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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9화 (79/222)

79화

“위셀란의 풍취는 마음에 드십니까?”

“위셀란의 밝은 미래처럼 맑은 하늘에 눈이 부실 지경이에요.”

“하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의 미모엔 비할 바가 못 될 듯하군요…….”

“아하하…….”

왕자의 느끼한 멘트에도 이글렌은 가능한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상대는 위셀란의 첫째 왕자 도벨런.

타국의 왕자인 만큼 불필요한 알력은 최소화하는 게 공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사내라 혼담이 오갈 수도 있는 상대.

‘이런 남자는 질색인데.’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이글렌은 그녀의 오빠, 갈렌 같은 인물을 혐오했다.

따지고 보면 갈렌만큼 심보가 못돼 처먹은 남자는 아니니 괜찮지 싶지만, 적어도 자기 핏줄만 믿고 설쳐대는 인간을 배우자로 맞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공주라는 신분에게 허용된 인생이란 게 있는데.

게다가 이글렌은 잘 알고 있었다.

에런골드라면 국익을 위해 자기 딸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인물이란 걸.

“와아아아!”

“말씀드리는 순간! 대전제 첫 번째 승자가 나왔습니다!”

자신의 서글픈 처지에 우울함을 느끼던 그때, 대전제 첫 번째 시합이 끝났다.

승자는 프로스트 랜드에서 온 레니 베나트.

사실상 이번 대회에서 가장 강한 자로 유력한 우승 후보자였다.

워낙에 실력차가 컸던지라 상대로 나섰던 출전자는 별다른 기세도 못 보여 준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역시 레니 베나트, 저자가 이겼군요.”

“그러게요. 확실히 랭크 6은 다르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눈엔 뭐랄까… 좀 야만스럽다고 해야하나? 흐흐!”

“…….”

“…농담입니다! 하핫!”

레니 베나트가 확실히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저돌적인 검무를 펼치는 건 맞다.

하지만 이는 호쾌한 검법이라 해야 맞지, 야만스럽다 할 게 아니다.

검이란 걸 전혀 모르는 작자들이나 하는 멍청한 발언.

도벨런의 수준에 딱 맞는 발언이었다.

“호호. 재밌는 농담이네요.”

“그렇습니까? 하하하! 제 농담으로 공주님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들다니! 이런 영광이 따로 없군요!”

“아하하…….”

공주는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다음 경기는…….”

사회자가 다음 선수들을 소개할 때가 되자 공주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 저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왔으면 하는데…….”

“이런! 제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아름다운 꽃일수록 쉴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말입니다.”

“…그럼. 모쪼록 즐기고 계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지요! 하하!”

잠시 여유가 생긴 이글렌은 대전제가 한창인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분위기 전환 겸 얼굴에 물이라도 뭍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 실례지만 어딜 가실 생각이신지…….”

다소 우악스럽게 생긴 남자가 이글렌에게 말했다.

그녀의 호위기사이자 곧 1차전에 나서기 위해 한창 준비 중인 피츠 라이트였다.

“아. 개회식때 와인을 좀 많이 마신 것 같아서요.”

“아. 그런…….”

피츠는 이글렌이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줄 알았는지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금방 돌아올 테니 맘 놓고 대전 준비 하고 있어도 된답니다.”

“예! 공주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반드시 승리하여 아이소테르의 명예를 드높…….”

“아하하… 네, 저도 응원할께요.”

“에헤헷. 감사합니다, 공주님!”

피츠는 헤실거리며 경기장으로 되돌아갔다.

주위에 사람들이 북적이긴 했지만, 다들 대전제에 눈이 팔려 공주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흐음…….”

아마 당분간 그녈 찾는 이는 없을거다.

“바닷바람이나 좀 쐴까.”

품속에서 스카프 하날 꺼내 든 그녀는 머릴 칭칭 감싸 매곤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글렌은 거의 평생을 성 안에서만 살았던 터라 위셀란에 왔을 때부터 바닷가를 구경해 보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와 잠깐 지나치듯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바닷물에 몸을 적셔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될까?’

순간의 일탈에 가슴이 쿡쿡 찔려 왔지만 뭐 어떤가.

무서운 아버지의 시선도 없고, 사사건건 꼬투릴 잡으려는 오라비도 없다.

간만에 들른 먼 타지에서 이 정도 일탈 없이 사는 건 너무 가혹하다.

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잠깐 구경만 하는 건데 뭐.”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글렌이 사라진 걸 눈치채곤 호위 기사들이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닐 거다.

그때까진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후후.”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에 가슴이 떨려왔다.

산뜻한 바닷바람도 기분 좋았고,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도 좋았다.

사락.

“히야…….”

이글렌은 구두를 벗어 맨발로 모래의 촉감을 즐겼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피츠한테 모래 한 병만 퍼 담아 놓으라고 할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호위 기사 피츠 라이트.

그를 떠올린 이글렌은 고갤 홰홰 저었다.

다른 적갑 기사단에 비하면 한창 젊은 편이라 말이 좀 통할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울 정도인 국왕을 향한 충성심은 공주인 그녀가 봤을 때도 고갤 가로저을 수준이었다.

아마 모래를 퍼 담아 달라고 했다간 바로 에런골드한테 쫄래쫄래 이르러 갈 게 분명했다.

“하이고. 내 팔자야.”

새장 속에 갇힌 새.

그게 이글렌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게 배부른 투정인 건 잘 알고 있었다.

새장 속의 새가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짐승보단 나을 테니까.

“…어?”

한창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개어 놓은 옷가지가 모래사장 한켠에 위치해 있는 게 아닌가.

이글렌은 옷가질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작자들이 이런 식으로 옷가질 정리하고 간다던데.

“설마?”

이글렌은 서둘러 옷가질 향해 달려갔다.

귀족 남성이 입을 법한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옷.

그렇다는 건…….

“자살?”

“뭐하는 겁니까?”

“꺄악!”

* * *

“그러니까… 내가 자살한 줄 알았다는 거군요.”

“네…….”

여인은 소리 지른 게 민망한 듯 개미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카프로 얼굴을 꽁꽁 싸매는 게 여간 민망한 게 아닌 듯했다.

“다행히 그런 건 아닙니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거든요.”

“그, 그렇군요.”

여인은 뭐가 그리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

그러다 문득 내 꼬라지를 보고 깨달았다.

이 세계 기준으로 속옷만 입은 차림새.

게다가 암초에 긁혀 넝마쪽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내 이름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지금 몸 상태는 꽤나 괜찮았다.

처음 이안의 몸에 들어왔을 때랑 비교도 민망할 정도로 살집도 있고 자글자글한 근육까지.

“크흠.”

민망함에 서둘러 속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닷물에 절은 속옷을 그대로 입을 순 없어서였다.

살짝만 말린 다음 입어야…….

“뭐, 뭐하시는 거예요!”

“응? 아, 잠깐 뒤돌아 있어요. 아무리 나라도 벌거벗은 걸 보여 주긴 좀 그러니.”

“아앗…….”

여인은 황급히 등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는 사이 난 용린검에 속옷을 둘둘 말아 꼬치구이처럼 만들었다.

치이익…….

그 상태로 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속옷이 빠른 속도로 마르기 시작했다.

옷감이 상하기야 하겠지만, 옷 하나 새로 못 살 정도로 여유가 없진 않다.

그렇게 대충 옷을 말리고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돼, 됐나요?”

“네. 이제 돌아서도 됩니다.”

“…….”

따지고 보면 굳이 되돌아설 이유는 없었지만, 여인은 순순히 되돌아서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나저나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묘하게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이…….

‘갈렌 왕자랑 비슷하게 생겼네.’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이런 이쁘장한 여자한테 비유하는 게 미안하긴 하다만.

실제로 닮긴 닮았다.

“…어?”

“…응?”

한참을 뚫어지게 보고 나서야 눈앞에 여인의 정체가 뭔지 떠올랐다.

“이글렌 공…….”

“공주니이임!”

저 멀리 모래사장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날 보자마자 안색이 돌변했다.

“이노오오옴!”

“뭐, 뭐야?”

스릉!

저 멀리서부터 대뜸 칼부터 뽑아 들고 달려들기 시작한 괴한.

그림만 놓고 보면 해적이나 다름없는 비주얼이었지만 대충 뭐하는 놈인지는 짐작이 갔다.

‘호위 기사구만.’

“이노오옴! 감히 공주님을 납치하려 들다니! 편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얼굴만 놓고 보면 털 없는 고릴라에 가까운 남자다.

목덜미가 굵직굵직한 게 힘은 좀 쓰는 편인 것 같은데.

“피츠! 그만두세요!”

“고, 공주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자는 아이소테르의 왕가 혈통에 손을 대려 한……!”

“그만두라니까요!”

“아앗…….”

피츠라는 호위 기사는 공주의 다그침에 금세 꼬랑질 말고 잠잠해졌다.

“이분은 그저 지나치다 마주한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분은…….”

“이안 임페라입니다. 아이소테르의 공주님을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을 몰랐군요.”

“이, 이안 임페라?”

내 이름을 들은 피츠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곤 다시금 방금 전처럼 경계심 가득 찬 눈초리로 날 노려봤다.

“공주님! 이자, 아니 이분은 분명…….”

“그래요. 피츠가 1차전에서 이긴다면 맞붙게 될 상대 분이시지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크흠…….”

피츠는 내 평판을 신경 쓰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어쩌면 평판뿐만 아니라 에런골드의 그간 행보 때문에 경계하는 걸지도 모른다.

‘둘 다일 수도 있고.’

“이름이 뭐지?”

대뜸 반말부터 나오자 피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호위 기사는 웬만한 귀족급으로 대우를 받긴 하지만, 일단은 정식으로 귀족 작위를 받은 건 아니다.

그에 반해 이쪽은 제대로 백작위까지 받은 귀족 중에 귀족.

새내기 호위 기사 따위한테 전혀 꿀릴 건 없었다.

“피츠 라이트라고 합니다. 백작 각하.”

“흠. 특이한 이름이군.”

“…예?”

“아님 말고.”

방금 발언에 녀석은 상당히 언짢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대뜸 처음 보는 사람을 괴한으로 취급한 녀석한테 잘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알기론 아직 1차전이 한창이지 않나? 이렇게 여유 부릴 땐가?”

“…호위 기사에게 공주님을 호위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흠. 그건 좋은 마음가짐이군.”

살짝 추켜세워 주는 듯한 발언에 녀석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고보니 얘나 프리아나나 좀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

제니스 기사학교 출신은 다 그런가?

주인공 녀석은 안 그런 것 같던데.

“아무튼. 준비 잘 해 보라구. 2차전에서 만나고 싶다면.”

“예. 백작 각하. 들어가시지요.”

“그럼. 공주님도 바람이 차니 너무 오래 나와 계시진 마시지요.”

“아… 네, 그래야죠.”

이글렌은 방금까지의 일탈이 들킨 게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뻔하다.

맨날 성에만 갇혀 있었으니 모처럼 먼 타지로 나온 김에 바람 좀 쐬러 나온 거겠지.

그러니 호위 기사란 녀석이 저리 허겁지겁 달려 나온 걸 테고.

사실 앞으로 있을 일을 떠올려 본다면, 이번 위셀란에서의 사절단이 그나마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거다.

“불쌍하구만. 공주라는 것도.”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

이번 대전제에서 생길 인연으로 이글렌은 위셀란의 왕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렇게 둘은 약혼까지 가지만, 결혼식이 있기 얼마 전, 갈렌이 왕위에 오르고 만다.

보통 왕가와 혼약을 맺게 되면 사이가 돈독해지기 마련이건만, 상대는 미친 망나니 갈렌이다.

왕위에 오른 이상 갈렌을 제어할 고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갈렌은 오히려 이글렌에게 앙심을 품고 반역죄를 뒤집어씌운다.

동시에 위셀란에도 통보한다.

이글렌을 내놓든가, 아니면 전쟁이라도 불사하든가.

위셀란 입장에서도 괜한 위험을 떠받을 순 없었기에 결혼식 한 달 전 이글렌과 파혼에 나선다.

꼼짝없이 오라비의 손에 죽게 생긴 와중에 몇몇 귀족들이 이글렌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이마저도 이글렌을 내세워 왕가의 적통을 따지려 할 뿐이었다.

결국엔 아이소테르의 내전으로 퍼지게 되고.

이글렌은 쫓기고 쫓기다 벌판에서 쓸쓸히 죽게 된다.

그게 아이소테르의 공주. 이글렌이 갖게 될 운명.

“….”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말 한마디 섞어서 신경만 쓰이게 됐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그녀가 소설에서와 똑같은 운명을 갖게 될지, 아니면 이스바르트나 프리아나처럼 다른 운명을 걷게 될지.

“뭐.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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