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전제에 참여한 데는 명성을 드높인다느니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기 위셀란에 볼일이 있어서였다.
위셀란.
기사단의 성지.
영겁의 기사단에게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땅.
영겁의 기사단을 막으려 수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동원됐지만 결국엔 모두 죽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겁의 기사단에 단 하나의 피해도 없던 건 아니다.
교환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긴 했지만.
“어디 보자…….”
1차전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기사단의 성지에 위치한 해안가.
“와아아……!”
저 멀리선 벌써 1차전이 한창인지 환호성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최소 랭크 5는 되는 기사들 간의 싸움인데 볼거린 확실하겠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하지.”
해안가엔 새하얀 모래가 파도에 밀려 반짝이고 있었다.
난 그 위에 서서 소설 속 한 구절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리 어렵진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고 굶어 죽을 때까지 내가 가진 유일한 놀거리였으니까.
‘첫 편부터 마지막 화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정독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마지막 화는 보지 못했다.
미완결로 끝날 줄 알았던 소설의 마지막 편.
그게 나오긴 했었으니까.
‘읽어 보진 못했지만.’
대체 뭐였을까?
끝까지 읽을 수 없었던 해괴한 텍스트들의 나열.
“에잇.”
쓸데없는 생각에 또 잠길 뻔했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읽은 부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말고는.
사라락.
해안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가 넘실거렸다.
기분 좋은 상쾌함에 옅게 비릿한 바닷내음이 코를 찔렀다.
“이쪽이군.”
난 바닷바람이 향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바스락거렸지만 나쁠 건 없었다. 질척한 펄도 아니고 반짝이는 모래라 기분 좋은 느낌이 더 컸다.
그렇게 바람이 향하는 곳을 향해 잠시 걷자 이내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이 나왔다.
그 너머론 깎아지를 듯한 해안 절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흠.”
예상은 했다만 아무래도 물속에 들어가야 할 듯싶다.
거추장스런 귀족 특유의 치렁치렁한 옷을 훌훌 벗어 버렸다.
남은 건 새하얀 셔츠 같은 속옷뿐.
대한민국이었다면 그냥 얇은 옷이나 다름없겠지만, 귀족이라 그런지 이게 속옷이었다.
백작씩이나 되는 작자가 해안가에서 속옷 바람으로 발견된다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기사단의 성지 사람들 대부분은 대전제를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은 없었다.
‘뭐 들킨다 해도 망나니 놈이 망나니 짓 하나 보다 하고 말겠지.’
이래서 망나니가 좋긴 좋다.
벗어 놓은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쉰 채로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직 날이 더울 때라 그런지 차갑다기보단 시원한 정도에 가까웠다.
그렇게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 채로 해안 절벽 깊숙한 쪽을 향했다.
절벽 근처라 그런지 뾰족뾰족한 암초와 거센 파도가 헤엄을 괴롭혔다.
‘분명 이쯤이라 했지.’
기사단의 성지에 위치한 해안 절벽.
가끔 휴양 삼아 놀러오는 관광객들에겐 꽤나 위험한 장소다.
절벽을 타고 몰아치는 거센 바닷바람에 소용돌이치는 해류까지 섞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멋모르고 물놀이 하던 귀족들이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말이 실종이지 사실상 익사다.
후우웅……!
해안 절벽으로 향할수록 바람이 거세지고 물살이 빨라졌다.
예전 이안의 몸뚱이였다면 다른 귀족들처럼 실종자 중 하나가 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놀이기구 타는 정도였다.
요동치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로 해수의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저기다!’
해류가 급속도로 밀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채로 해류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해류를 타고 해안 절벽 아래쪽을 향해 몸이 휩쓸려 내려갔다.
이대로라면 울퉁불퉁한 돌부리에 갈기갈기 찢겨 나갈 지경이다.
바앙.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 사양이다.
서둘러 체내의 마나를 전신에 얇게 둘렀다.
제대로 된 호신강기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돌부리에 찢겨 죽는 것 정도는 막아 줄 거다.
…푸핫!
한참을 해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나다니다 마침내 해수면 밖으로 머릴 끄집어냈다.
“후! 아무리 그래도 계속 잠수하는 건 힘들지.”
하얀 셔츠 곳곳이 찢겨 넝마쪽이 되긴 했지만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건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마나를 두른 덕분이었다.
“여긴…….”
가까스로 헤엄쳐 나온 주변 풍경은 방금 전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축축한 냄새부터 미약하게 들어오는 햇빛.
여긴 해안 절벽 뒤에 위치해 있던 자그마한 동굴이었다.
그리고 동굴 주변엔 나보다 먼저 휩쓸려 들어온 자들로 가득했다.
물론 나처럼 살아 숨 쉬는 자는 없었다.
“다들 죽은 지 한참 됐군.”
잔뜩 널브러진 해골들은 이미 옛적에 명을 달리한 듯 회색빛깔 뼈다귀만 남긴 채였다.
입고 있던 옷가지가 그나마 이들이 사람이었단 사실을 알려 줬다.
재수 없게 여기까지 밀려 들어온 자들은 다양했다.
인근 섬에서 낚시 하다 온 자도 있었고, 값진 장신구를 봐선 귀족이었던 자도 있었다.
“얘네들한테는 볼 일 없지.”
내가 찾고 있는 건 검을 다뤘던 자다.
그것도 지금 이 세상엔 얼마 남지도 않은 그런 자.
챙그랑.
해골들을 살펴보다 그만 발치에 뭔가 걸려 버렸다.
“어이쿠. 이거 미안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굳이 함부로 다룰 필요는 없다.
발치에 걸린 뭔갈 제자리에 놓으려다 손이 멈췄다.
두툼하고 곧게 뻗은 검선.
그 시작에 위치한 손잡이 부근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아리를 튼 채 제 꼬릴 집어 삼키는 용의 문양.
우로보로스.
“찾았다.”
잔뜩 헤지고 녹슨 갑옷. 짭짤한 바닷물에 바스러져 제 형태를 찾긴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영겁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 그 문양만큼은 용케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자는 과거 영겁의 기사단이었던 자다.
과거 대전쟁 시절, 위셀란을 침공했다 죽은 몇 안 되는 영겁의 기사단 기사.
지금은 죽어 백골만 남긴 상태지만.
“그럼…. 실례 좀 하겠수다.”
죽은 자를 위해 짧은 목례를 올리고 백골 사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바다동굴이라 부식이 빨라 제 형태인 걸 찾기가 더 어려웠지만, 품속에 지닌 자그마한 상자 하나만큼은 비교적 멀쩡했다.
“호오…….”
상자 주위에 뭍은 먼지를 털어 내자 거의 온전한 상태나 다름없는 외관이 나타났다.
신기한 건 분명 안에 뭔갈 담은 것 같은데도 틈 하나 없이 매끈했다.
상자라기보단 매끈한 금속 주괴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걸 여는 방법은…….
“이렇게 하면 된다 그랬지.”
전신의 마나를 흩어 낸 다음,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만을 이용해 상자에 주입했다.
미세한 마나 컨트롤이 필요했지만, 다시금 얻게 된 단전을 사용하는 터라 그리 어렵진 않았다.
…덜컥!
그러자 틈 하나 없이 매끈했던 상자가 입을 열었다.
“후후.”
별 문제 없이 상자를 열어 내자 만족스런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별것 아닌 상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건 꽤나 값진 녀석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대인의 유물 중 하나에 해당하는 거니까.
“그래 봐야 영겁의 기사단 전원한테 하나씩 배분되긴 했지만.”
이른바 개인용 배낭 같은 거다.
단순한 비상식량 같은걸 넣는 용도가 아닌, 영겁의 기사단만이 써야하고, 그들만이 쓸 수 있는 물건들.
소설에서도 분명 언급되는 아티팩트다.
잠시 쉬어 가는 에피소드였던 걸로 기억한다.
주인공 일행은 그간의 노고를 씻어 내고자 위셀란에 위치한 해안가로 휴양을 떠난다.
신나게 놀던 일행은 어느 순간 주인공 녀석이 사라진 걸 깨닫는다.
알고 보니 해류에 휩쓸려 해안 동굴로 빨려 들어간 뒤였고 디아는 거기서 영겁의 기사단 백골 사체를 발견한다.
하지만 영겁의 기사단이라면 워낙에 치를 떨던 주인공이라 아티팩트를 챙길 생각도 안 하고 서둘러 자릴 뜬다.
주인공은 몰랐겠지만, 수백 편에 걸친 지긋지긋한 회상씬을 읽은 독자는 알았다.
그 좋은 아티팩트를 버리고 간다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이거지.”
상자 안엔 손가락 굵기의 얇고 긴 유리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무슨 응급 키트 같이 생긴 유리병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응급 키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능을 가진 영약이니까.
“일회용인 게 흠이긴 하지만… 성능 하난 제대로지.”
아무래도 영약인지라 한 번 마시면 끝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부가적인 효과는 무시 못 할 수준이라 여러모로 쓸 만한 영약이다.
지금 당장 성능을 확인할까도 싶었지만…….
“아무래도 필요할 때 쓰는 게 좋겠지?”
일단 상자는 다시 백골 사체 옆에 고이 내려다놨다.
아무래도 카잔 제국 녀석들이 쓰던 거라 함부로 가지고 다니긴 위험했다.
대전제가 한창인 기사단의 성소에서 이런 걸 갖고 다닌다?
괜히 들켰다간 이래저래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상자 자체가 쓸 만하긴 해도 내가 필요한 건 내용물이니까.
“어디 또 없나?”
이왕 온 거 다른 영겁의 기사단 시체는 없나 살펴봤지만 더는 없었다.
아쉽지만 이곳 해안동굴에서 챙길 만한 건 이것 하나뿐인 듯했다.
“솔직히 이거 하나면 대전제 우승도 노려볼 만하겠지.”
랭크 6을 어떻게 상대하나 싶었지만, 이거라면 혹시 모른다.
가능하면 우승하고 싶다.
이안 임페라라는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필요한 건 준우승이 아닌 우승이다.
만에 하나 준우승으로 끝났다간 이런 식으로 소문이 돌지도 모른다.
‘운 좋게 부전승으로 올라간 놈이 결국엔 결승전에서 뚜들겨 맞고 졌다.’
“그건 절대 안 되지.”
게다가 우승 상품으로 걸린 건 다름 아닌 레서 드래곤의 마핵.
진짜 드래곤 하트에 비하면 발톱의 때 수준이지만 몬스터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핵 중엔 최상급에 가까웠다.
“그거면 용린검의 수준을 한층 더 올릴 수 있을 테고.”
하룬까지 있으니 레서 드래곤의 마핵이라면 에고 소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고 소드를 가진 기사라.”
그것도 백작위까지 가진 기사.
그만하면 혼란한 세상에서도 어이없게 죽진 않을 거다.
그런 녀석을 함부로 건들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갈렌 왕자나 에런골드나 미친놈이라는 거지만.
“자. 여기서 챙길 건 챙겼고… 이제 가 볼까?”
속옷이 넝마쪽이 되긴 했지만 영약을 얻었으니 수지맞는 장사다.
겉옷이야 아까 모래사장에 벗어 놨으니 다시 입기만 하면 될 테고.
“후읍!”
다시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가 들어왔던 해수면을 향해 몸을 던졌다.
급류에 헤엄치기가 힘들긴 했지만 빛이 나오는 방향을 향해 가기만 하면 돼서 어렵진 않았다.
‘우읍…….’
확실히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려니 호흡이 버거워졌다.
슬슬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푸학!”
정신이 아찔해지려던 찰나, 가까스로 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아 놓은 영약도 잘 있고, 이제 대충 옷만 입고 돌아가면…….
“응?”
물에 젖은 채로 해안가를 빠져나오려는데,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겉옷이 젖을까 가지런히 개어 놓은 옷가지 주위로 웬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여자?’
호리호리한 체형을 보니 여자 같았다.
이슬린이나 이스바르트가 온 건가 했지만 행색을 보니 처음 보는 녀석이다.
하늘하늘한 실크로 머리까지 뒤집어쓴 걸로 보아 귀족집 영애 같아 보였다.
대전제를 구경하러 왔다 잠깐 바닷바람이나 쐬러 온 듯했다.
주위에 호위 기사 하나 없이 온 거면 몰래 나온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뭔가 낯이 익는 것 같은데…….
“뭐하는 겁니까?”
“…꺄악!”