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하암…….”
짭짤한 바닷 내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대전제가 열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
살짝 더운 날씨에 바닷바람까지 더해 피부가 조금은 찐득거렸다.
그닥 상쾌한 기분은 아니다만 바닷가로 놀러온 기분도 들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위셀란 쪽에서 마련한 숙소가 꽤나 수준급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평민뿐만 아니라 일반 귀족 출신 출전자들도 후줄근한 숙소로 배정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난 이제 백작.
그쯤 되다 보니 사절단과 비슷한 수준의 숙소가 제공됐다.
방도 넓직한 게 같이 온 녀석들에게까지 각방이 주어졌을 정도였다.
이스바르트는 혼자 자는 게 심심하다며 이슬린과 같은 방을 썼지만.
“일어나셨습니까. 백작님.”
“으음……. 벌써 아침이구만.”
하품 소릴 들은 이슬린이 벌써 올라와 미적지근한 물 한잔을 내어 왔다.
시원한 물이었음 좋았겠다만, 괜히 아침부터 찬물 들이켰다간 배탈이 날 수도 있다.
이슬린답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한 듯했다.
“후릅.”
살짝은 씁쓸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원기 회복에 좋다는 블루핀 씨앗차다.
간만에 고향 생각도 나 금세 한잔을 홀짝거리며 비워 냈다.
“어흐.”
“1차전 결과가 모두 나왔습니다. 대진표를 불러 드릴까요? 아님 직접 보실 건가요?”
“으음……. 직접 보지 뭐.”
“네.”
이슬린은 미리 준비해둔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대전제 첫날 열린 결투 결과는 모두 나왔다.
일단 나는 부전승.
제대로 된 결투를 못해 본 게 아쉽기도 했지만, 귀찮은 일을 덜은 셈이다.
아무튼 첫째 날 1차전을 거쳐 총 8명의 대전자들이 남게 됐다.
“호오.”
확실히 1차전 결과는 이슬린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미리 점찍어 두었던 요주의 인물 셋 모두 1차전에서 승리한 뒤였다.
-1차전 통과 인원-
[피츠 라이트 - 아이소테르]
[가리온 - 위셀란]
[레니 베나트 - 프로스트 랜드]
…….
“음?”
그리고 그 사이엔 익숙한 인물이 하나 껴 있었다.
[셸랑 데카드 - 위셀란]
“이 녀석도 이겼구만.”
“음……. 네.”
이슬린은 셸랑 데카드란 자의 승리에 대해 애매한 반응을 내보였다.
확실히 신경 쓰기도, 신경 안 쓰기도 애매한 출전자다.
출신을 전혀 모르는 것도 그렇고, 마냥 강자라 하기엔 고작 1차전이고.
“흠.”
이런 건 프리아나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거다.
이슬린도 나름 눈썰미가 있긴 하다만 검에 관해선 프리아나가 더 정확할 테니까.
“프리아나.”
“네! 백작님!”
내 부름에 곧장 옆방에 있던 프리아나가 튀어나왔다.
아침부터 방에 틀어박혀 운동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구만그래.”
“하하핫! 어제 출전자들의 검무를 봤더니 몸이 달아올라서 말입니다. 간단하게 근육이나 풀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어제 셸랑 데카드란 출전자 경기도 봤나?”
“물론이죠!”
“어땠지?”
“음…….”
프리아나는 지난날 경기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기사 어제 경기만 7경기가 있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자였다면 기억에 안 남았을 수도…….
“셸랑 데카드. 그 기사의 검법 말입니다…….”
“뭔가 있나?”
“뭐랄까…….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분명 모르는 얼굴에 검법도 처음 보는 게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래?”
“네. 어쩌면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더군요.”
“호오…….”
제니스 기사 학교는 검술 랭크 4부터 입학이 가능했다.
그야말로 엘리트 중에서도 싹이 보이는 엘리트만 모아 키우는 기사 양성소.
그런 곳 출신이라면 실력은 실력은 당연히 뒤따른다.
‘가문이 별 볼 일 없어서 나가리 된 케이스인가.’
출세하는 데에는 실력만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오베론마냥 다 씹어 먹을 만한 괴물이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검술 랭크 4는 그리 찾기 어려운 수준이 아니다.
애초에 제니스 기사 학교에 들어온 녀석들이 다 그 정도는 되는 경지다.
그런 녀석들이 혹독한 수련을 거쳐 졸업할 시기가 된다면?
프리아나처럼 검술 랭크 5에 도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 그때부턴 운이 중요하다.
정확히는 태어날 때 집는 수저 운.
고만고만한 실력에 출신까지 애매하면 제대로 된 귀족 가문에 영입되지도 못한다.
‘주인공이 딱 그런 케이스였지.’
주인공의 경우엔 주인공 버프로 실력 하난 뛰어났지만, 평민도 아닌 전쟁고아 출신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귀족 가문도 없이 꽤나 고생하게 된다.
아마 셸랑 데카드란 자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어찌어찌 기사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별 볼 일 없는 출신이라 제대로 명성조차 떨칠 수 없게 된 케이스.
그럼 이슬린이 데카드란 이름을 처음 들어 본 이유도 들어맞았다.
‘한 번 꼬셔 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금수저인지 은수저인지 그딴 게 아니다.
오로지 실력. 재능이 넘치는 인재.
그리고 날 향한 충성심.
이렇게만 있으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다른 왕국 출신이란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 애초에 왕국 연합으로 묶인 이상 아이소테르나 위셀란이나 그게 그거지.
사실상 국왕뿐만 아니라 왕자 녀석과도 척을 진 지금. 차라리 위셀란 출신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2차전은 나도 좀 구경해야겠구만.”
“음……. 백작님이 나설 순번은 제일 마지막이니 그때까진 여유롭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후후.”
2차전 상대는 어제 만났던 피츠 라이트라는 호위기사 녀석.
왕가 호위기사라면서 굳이 대전제에 출전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
애초에 피츠 라이트라는 기사 홀로 결정한 사안은 아닐 거다.
십중팔구 내 실력을 가늠할 겸 에런골드가 시킨 거곘지.
“쯧.”
그럼 뭐 어쩌겠나.
다른 놈도 아니고 왕이 그러는 건데.
까라면 까야지.
“…1,2차전은 이틀간 이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틀 후 준결승전. 그다음 사흘 후 결승전이 열리고 대전제도 종료됩니다.”
“결승전 끝나면 바로 수여식까지 진행되는 거라 했나?”
“네, 백작님.”
“흠, 빨리빨리 진행되니 좋긴 하네.”
보통 이런 축제는 한 달 정도 이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행이 화끈해서 마음에 든다.
남은 블루 핀 씨앗차를 한 방울까지 털어 넣고 기지개를 쭉 켰다.
상대도 검술 랭크 5니 얕잡아 볼 만한 녀석은 아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프리아나가 인정한 기사라 했으니.
‘그러고 보니 피츠 라이트란 이름은 소설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이래서 2등이 서러운 거다.
제니스 기사학교 졸업 당시만 해도 프리아나와 버금가던 인재.
그런 녀석이 이름 한 줄 언급되지 않다니.
“백작님. 2차전에 앞서 가볍게 대련 한 번 어떻습니까?”
“뭐? 경기 전엔 쉬어야지 뭔 대련이야?”
“으음. 그렇습니까? 백작님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프리아나는 아쉬운 듯 시무룩한 채로 입맛을 다셨다.
대전제는 각지에서 열리는 기사들의 싸움.
아무래도 그걸 보고 나니 저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아마 조만간 실컷 싸우게 될 테니까 너무 심심해하진 말라구.”
“네? 실컷 싸우다뇨?”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셸랑 데카드란 녀석을 영입만 한다면야.
만날 나랑만 대련하는 것보다 많은 이들과 검을 섞는 게 좋다.
프리아나가 성장할수록 나한텐 더 좋은 거니까.
* * *
조금 이른 아침에 일어난 덕에 2차전 첫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셸랑 데카드란 기사가 첫 경기 출전이라 서두른 탓도 컸다.
“오호.”
1차전도 나름 격렬했는지 경기장 곳곳엔 상흔이 가득했다.
위셀란에서 준비한 듯한 인부들은 수레 한가득 흙을 싣고 파인 흙바닥을 채워 넣기 바빴다.
다행히 대지가 갈라지는 수준은 아니라 경기장 보수 공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듯 보였다.
아마 이번 결승전쯤 가면 대지가 갈라지고 솟아오르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우승 상품 탓인지 랭크 6이나 되는 놈들도 출전했으니.
‘크로드 같은 놈 둘이 싸우면 아주 난리 나겠지.’
“그건 그렇고…….”
경기장에 들어서자 어제완 달리 바뀐 게 하나 있었다.
“자리가 바뀌었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일행 자리는 출전자들과 같이 단상 반대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절단 일행이나 갈 수 있는 상석 중에 상석으로 안내됐다.
“아무래도 백작위를 가진 분을 평범한 자리로 안내할 순 없었나 봅니다.”
프리아나는 어제보다 잘 보이는 자리가 마음에 든 듯했다.
하지만 난 대충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다들 벌써 오셨군요.”
낯선 목소리가 우리 일행 사이로 끼어들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살짝 떨리는 듯한 목소리.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글렌 공주.
옆엔 호위기사들을 잔뜩 대동한 채로 우리 일행과 마주했다.
개중엔 아이소테르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적갑 기사단 녀석들도 몇 보였다.
꽤나 더운 날씨인데도 붉은 안면갑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 얼굴까지 구분 가지는 않았다.
어제 바닷가에서 본 피츠 라이트라는 호위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곧 출전 대상이라 대열에서 빠진 듯했다.
“고, 공주님!?”
프리아나는 그녈 알아채자마자 냅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갤 숙였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후훗, 너무 요란 떨지 말아요, 프리아나. 지금은 축제가 한창이잖아요?”
“그, 그렇습니다. 공주 전하…….”
과거 왕족 호위기사였던 프리아나.
그런 그에게 공주는 굉장히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잘 보인다고 신나 하던 녀석은 어느새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까지 했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고,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이슬린과 이스바르트도 프리아나와 똑 닮은 자세로 인사를 올렸다.
이스바르트는 왕족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곁눈질로 이슬린을 따라 자세를 갖췄다.
“오랜……. 처음 뵙겠습니다. 이안 임페라입니다.”
난 일행 녀석들과는 달리 대충 고갤 한 번 까딱이는 걸로 대신했다.
왕족을 앞에 두고 굉장히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크흠!”
덕분에 적갑 기사단 놈들 몇이 움찔댔지만 이글렌 공주가 제지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를 지켰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붉은 안면갑 사이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세간의 인식이 그런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예의 없는 거긴 했으니까.
어찌 보면 욕지거리 한번으로 끝난 게 우스운 거라 해야 하나?
이것도 망나니라 가능한 처사였다.
“같은 고향 분들이 멀리서 관람하고 계시다길래 마음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자리를 좀 바꿔 드렸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늘같은 은혜에 감사 할 따름입니다!”
프리아나는 큰 목소리로 이글렌 공주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녀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뭐 고맙긴 하다만…….
“후훗. 백작님은 어떠신가요? 곧 출전하실 터라 불편하진 않으실지.”
“뭐 어디 밖에 나가는 건 아니니까요. 적당히 부를 때 내려가면 되겠죠.”
“으, 으읏……. 그…렇죠?”
이글렌의 반응에 대충 감이 왔다.
이 여자가 우릴 옆자리로 옮긴 건 배려보단 걱정에 가까웠다.
혹여나 어제 일을 떠벌리고 다닐지 걱정된 거겠지.
“걱정 마십쇼. 공주님. 공주님께서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으으…….”
“물론 경기 보는 데 한눈팔려 출전을 못한다거나…….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뜻이겠죠.”
“그, 그래요?”
“그럼요.”
가볍게 한 번 웃어 주자 이글렌도 긴장한 눈빛을 풀었다.
솔직히 남의 비밀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거기다 그 대상이 공주라면 목이 달아날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요. 그럼……. 어?”
자기네들 자리로 되돌아가려던 이글렌이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슬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슬린을 왜?
그러고 보니 이슬린의 반응도 뭔가 불편한 듯한데.
지난번 갈렌 왕자 때도 그렇고. 뭐가 있나?
게다가 지금 이글렌 공주의 반응은 마치… 이슬린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인데.
“이슬린? 이슬린 맞지?”
“…이슬린 베로니아.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