호성에 버금갈 정도였다.
“와아아!”
“그래! 저런 게 기사지!”
“피츠! 피츠! 피츠!”
고릴라와 황소를 반반 섞은 듯한 이목구비.
거기서 뜨거운 콧김을 씩씩 내뿜으니 진짜 짐승 같았다.
두툼한 목덜미를 삐걱이며 몸을 푸는 모습은 달려들기 직전의 황소 같았고.
이어서 심판의 안내에 따라 서로를 마주 봤다.
“제4회 대전제 이후부터는 아티팩트 및 영약 사용이 가능합니다. 혹시 필요하십니까?”
“아뇨! 전 오로지 제 검! 이 검 하나만으로 승부하겠습니다!”
피츠는 허리춤에 검을 붙잡은 채로 심판에게 외쳤다.
‘음……. 영약은 아직 쓰기 아깝지.’
“나도 그러겠다.”
“네. 그럼 세부 사항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심판은 경기 진행에 앞서 자잘한 규칙을 설명했다.
이미 대전제 참가 당시 다 확인한 내용이지만 자칫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터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했다.
“경기 도중 발생하는 인명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심판의 승패 판정 이후에도 불필요한 상해 시도는 실격 처리됩니다. 동의하십니까?”
“예!”
“그래.”
“그럼.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피츠는 인상을 팍 구긴 채 으름장을 놨다.
“백작 나으리라고 봐드리진 않을 겁니다!”
“후후.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가벼운 인삿말이 오가고.
남은 건 결투뿐이었다.
[경기 시작!]
“하아아압!”
피츠는 프리아나가 알려 준 대로 우악스런 전투 스타일을 펼쳤다.
…콰앙!
주로 첫 합에는 가볍게 탐색전이 오가는 법이다.
하지만 피츠는 첫 합부터 무지막지한 오러로 상대를 밀어붙였다.
시작부터 체내의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뽑아낸 오러 소드.
어중띤 기사라면 얼마 가지도 않아 마나가 고갈돼 쓰러질 수준이다.
하지만 피츠는 달랐다.
콰앙! 콰아앙!
연신 뽑아내는 검격은 위력이 줄기는커녕 벼락같은 일격 일격이 전해졌다.
“호오.”
과연 왕족 호위기사가 허명은 아니었다.
프리아나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경지.
일단 난 녀석의 공격을 차분히 받아 내며 상황을 살폈다.
한 방 한 방이 바윗돌로 찍어 누르는 듯한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계속 밀릴 순 없지.’
이쯤에서 기세를 한 번 눌러 줄 필요가 있다.
받아치기만 하던 난 용린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아이소테르, 아니, 어쩌면 온 대륙에서 손에 꼽을 만한 장인의 손에 강화된 검.
이는 오러를 스펀지 빨아들이듯 머금고 단단한 나무뿌리마냥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곤 난 강력한 일격을 내질렀다.
꽈아앙!
“으읏!”
검술 랭크5의 기사.
그 둘의 충돌에 폭음과 함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쉽사리 볼 수 없는 상위 랭크 보유자들의 싸움.
주변 관중들의 흥분으로 가득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안! 이안!”
“피츠! 피츠!”
제대로 맞부딪히자 녀석도 놀랐는지 몰아붙이던 기세를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피츠는 굳은 얼굴로 날 노려본 채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후후.”
방금 건 나도 꽤나 놀랐다.
프리아나와 대련 때는 아무래도 서로 손속을 두기 마련이었다.
오러의 수준도 가능한 전력을 내뿜기보단 적당한 선에서 멈추곤 했으니까.
하지만 방금은 달랐다.
검술 랭크 5의 기사가 혼신을 다해 맞부딪힌 일격.
바싹 메말라 있던 손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꽤 하시는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못 할 경지.
검술 랭크 5.
그런 녀석과 부딪혔었다면 바로 내장이 터져 죽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저 정도 되는 놈이랑 싸우는 데도 전혀 무리가 없다니.‘
“그럼. 다시 시작할까?”
“물론입니다!”
꽤나 격렬한 합이 오갔는데도 녀석에겐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다.
무지막지한 전투 스타일답게 체력 하나만큼은 곰과도 같은 수준.
그래서 피츠에겐 이명이 하나 붙어 있다.
속검의 기사 프리아나, 쾌검의 기사 크로드처럼.
‘웅크린 곰 피츠 라이트.’
다른 녀석들의 이명에 비하면 놀리는 수준에 가깝다.
아마 처음엔 놀리는 의미였을 거다.
덩치나 외모도 곰 같은 녀석이 검법까지도 곰 같았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멸칭을 이명으로 바꿔 냈다.
이를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진 안 봐도 알 것만 같았다.
“후우…….”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자셀 고쳐 잡았다.
다시금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려는 그때.
관중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츠! 꼭 이기세요! 아이소테르를 위해서!”
맑으면서도 청아한 목소리. 이글렌 공주였다.
피츠나 나나 둘다 아이소테르 소속이긴 하다만.
굳이 따지자면 피츠가 더 아이소테르에 가깝긴 하니까.
피츠는 공주의 응원에 고갤 짧게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그런데.
‘응?’
묘하게 붉어진 피츠의 두 볼.
단순히 몸을 격렬히 쓰느라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이 녀석……?
“후후.”
입가에 미소가 드리우자 피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 웃으시는 겁니까?”
“그냥. 백작이 맘대로 웃지도 못하나?”
“…….”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다.
뭐랄까……. 로맨스 드라마 보는 느낌이라 해야 되나?
솔직히 말하면 응원하고 싶은 쪽이다.
갈렌 왕자에 비하면 이글렌 공주는 그나마 정상적인 축에 속하니까.
그러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너 설마. 공주한테…….”
“허, 헛소리 하지 마십쇼!”
백작한테 헛소리 하지 말라니.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그만큼 녀석도 신경 쓰이는 거겠지.
기사단장급이면 모를까.
일개 호위기사가 공주한테 연심을 품는 건 이뤄질 수도 이뤄서도 안 될 꿈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재밌단 거지.’
게다가 원래 소설대로라면 이글렌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프리아나도 이글렌을 딱하게 여기긴 했지만, 갈렌 왕자가 왕위에 오른 이상 그녈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 프리아나는 그저 기사로서 이글렌을 대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미래를 이 피츠란 자로 막을 수 있다면?
개망나니 갈렌이 아니라 이글렌이 이기는 미래를 만든다면?
세상이 혼돈에 빠지는 건 조금 더 미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악역 정도는 자처해 줘야지.’
난 원래 악역이었으니까.
“하! 감히 호위기사 주제에 공주님께 그런 마음을 품어?”
“…….”
“우습기 짝이 없군. 불경함을 넘어서 우스울 정도야.”
“그, 그런…….”
“하긴. 반평생 기사 학교에서 구르다 이쁘장한 공주님을 보니 마음이 동한 거겠지.”
“아닙니다!”
“그래? 그럼 공주가 별로란 건가?”
“…공주님은 다릅니다.”
“뭐?”
“공주님은……! 미천한 출신인 제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왕가를 지키는 검이 된 이상! 출신 따윈 중요치 않다고!”
“오…….”
피츠는 혼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대충 공주의 심성에 반했다는 얘기 같았다.
하기야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에 비하면 이글렌 공주가 선녀긴 하지.
“저는 왕가를 지키는 검! 비록 상대가 누구더라도! 공주님의 명이 있는 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키야…….’
이거 완전 공주빠였네.
“갑니다!”
“크흐흐! 그래! 어디 한 번 와 봐라!”
아까보다 더 크고 우람해진 오러가 피츠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글거리는 푸른 섬광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녀석도 프리아나에 못지않은 인재다.
더 강해져라.
더 강해져 이 망할 왕국의 미래를 바꿔라.
쿠구구……!
피츠에 검에 응하듯 이쪽도 용린검에 온 마나를 불어넣었다.
두 오러가 서로 반응하며 경기장 주위로 거센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피츠의 몸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
두 오러 소드가 격돌하며 폭발했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