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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1화 (81/222)

81화

“베로니아?”

내 말에 이슬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베로니아란 성은 그닥 흔치 않다.

내가 아는 베로니아가 그 베로니아라면.

“여기서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이것 참 인생이란 묘하네요.”

“친구라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어찌 공주 전하를 저 같은 게 친구라 하…….”

“후훗. 자꾸 이러기예요? 우리가 같이 지낸 추억이 몇 갠데?”

“공주님…….”

“뭐. 사정이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죠. 나중에 따로 시간 있으면 보러 오세요. 간만에 친구끼리 수다나 좀 떨게.”

“…….”

이글렌 공주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주님 명령인데.”

“후후. 고마워요, 이안.”

이글렌은 슬쩍 미소를 짓곤 사절단 일행과 함께 상석으로 향했다.

묘하게 열 받는 미소다.

그야 저 여자의 미소엔 살짝 신이 나 있었으니까.

마치 ‘주인이란 녀석이 가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나?’ 하는 듯한.

“…어떻게 된 거지?”

“그, 그게…….”

이슬린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당황한 반응이었다.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한 낌새가 없진 않았다.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이라도 상당히 높은 직책이 아니라면 마주할 일조차 없었을 게 왕족이다.

하지만 이슬린은 갈렌 왕자를 마주했을 때 상당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 개망나니 갈렌 왕자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베로니아라면 내가 아는 그 베로니아가 맞나?”

“…네. 백작님.”

베로니아 가문.

딱히 어느 왕국에 속한 가문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 왕국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가문이다.

그럼에도 베로니아 가문은 꽤나 강성한 가문에 속했다.

그도 그럴게 한 왕국에 속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가문의 혈통에 흐르는 적성 탓인지 베로니아 가문 출신은 대체로 마법 랭크가 높은 덕분이었다.

매년 마탑에서 배출하는 인재 중 베로니아 가문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다.

‘그러고 보니 은발이 그래서 그런 거였나.’

베로니아 가문 특유의 실크처럼 흘러내리는 은발.

하지만 은발인 사람이 한둘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슬린은 도적 클랜에 속했던 녀석이다.

마탑이라면 모를까 도적 클랜에서 일하는 녀석이 베로니아 가문일 줄 상상도 못했다.

‘잠깐.’

게다가 베로니아 가문이라면 분명 주인공 녀석이랑…….

“이슬린.”

“죄송합니다, 백작님. 속이려던건 아니…….”

“혹시 위로 형제나 자매가 있나?”

“예, 예?”

“언니나 오빠가 있냐는 거다.”

“어, 없습니다.”

“가까운 친척 중에는?”

“그, 그게……. 저희 가족은 베로니아 가문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방계 쪽이라 다른 베로니아 가문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습니다.”

“음. 그럼 공주랑은 마법 학교에서 만난 모양이군.”

“…네.”

“그때 갈렌 왕자랑도 몇 번 만났을 테고.”

“…네.”

“그래! 역시 그런 거였구만.”

“…네?”

그간 앓던 이가 빠진 듯 묵은 체증이 훅 가셨다.

대체 이슬린이 갈렌 왕자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긴 했다.

직접 물어보긴 뭐해서 그냥 유야무야 넘어간 거긴 했는데.

“…죄송합니다! 백작님을 속인 죄. 달게 받…….”

“됐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으읏…….”

“베로니아 가문이 도적 클랜에서 일하고 있던 게 마음에 걸려 말 못했던 거겠지. 그러다 보니 점점 말 할 타이밍을 놓쳤던 거고.”

“그런…….”

“아닌가? 혹시 날 몰래 염탐하려고 베로니아 가문에서 내려온 첩자라든가. 그런 건가?”

“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내 말이 맞지?”

“네…….”

“그럼 됐어.”

‘위로 형제자매가 없다면 주인공이랑 엮인 것도 아닐 테니까.’

나야 베로니아 가문 출신 가신이 있다는 건 호재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베로니아 가문 특유의 혈통이라면 더 높은 마법 랭크를 노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슬린, 지금 마법 랭크가 몇이지?”

“4…입니다.”

“마법 수련은 좀 하고 있나?”

“그건 아직…….”

“그럼 잘 됐군. 앞으로 마법 수련도 병행하라구. 힘든 거 있으면 뭐든 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줄 테니까.”

“…….”

“왜. 힘들어?”

“아, 아닙니다! 그게……. 화나신 건 아닌가 해서요…….”

“화? 음……. 화가 좀 나긴 하지. 빨리 말했으면 이래저래 마법 랭크 올릴 수 있게 노력해 봤을 테니까.”

“…….”

별안간 이슬린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눈망울이 촉촉해지는 게…….

“자! 오늘은 2차전 준비나 하자고. 오케이?”

“쿨쩍…….”

매번 차가운 모습만 보여 주던 녀석이 이런 반응을 내보이니 어찌해야 될지를 모르겠다.

“배, 백작님! 이슬린이 좀 힘이 든가 봐요. 잠시 쉬었다 와도 될까요?”

“어어, 그래. 얼른 가 봐.”

다행히 분위기를 읽은 이스바르트가 중재에 나섰다.

이스바르트는 얼른 이슬린을 경기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랑 프리아나는 저 멀리 떠나가는 둘을 멍하니 서서 바라만 봤다.

“거참…….”

“백작님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신 분 같습니다.”

“좋은 의미지?”

“아무렴요.”

“쯧.”

사실 방금 이슬린 가문에 대한 건 작은 사항이 아니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 세계 사람들 입장에서 출신 가문을 속인 건 큰 실례나 다름없다.

아니, 상대에 따라선 실례를 넘어 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쩌면 다른 가문에서 보낸 세작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슬린이 세작일 리는 없다.

도적 클랜에서 영입을 제안한 건 나고, 세작이라기엔 그때 당시 임페라 가문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사실상 이 자리까지 오게 한데에는 이슬린의 지분이 상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고작 출신 가문을 안 밝혔다고 내친다?

그건 제 살 파먹는 수준이 아니라 제 팔다리 잘라 내는 수준이다.

‘게다가 방계 출신이면 주인공과 엮일 일도 없었을 테니까.’

베로니아 가문은 단 하나의 직계와 수많은 방계로 나뉜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뿐인 직계.

그 중에서도 현 베로니아 가문의 가주, 그 녀석의 딸 말곤 없다.

그 여잔 주인공 디아 제니스랑은 지독한 인연이 될 여자니까.

‘인연이 연인이 되는 케이스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주인공의 연인이랑 엮인다?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안 임페라, 이 몸뚱이가 가진 얼굴은 꽤나 준수한 편이다.

괜히 그 여자랑 엮였다 나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에이. 그건 너무 갔나?’

아무튼 그쪽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곧 2차전 첫 경기가 시작되오니 관객 분들께선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 시작하는군.”

곧 경기 시작이 있음을 알리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상석이 확실히 좋긴 좋았다.

경기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탁 트인 시야.

거기에 출전자들도 코앞에 있어 얼굴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행여나 결투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관중석 맨 앞에서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걸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확실히 힘이 있는 게 좋긴 좋다니깐.”

자리에 앉아 아이소테르 사절단 쪽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이글렌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

녀석은 이슬린이 뛰쳐나가는 걸 봤는지 날 향해 한 번 쏘아보곤 다시 경기장을 향해 고갤 돌렸다.

[대전제 2차전의 시작을 장식할 출전자! 셸랑 데카드!]

“와아아…….”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셸랑 데카드.

상석인 덕에 녀석의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겉보기엔 조금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밋밋한 얼굴에 후줄근한 체형.

딱히 특징이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은 채 허리춤에 장검을 움켜쥔 모습만큼은 강단이 있어 보였다.

“흠……. 확실히 처음 보는 녀석이구만.”

이안의 얄팍한 기억을 헤짚어 봤지만 역시나 처음 보는 녀석이다.

“누군지 알아보겠나?”

“으음……. 아무래도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가까이서 보면 좀 다를까 해서 프리아나한테 물어봤지만 역시나 모르는 눈치다.

“뭐. 경기 수준이 중요한 거니까.”

[그 상대는~]

“와아아아아!”

“꺄아아악!”

방금 셸랑 데카드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다.

대체 뭐길래 반응 차이가 이렇게 심한가 했더니, 상대 출전자를 보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멘디스! 멘디스!”

“멘디스 위즈덤. 위즈덤 자작가 출신의 기사군요.”

데카드의 상대란 녀석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쳐 입고 있었다.

붉은색, 푸른색의 염료로 덧칠한 갑옷은 누가 봐도 방어보단 치장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꽃이라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 같구만.”

“네. 위즈덤 가문은 갑옷 세공으로 유명하니까요.”

“그런 거군.”

전 대륙의 이목이 쏠리는 경기인 만큼 이런 이유로 참가하는 기사들도 더러 있었다.

이른바 스포츠 스타에게 스폰이 붙는 거랑 같은 거다.

검술 좀 배웠다 싶은 귀족이라면 저런 갑옷 하나 정도는 갖고 싶을 테니까.

“그래 봤자 하ㄹ… 브론즈 비어드가 만든 갑옷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겠지.”

“당연하죠.”

애초에 용도가 다르다.

멘디스란 기사가 입은 건 갑옷계의 드레스 같은 거니까.

“다만……. 셸랑 데카드란 기사가 입은 거에 비하면 튼튼해 보이는군요.”

“흠…….”

가검이 아닌 진검, 그것도 오러를 풀풀 내뿜는 오러 소드로 싸우는데 가죽 갑옷이라.

물론 움직임이야 편하긴 하겠다만 좀 위험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유능한 인재길래 가죽 갑옷만 덜렁 입고 왔는지 궁금해졌다.

어느새 내 입가에 흥분으로 가득한 미소가 걸릴 즈음 경기 시작을 알리는 타종이 울려 퍼졌다.

데엥~!

“멘디스! 멘디스!”

경기장엔 멘디스를 연호하는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훈훈한 외모에 화려한 갑주를 입은 기사.

그에 반해 가죽 갑옷만 덜렁 입은 밋밋한 얼굴의 기사.

하지만 여긴 인기투표나 하는 축제가 아니다.

오로지 검.

검술 실력만으로 승자가 결정되는 대전제다.

…카앙!

먼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일 합이 오갔다.

멘디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애초에 대전제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검술 랭크 5는 된다는 뜻.

서로가 맞부딪힌 검에서 붉고 푸른 오러가 터져 나왔다.

‘붉은 오러라.’

오러라고 꼭 푸른색만 있진 않았다.

당장 크로드 녀석도 붉은 오러였다.

살아온 인생에 따라 오러 색이 변한다나 뭐라나.

대개 붉은 오러라면 살면서 피똥 좀 싸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압!”

멘디스는 푸른 오러를 극한으로 뽑아낸 채 상대를 밀어붙였다.

관중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지 요란한 기합소리까지 곁들였다.

“…….”

이에 데카드의 검이 살짝 밀리는가 싶다가 녀석의 몸이 움직였다.

파악!

하복부를 노리고 들어온 발길질.

멘디스는 이를 한쪽 다리로 막아 내곤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오오……!”

그냥 반 보 뒤로 빼면 될 걸 굳이 백덤블링까지 보여 가며 난리치는 멘디스.

내겐 그저 바보 같은 짓 같았지만 일반 관중들에겐 달랐다.

“히야!”

“오빠! 나 죽어!”

‘그냥 죽어라.’

타닷.

사뿐히 뒤로 착지한 녀석은 검을 추켜든 채 자셀 잡았다.

그리곤 난데없이 싸우다 말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붉은 오러라니!”

“……?”

“어찌 기사라는 자가 나처럼 고고한 푸른 오러가 아닌 붉은 오러를 내뿜을 수가 있는 거지?”

“…….”

“이는 분명 네놈의 추악한 마음도 피로 물들어 있다는 뜻!”

“…….”

“푸른 오러를 가진 정의로운 기사! 멘디스 위즈덤이 네놈을 멸하겠다!”

“…….”

녀석의 발언에 잠시 벙 쪘다.

프리아나도 벙 찐 건 매한가지였다.

오러의 색에 사람의 성향 따윈 관계 없다는 건 상식 중에 상식.

붉은 오러를 가진 기사가 적긴 하다만 이는 추악한 마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를 그저 구경하는 입장에선 다르게 보인다.

대부분 봐 왔을 건 푸른 오러였을 테니까.

“오……. 마음가짐을 나쁘게 먹으면 오러가 붉어지나?”

“몰라. 저 기사님 말하는 거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멘디스! 멘디스!”

“와아아아!”

“이건……. 셸랑이 이겼음 합니다.”

“나도.”

아무리 쇼맨쉽이 중요하다지만 저건 좀 아니지 싶다.

“간다!”

“…….”

“추악한 기사여! 내 검이 널 단죄하리라!”

멘디스는 자기 말마따나 푸른 오러를 풀풀 내뿜은 채로 데카드를 향해 돌진했다.

…후웅!

푸른 오러가 반원을 그리며 데카드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데카드는 검을 들어 반격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사박.

데카드의 한쪽 발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녀석은 그대로 멘디스의 검선을 피하면서 녀석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빠악!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묵직한 타격음.

거의 북이 찢어질 듯 내려칠 때나 들을 법한 소리다.

하지만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데카드의 주먹.

그리고 멘디스의 오른쪽 턱주가리였다.

…털썩!

턱이 반쯤 기괴하게 틀어진 멘디스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겨, 경기 종료! 승자는 셸랑 데카드! 셸랑 데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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